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01
요즘 항간에는 선(禪)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이 나옵니다. 더러는 단전법이라 해서 아랫배에다 힘을 주고서 하는 단전법으로 교수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화두로 의심만을 주로 하는 교수법도 있고, 화두도 없이 묵조(黙照) 하는 묵조법도 있고 각기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제일 우수하다고 주장한단 말입니다. 책을 많이 보신 분은 어느 것을 쫒아야 하는 것인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선(禪) 이것은 따지고 보면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고 몸도 마음도 상쾌한 것입니다.
신(身) 안락, 심(心) 안락 몸도 마음도 안락한 것입니다. 나쁜 생각을 하고 번뇌 망상하면 괴로운 것이고 일체 만유를 자비심으로 포용하는 그런 생각은 마음이 개운하고 편한 것입니다. 남을 미워해야 원수가 생기고 뭐가 생겨서 괴로운 것이지 우주 모두를 수용하고 천지 우주에 자기 적이 하나도 없단 생각할 적에 마음이 개운하단 말입니다.
또한 더 들어가서 천지와 우주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이 생각같이 마음이 편한 생각은 없습니다. 악마가 있고 사탄이 있고 뭐가 있고 해서 자기와 적대가 되는 것이 있어야 마음이 괴로운 것인데 아무것도 없고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 생각같이 마음이 편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참선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참선을 많이 하고 의심을 많이 하고 염불을 많이 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세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고 셋이고 자꾸 갈라지고 분열되면 참선이 못 됩니다.
또한 어째서 우리 몸이 안락한 것인가. 우리 몸 자세가 나쁘면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리를 배워서 알겠지만 이렇게 몸을 구부릴 경우에는 척추가 구부려지므로 소화도 안 되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붙는단 말입니다. 척추를 쭉 펴서 단정히 머리로는 하늘을 찌르는 기분으로 해서 앉고 턱은 약간 이렇게 당기고 어깨를 펴고서 긴장을 푸는 동시에 단정한 모습, 그 단정한 자세와 같이 몸이 편한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좀 거북하지요. 그러나 형색을 고치면 그것같이 좋은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라서 몸이 단정해지면 그에 따라서 마음도 단정해지는 것입니다. 단정한 사람치고 몸자세를 아무렇게나 앉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좌선은 이 참선도 신(身) 안락, 심(心) 안락이란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앞에서 현실적으로 위대하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별로 없어 신통자재한 분이 없어 참선하면 내내야 좋다가 말겠지 그 정도로만 느끼는 것이지, 참선으로 해서 얻는 무량 공덕은 우리가 별로 믿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원효(元曉) 스님이나 서산(西山) 대사나 그분들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을 많이 했지마는 그때 과장해서 퍼트린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지, 경전에 보면 석가모니께서 미간에서 광명이 나와서 천지 우주를 몇 바퀴 돌고 다시 들어가고 하는 것이 다 상징적인 묘사에 불과하겠지 하고 과소평가합니다.
허나 그런 기기묘묘한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묘기(神通妙奇)는 사실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있을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은 오직 참선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참선의 고요한 가운데서 우리의 번뇌가 딱 녹아진다 말입니다. 참선을 통해서 번뇌가 다 녹아지면 정작 그런 신통묘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그 뒤의 위대한 도인들은 이와 같이 번뇌가 다 녹았기 때문에 인간이 본래 다 가지고 있는 신통묘기를 발휘했단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우리 참선 한 분들은 비록 눈앞에 그런 신통묘기를 부리는 분도 안 보이고 말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져서 불교를 믿는 분이나 안 믿는 분이나 별것도 아니게 되고 말입니다. 이런 때는 우리의 본성에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은 믿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자주 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그 컴퓨터 보십시오. 입력만 시켜 놓으면 이상한 힘을 발휘하고 말입니다. 불성(佛性), 우리 인간성의 본성이 불성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불교를 상당히 아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시간만은 주로 모르시는 분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우주의 본성(本性)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나 산천초목이나 우주 일체 만유의 본성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위에서 일체 만유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순수에너지 일체 만유를 구성하는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 이것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이런 불성을 먼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참선 행법으로 해서 이와 같이 앉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교가 많습니다마는, 기교를 익히기 전에 그와 같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은 비록 개발을 못 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내 생명이나 우주의 본성은 일체 공덕을 갖춘 불성이다. 그러면 공덕은 어떤 것인가. 공덕은 다는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도 공덕이 많으니까 경전에서 보면 도인이 되어서 신통묘기를 낸 분들이 몇 천 명 모여서 몇 백 년 동안 오랜 시간 동안 갖추고 있는 공덕을 다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알기도 하고 재주도 있고 글씨도 쓰고 자비도 베풀고 등 기기묘묘한 모든 그런 기술들 또는 기능들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것이 끝도 없고 갓도 없고 원만히 불성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그런 공덕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이라.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것은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생기고 소멸된다 하더라도 불성만은 영원히 존재 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항시 있단 말입니다. 언제나 존재한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낙(樂)이라 불성 가운데는 일체 안락스러운 고통도 없고, 고통은 상대 유한적인 고통이지 절대 무한적인 영원적인 고통은 없습니다. 안락한 행복 고통이 없는 좋은 것도 또 불성에는 충만되어 있단 말입니다.
행복스런 즐거움이 충만 되어 있는 것이 낙(樂)에 해당됩니다. 아(我)는 우리와 같은 작은 아(我)가 아닙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그런 아(我)가 아닙니다. 천지 우주를 나로 하는 대아(大我) 우주가 내가 되는 동시에 대아 가운데는 일체의 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기능이나 재주나 뭣이나 다 갖추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한 컴퓨터 같은 것도 대아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레이더를 보십시오. 이상한 힘을 내는 것 말입니다. 전깃불을 보십시오. 전기가 얼마나 빛나는가? 전기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전자의 흐름에서 오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자란 무엇인가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의 근본 생명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가운데 아(我)는 광명이나 재주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힘이 다 포함되어 있다. 정(淨)이라 조금도 흐림이 없이 청정하고 행복스러운 영롱한 것만 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영생하고 동시에 모든 행복과 안락을 갖추고 있고 동시에 모두를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고 또한 동시에 청정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常)과 낙(樂)과 아(我)와 정(淨)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 불성입니다. 우리 불교는 무엇을 믿는가. 경전 읽고서 외고서 알듯 말 듯 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 가운데 있는 인간성의 본질이요 우주의 본성 가운데 있는 이와 같은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영원히 완전무결한 행복 동시에 완전무결한 모든 지혜와 공덕 완전한 청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본질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안 믿으면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지요.
개발은 미처 못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불교의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이와 같은 육식(六識만) 가지고 있습니다만, 잠재된 의식은 보다 훨씬 깊은 식(識)이 많습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나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이나 심층심리학을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재는 육식이지만 그 밑의 제7식 말라식(末那識) 그보다 깊은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제9식 암마라식(菴摩羅識) 제10식 그때는 불식(佛識)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파 들어가고 가면 가장 저변에는 역시 부처인 것입니다. 일반 자연 학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식물 원소에 들어가 보면 끝에는 불성인 것입니다. 부처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은 아까 말씀한 상락아정이란 말입니다. 생을 몇 번 되풀이 하여도 불성(佛性)은 멸(滅)하지 않고 영생하고 말입니다. 우주가 다 파괴가 되더라도 불성은 멸하지 않는다. 불성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또한 일체 지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