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 주일설교
본문: 마 25:31-41
제목: 영생의 양, 영벌의 염소
1.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최후 심판을 하신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모든 민족에 대한 최후 심판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하신다.
요한계시록에서 심판은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신다. 같은 보좌요 같은 심판주이시다.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1-15)
계시록 20장의 보좌 심판은 요한 사도에게 보여준 모습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보좌 심판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바로 오른편의 양의 무리이고,
책들에 기록된 자들이 바로 왼편의 염소의 무리인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책들에 기록된 대로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
자기 행위를 따라 양의 무리는 영생에, 염소의 무리는 영벌에 처해진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46)
그 영벌이 ‘둘째 사망’이요, 영원한 불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도 마귀도 그곳에 던져진다.
첫째 사망에서 일단 음부로 갔다가, 최후 심판에서 둘째 사망, 곧 영벌의 불못으로 간다.
문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양의 무리가 아니고 염소의 무리라는 것이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유대인들의 어르신이요 대표들이 주동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을 따랐고 뜻을 같이 했다.
그들은 염소의 무리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모세를 통한 역사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다수도 광야에서 멸망 당하였다.
여호수아를 통한 역사로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다수도 가나안 땅에서 멸망을 당했다.
천년 동안 전 유럽을 다스린 교황과 신부들, 그들을 믿고 따른 천주교인들 어디에 가 있을까?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 속한 사람들은요? 양의 무리일까요? 염소의 무리일까요?
어느 시대고, 그것이 유대교회든 로마교회든 개혁교회든 현대교회든,
교회의 장로들 대제사장들(유명 목사들) 서기관들(유명 신학자들) 믿었다가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1-12)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3-14)
주님 분명히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14-21)
주님의 보좌 심판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양의 무리에 속할 것인지,
책들에 기록된 염소의 무리에 속할 것인지, 판단도, 착각도, 여러분 각자의 몫이다.
2. 양의 무리는 주께 행한 것으로 복을 받고 영생에 들어간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주께 무엇을 행했나요?
내가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는 것이다.
의인들이 무어라 대답하는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그러하신 것을 보고 돌보았나이까 하리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교회 생활 얼마나 열심히 하였느냐’, ‘성경과 교리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무슨 직분을 가졌었느냐’,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였느냐’ 묻지 않으신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무엇을 하였느냐만 묻고 계신다.
‘내 형제’라 하셨는데 믿음의 형제가 우선이지만,
크고 둘째 되는 계명대로 내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내 형제’이다.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 모든 번제물과 제물보다 나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만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수 있으니
이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하는 행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조건 선행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헛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여야 한다.
루터와 칼빈은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행함을, 곧 믿음의 삶을 잃어버렸다.
너희가 이런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바로 이웃 사랑의 실현인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22:3)
무엇을 공의와 정의라고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가운데서 돌보는 것이 더러움이 없는 정결한 경건이라고 하신다.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곧 공의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6-7)
그리하면,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한다고 하셨고,
그리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라 하셨다.
오래 황페된 것들을 다시 세우는 것도,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는 것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는 자들에 의해서,
또 그 선한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 교회는 더 이상 지성주의, 교리주의, 율법주의, 바리새인 누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웃의 결박과 어려움을 돌봐주는 선한 행실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가, 발도인들이 보여주고 맺었던 열매들로 돌아가야 한다.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는 염소의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 염소의 무리는 주께 하지 아니한 것으로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 행위들이 바로 염소의 무리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하지 않은 행위들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신다.
이로 인하여 이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하신다.
영원한 운명이 영벌이냐 영생이냐 그 갈림이 믿음의 행함에 달려 있다.
왜 나라의 본 자손들이 영원한 불에 들어가고 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유명하고 권세좋은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을 조심해야 한다.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이제, 우리 믿음의 ‘행동 강령’으로 삼고 실천해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25장 양들의 행함이다.
이사야 58장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의 행위들이다.
야고보서 1장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행위들이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이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행함으로 채워지게 하자.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고 싶은가요?
그러면,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하여, 곡식 벨 때에 잊어버린 한 뭇을 두고 오십시요.
감람나무 열매 딸 때도, 포도원 포도 딸 때도 그들을 위해 남겨 노십시요.
곡물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마십시요.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마세요.
그 말씀이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소득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지 적용을 잘하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
네 모퉁이를 베지 않는 것은 내 소득의 10%일까요? 15%일까요?
땅에다 자기를 위해 보물을 쌓으면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당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서, 참으로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말씀을 듣고서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음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영생의 양에 속할 것인지, 영벌의 염소에 속할 것인지가, 오늘 나의 행함들에 달려 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