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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유래
재림교회 태동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을 찾는다면 그 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오우크 부인이다. 그가 역사에 등장할 무렵에는 라엘 씨의 부인으로 먼저 결혼한 전력이 있는 분이었다가 후에 프레스톤의 부인이 된 분이었으나 두 분의 남편이 모두 사망하였음인지 홀로 된 과부이었다. 그녀가 역사의 한 인물이 됨에 대해서는 그녀가 안식일을 지키는 미국의 제칠일침례교회 신자로서 1843년에 제칠일침례교회는 대총회에서 안식일에 대한 중요성을 미 정부에 알리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홍보하기 위한 일련의 집회를 갖기 위하여 투표하는 일에 참여하였던 열렬한 믿음의 행동파의 여인이다. 당시 미국에는 제칠일 침례교회 신자가 5, 500명이었는데 12명으로 된 그룹의 설교자들이 참여하였는데 그중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던 분이다. 1843년 11월 첫째 날을 금식과 기도의 날로 선포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안식일을 위하여 일어나도록 탄원하며 안식일 준수가 거의 사라져가는 교회 역사에서 재림운동의 불씨를 지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안식일 회복의 역사는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고 이 안식일을 지키던 제칠일침례교회의 역사는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알게 된다.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승만 박ㄷ사가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편리를 도모하여 준 분이 바로 이 침례교회 목사인 쿠르푸트 목사이다. 이승만 박박사의 양아들인 이인수 박사와 그의 부인께서 본인에게 자신의 집 벽에 그의 사진을 걸어두었다고 하였을 때에 그 부부는 쿠르푸드 목사가 제칠일이란 어휘가 들어가서 재림교회 목사인 줄로 알았으나 본 재림교회 해외 선교사 명단에 쿠르푸트 목사가 등장하지 않아 의아심을 갖던 중그가 침례교회 목사인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제칠일침례교회는 중국에 선교적 사명을 띄고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적 운동과는 연결되지 않은 교단을 찾아서 간 곳이 제칠일침례교회로서 쿠르푸트의 사저를 몇 달 동안 공관으로 사용하면서 집무하였었다.
위에서의 오우크 부인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그녀에게는 18세된 딸 디라이트가 공립학교 선생으로 부름을 받아 워싱톤에서 그녀와 함께 좋다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가던 중 그녀는 자신이 있던 마을에서 자신이 있던 마을에서 1844년 늦은 겨울에 교회에 참석하여 밀러의 재림기별을 받아들였다. 당시 밀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던 그녀로서는 출석할 교회가 그곳에는 없었다. 하는 수없이 딸과 함께 안식일을 지킬 수 없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 친교를 위하여 일요일에 교회를 나갔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고 젊은 목사인 프레데릭 휠러 목사가 12마일 떨어진 곳인 힐스브로부터 말을 타고 와서 설교하였다. 설교를 듣고 있던 오우크 부인은 무엇인ᄀᆞ 욕구 불만에 찬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목사의 체면을 생각하여 참았다. 후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서슴없이 토로하였다. 당신은 모든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하나를 빼먹고 있다고 질타하자 휠러 목사는 뭐라고요? 놀라면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하나님은 넷째 계명을 지키라고 하는데 당신은 주의 안식일 대신 교황의 일요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844년 3월 16일에 안식일을 일요일에서 토요일로 지키는 북미에서의 최촌의 공식적인 목사가 된다. 그는 자신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면서도 교회에서는 안식일에 관하여는 설교하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재림의 소망을 받아들였던 목사 한 분과 의논한다. 이런 일을 통하여 힐스브로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뉴 헴프샤 웨어러에서 구두를 만드는 소도시에서 회중을 돌아오는 전직이 자유쥬의 침례 신자인 토마스 플레불과의 서로 간의 토의로 인하여 두 번째로 안식일을 지키는 목사가 되었다.
위에서의 몇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들이 일어났으나 침례교회 신자로서 1844년 이른 11월까지 아일란드의 브에이크 자매가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고 북미 밖에서는 상당수의 재림주의자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프란시스코 허모제데스 라모스 멕시아로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자로 복음주의를 외치면서 개혁 정치를 구상하던 저명한 정치가이다. 그가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한 자였으나 그가 안식일을 지킴으로 1831년에 체포되었다. 스콧트란드이 재임수 버그가 영국에서 재림과 예언에 관한 저자로 잘 알려진 자로 1832년에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한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일이 미국에서의 재림운동과 연결되고, 오우크 씨의 딸인 드라이드 오우크와 연결되는바 드라이드 오우크는 판즈온즈 농장에서 살았다. 그때에 모친 오우크 씨는 딸과 함께 살았다. 오우크 부인은 솔직한 여성이었고 판즈온즈 농장 주인은 관대한 사람이었다. 판즈온즈 농장 주인의 아들 중 하나가 오우크의 딸인 선생과 사랑에 빠져 저들이 결혼한다. 저들은 농장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았으나 장차 재림의 열품으로 너무도 준비할 시간이 없는 중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1844년 10월 22일 재림을 바라보는 자들 중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서는 프레데릭 휠러. 프레블. 로데 아일란드의 시스터 브레이크 삼인이 있었을 뿐이다.
10월 22일이 지나갔다. 재림을 사모하던 자들은 저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들은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였던 것은 오우크 씨가 지켰던 안식일이었다. 적은 그리스도인 형제 교회들의 집단이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갖던 중에 판즈오즈의 아들인 장남 윌리암이 자신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고 작정하고 저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를 찬양하였다. 이렇다고 해서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였으나 후에는 받아들여 그 다음부터는 저들 몇 사람이 모여 안식일이 아니라 북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로 옮기도록 초서을 옮기는 일이 이곳 판즈오즈 농장에서 일어났다. 재림교회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게 된 일이 오우크 씨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고 그녀가 속하여 이던 제칠일 침례교회로부터 전수가 된 일이다.
우리들은 안식일 하면 위의 역사 외에도 상기하여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 창조 시까지 연계된 것이 안식일이다.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도 그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1520년대부터 믿는 이들의 침례를 주장하면서 생겨난 교회가 있었다. 이 일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들이 사제였다. 저들이 사제직을 포기하고 루터런 신자가 되어 성경을 연구하면서 제칠일안식일을 지키는 이들이 생겨났다. 루터는 신학자를 보내어 저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스왈드 그래이트와 안드리아스 피쳐는 안식일의 중요성을 망각할 수가 없어 안식일은 창조 시로부터 있어 온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변경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단 7:25의 작은 뿔의 소행이라고 지적하였다.
1529년에 안드리아스 피쳐 부부는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여자는 물에 빠지고 남자는 교수형을 받았다. 그녀의 남편은 목이 잘려지는 순간에 땅 바닥에 떨어져 후에 피하였다. 그런 후에 체포되어 성벽 높은 곳에서부터 던져졌다. 이렇게 해서 두 부부는 비참한 최후의 운명을 맞았다. 오스왈드 그래이트는 중앙 유럽에서 충실하게 믿는 이들을 격려하며 모험들을 하다가 1545년에 잡혔다. 그가 잡혀 감옥에서 1년 6주간을 살다가 감옥엣 소동이 일어나 밤 중에 깨어 일어나 열려진 감옥문을 나갔으나 그를 따라 추적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고서는 강물에 투신하게 된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건 모험으로 인하여 훗날 그것이 대영제국에 복음의 생명을 불어일으키는 불씨가 되어 미국으로 옮겨지게 된다. 어떤 이들이 안식일을 지켰는지에 대한 연구는 스페인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초기의 미국인들의 안식일을 지킴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일요일을 지키던 일에서 나왔다. 1600년대에는 영국에서 상당수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다.
그때에 안식일을 지키던 이들 중에 요한과 도로시 트레스키가 있었다. 요한은 양심적인 청교도 목사이고 도로시 트레스키 부인은 부요한 가정에서 젊은이들을 위하여 읽는 것을 배워주는 숙련된 기술을 지닌 재능이 있는 교사이다. 저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감옥으로 보내졌다. 트레스키는 1617년경에 웨스터민터에서 죄인의 목과 양손을 끼워 사람 앞에 보이게 하는 관자의 형구 위에 올려지는 형벌을 선고받아 채찍을 맞으면서 감옥에 남아 있었다. 웨스터민터에서 피리트 감옥까지 매질을 당하면서 갔다. 그가 삼년의 긴 고난의 선고의 형벌이 끝났을 때에 마음을 고쳐먹고 안식일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남편의 비겁함에서 용기를 내었다. 부인은 벼룩이 들끓고 죄로부터의 전염이 있는 감옥에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15, 6년을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영국 교회의 목사인 프란시스 뱀필드는 1662년에 맹세에 대한 양심적인 거절로 인하여 감금되었다. 그가 감옥에서 개인적인 성경 연구의 결과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 그는 9년간의 형량으로 남아 있는 기간 동안에 안식일을 매일 설교함으로 그는 감옥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회합을 만들었다. 그가 후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감옥에 갇혔다. 그런 후에 다시 석방되었으나 계속 안식일을 설교함으로 세 번이나 체포되어 런던으로 이송되었다가 마침내 습기가 차고 냉냉한 감옥에서 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다른 또 한 분으로 안식일을 지키던 목사인 요한 재임스가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고 있을 때에 경찰이 교회로 들어와 찰수 2세의 왕의 이름으로 그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불응하여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고용된 배심원에 의하여 반역자로 선고받아 사지가 찢어지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의 용기 있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이 밧줄에 매어달리고 그의 몸은 학살되고 그의 심장을 가슴에서 끄집어내는 만행을 당하고 불에 던져졌다. 제칠일은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원하는 자들에게 무서운 경고로 보여준 처사이다. 그의 머리는 뽀족한 것으로 찔러졌다.
초기의 제칠일안식일 침례교인들은 안식일을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날로 지켰다. 오늘날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없다. 왜 그럴까? 세상이 많이 변한 탓일까? 마귀의 증오심은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 모두가 핍박을 받도록 요구된 것은 아니다. 우호적인 영국에서의 왕실과 고상한 여인들 중에 산파의사인 피터 참버린 씨는 30년 이상 안식일을 지켰다. 그는 여러 언어를 구사하였고 그는 질병을 치료함에서 더운 물과 찬 물을 추천하였고 그는 바람에 의하여 달리는 인력거를 발명하였다. 그의 영리함과 능력을 인정한 영국 황실은 그녀에게 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박해를 피할 수가 있었다. 제칠일안식일 준수는 스데벤 몽포드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감으로 시작된다. 그는 1664년에 영국에서부터 이주하여 와으며 1671년 러데 아일란드에서 미국에서 최초로 제칠일안식일 침례교회를 조직하였다.
1700년 초에 펜실바니아 베들레헴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있었다. 진젠돌프도 일요일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고자 결심하였다. 식민지 여러 곳에서도 독일인으로 안식일을 지키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100년이 지난 때인 1802년에 1,2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저들이 대총회를 조직하였다. 저들이 전도에는 열정적이 아니나 안식일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소중히 지닌 자들인지라 저들 중의 위원들이 1843년 11월 1일을 기하여 금식과 기도의 날을 정하여 안식일 홍보에 나선 저들의 기도의 결실 중 하나가 오우크 부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우크 부인으로부터 안식일 기별을 전하여 들은 프레데릭 목사는 안식일을 지켰으나 별반 설교를 하지 않았으나 그가 알게 된 안식일이 프레불에게 전달되면서 1845년 2월에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제목이 신문에 기고하게 되었고 1844년 12월에 죠셉 투너와 에디슨과 엘렌은 그녀가 1846년 결혼한 후에 안식일을 알게 된다.
프레불 목사가 안식일에 대한 기별을 대문자로 이태릭체로 상당 부분을 할해하여 예언 중에 성취된 작은 뿔이 하나님의 때와 법을 변경한 사실을 주지시킨 결과로 첫째 날이 무효인 것을 널리 드러낸 쾌거이다. 오늘날도 이것이 필요하다. 안식일이 등장하게 된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밀러주의자인 신학자인 J. B. 쿡이 수년간 안식일을 변호하였다. 그 기별의 책자와 복사판들이 파리스, 마이네에서 발견되었다. 그곳들은 재림운동의 온상지이다. 그곳에서의 복사판인 기사를 베이츠와 앤드류의 가족이 읽고 회심하여 재림교회에 흡수가 된다. 베이츠 씨는 140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마차로 철도로 도보로 다녔다.
프레데릭 목사를 만나기 위하여 힐스로보로 향하면서 늦게 도착하기도 하였다. 베이츠 씨는 그를 만나 연구하며 서로 대화하였다. 휠러 목사의 아들이 자신의 부친과 죠셉 베이츠의 일화를 전하고 있었다. 잊ㅇㄹ 수 없는 사건이 하나가 등장한다. 다음날 아침 베이츠가 휠러가 워싱톤으로 가서 단풍나무가 마련된 단상 밑에서 판스온즈의 몇 사람과 함께 정오까지 안식일에 대하여 대화를 주고받았다. 베이츠 시는 자신의 집이 있는 마세추세츠 페어 헤븐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에 베이츠 씨는 이웃과 가족 친지들에게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하여 줄 수 있을까 깊은 상념을 가졌었다. 자신의 귀를 때리는 음성이 들렸다. 나를 따르라는 음성이었다. 뉴 베드포드와 페어 헤븐 사이의 다리를 건널 때에 재림신자 친구 한 분을 만난다, 그가 베이츠 선장, 무슨 뉴스라도 있는가? 라는 물음에 제칠일이 주의 안식일이다 라고 답하였다. 이 역사적인 한 순간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가 회심하여 안식일을 지켰다. 이것이 후에 번져난 것이다. 안식일이 결정적으로 믿어지게 된 배경 중 하나는 1846년 2월 7일자 데이 스타 엑스트라에 로지아가 하늘 성소를 본 것과 직접 연결된다. 초기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인 에디슨, 크로지아, 한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제칠일안식일인 ‘영원한 표’라는 책을 기술한 것을 후에 엘렌 화잇이 받아들이게 된다. 안식일 기별이 우리에게 전하여진 숱한 험한 과정을 상기하면서 우리들이 존중하고 지녀야 할 엄숙한 마음 자세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