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2:2~5절을 보면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서, 결혼 공식 후, 각자의 책임(의무)이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남편으로서 아내인 북이스라엘의 의식주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아내인 이스라엘은 의식주에 관한 모든 문제를 남편인 하나님에게 의지(의존)해야 하지만, 아내인 북이스라엘이 남편인 하나님에게서 의식주의 모든 문제를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남자(바알)에게서 그것을 의지하려 하자, 남편인 하나님이 그들을 벌거벗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황에서 6절은“라캔 힌니”즉 “그러므로 볼지어다 (보라)”으로 시작합니다. 새로운 전환점을 알려줍니다. 극약 처방을 냅니다. 아내의 외도를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아내가 다니는 길을 막고 담을 쌓습니다. 왜 담을 쌓습니까? 원래는 거친 짐승들로부터 곡식과 열매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결국 아내를 거친 짐승처럼 날뛰는 것으로 상징합니다. “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길은 계속 다녀야 생깁니다. 그 행위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길”, 즉 “스티마”는 흙을 두들겨서 잘 닦아놓은 길을 의미합니다. 아내의 외도가 지속적이어서 얼마나 고착되어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길을 차단합니다.
7절을 보면“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돌아가다”라는 말은 “슈브”동사를 사용합니다. 왜 하나님이 시험, 역경을 주느냐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와 완전히 유사합니다.
8~9절을 보면 애인의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됩니다. “바알”입니다. 바알에게 “바침”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복을 구함이고 둘째는 출처의 기원입니다. 바치는 곡물이 어디서 왔느냐는 출처, 기원을 보여줍니다. 곡물을 바치는 것은 이것이 당신에게 왔고 감사하다는 것이기에 기원 출처를 보여줍니다. 헌금, 십일조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알에게 이 모든 것을 바침으로 하나님은 주었던 모든 것을 뺏어버립니다.
10절에 “수치”는 히브리어 “나부르트”로서 여인들의 중요한 부위를 말할 때 쓰입니다. 결국 그 중요한 부위를 다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악의 수치입니다. 바알을 섬김의 결과가 최악의 수치입니다. 9절에서 다 빼앗깁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내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11절의 “희락, 절기, 월삭, 안식일, 명절”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쉬는 날입니다. 절기의 핵심은 여호와를 향한 은혜, 감사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향한 은혜의 감사에 반응하지 않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준 의도와 목적이 없는 것이이게 이것을 폐하겠다고 하십니다.
12절의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은 불륜의 값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여인이 몸을 판 대가로 준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긴 대가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나무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최고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곡물입니다. 성공과 번영을 상징합니다(이사야 37장, 미가서 4장 4절, 스가랴 3장 10절). 하나님은 이것을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고 들 짐승에게 먹입니다.
13절에서“나를 잊어버리고”에서 “잊어버린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카흐”로서 “자카르”(기억한다)의 반대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잊어버렸고 기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신명기는 광야 2세대에게 던진 모세의 유언 설입니다. 신명기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첫째, “샤카르”(잊어버리다)와 둘째, “자카르”(기억하다)입니다. 잊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곧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기억한다는 것은 곧 잊지 않는 것이고 아는 것입니다.
14절은 호세아 2장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러므로” 즉,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떤 반전입니까? “타이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타”로서 구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속이다(꾀다), 애걸하다, 설득시키다(설복), 타이르다 인데, 이 중에 “설득시키다”, 이것이 가장 맞는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 “들”입니다. “미드바르”는 “광야”로 주로 번역합니다. 40년 광야 생활이 떠오릅니다. 정관사가 붙여 “그 광야”입니다. 왜? 그 광야로 보냅니까? 첫째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언약이 체결됩니다. 부부 관계로 보면 그곳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결혼으로 비유하면 광야는 신혼의 시간입니다. 둘째 은혜와 기적의 공급 시간입니다. 남편이 필요한 것을 기적적으로 채워주는 시간입니다. 첫사랑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첫사랑의 시기입니다. 절대적 의존의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그 광야, 그 첫사랑의 시간으로 돌아가겠느냐입니다. 회복은 돌이킴입니다. 그 첫사랑의 시간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 의존하는 것이 참된 회복입니다.
15절의“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에서 “아골 골짜기”는 아간이 범죄하고 이곳에서 심판받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원인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전리품을 숨기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전리품은 전쟁에서 거둔 것인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에게 바쳐야 합니다. 승리로 이끌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어도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히 한 일은 없습니다. 창과 칼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전투에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아간이 전리품을 숨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전쟁을 이끌었다, 이겼다는 사실을 숨겼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했기에 실패했습니다.
15절에서 “아골 골짜기”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간주, 또는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을 바알에게 드렸을 때 아시리아, 바벨론의 포로 운명이 됩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이 된다고 할 때 “소망”은 히브리어 “티크바”로서 저주의 장소가 이제 “소망”, “희망”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서 2장 18절, 21절에서 기생 라합이 정탐꾼에게 줄을 내리었는데, 그 줄이 “티크바”입니다.
이스라엘 운명이 역전됩니다. 이스라엘 운명이 처참할지라도, 아간 범죄로 인한 아골 골짜기라 할지라도 주께 돌아가면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입니다.
16절의 “내 남편”은 히브리어 “이쉬”, “내 남자”의 의미입니다. 배우자, 짝, 남편의 의미입니다. 관계적 측면이 강조됩니다. “내 바알”은 이방 신 바알이 아닙니다. 일반 명사입니다. “바알”이 동사일 때는 “소유하다”, “바알”이 명사일 때는 “주인”의 의미입니다. 바알의 목적어가 여인이면 내가 이 여자의 남편이라는 표현입니다(출애굽기 21:3, 22, 신명기 22:22). 본문에서는 이 여자가 목적어로 내 여자라는 “바알”로 쓰입니다. 법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내 바알이다”가 “내 남편이다”로 됩니다. 바알을 섬기면서도 “내 바알이다”가 “내 남편이다”로 되기 때문에 “내 바알이다”를 못쓰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이쉬”, 즉 “내 남편이다”만 쓰게 하겠다고 합니다. 혼합 종교를 배격하겠다고 합니다.
17절의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에서 “이름”은 어떤 작용을 합니까? 그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게 됩니다. “쟈카흐”, “샤카흐”, “야다”의 중요 단어 세 가지는 모두 다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인데, 기억하는 존재가 이름입니다.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겠다”라는 말은 더는 바알을 기억 못 하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숭배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억하면 예배합니다.
18절을 보면 이스라엘과의 언약 회복은 어떤 결과로 나타납니까? 이스라엘과의 언약 회복은 창조 세계(언약)의 회복입니다. “언약을 맺으며”라는 말은 새 창조의 회복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아담에게 “생육, 번성, 충만하라”라는 창조의 명령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창조와 그 창조 세계의 다스림, 통치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 단절은 창조 세계 역시 죄의 세력 다스림입니다. 회복은 이러한 창조 세계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영혼 구원과 생태계(자연 세계)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은 중요하지만 자연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습니다. 연결됩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나타내기를 고대합니다. 자연 세계 고통은 사람이 주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자연 세계를 도구화시킵니다. 자연 세계가 엄청난 피해, 고통을 당합니다.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는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언약 관계가 되면 이스라엘은 전적인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싸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 탐욕의 결과 약육강식, 불의가 생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나의 것으로 생각할 때 싸움이 생깁니다.
19~20절의“장가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라쓰”로서 “약혼하다, 정혼하다”의 의미입니다. 결혼에 이르기 전 단계가 약혼, 정혼입니다. 약혼은 결혼하기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입니다. 약혼할 때 중요한 절차가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신붓값을 지불합니다(사무엘상 18:25, 사무엘하 3:14, 다윗이 신붓값 지불). 결혼식 하면 합방, 신혼살림 시작합니다. 약혼은 합방, 살림을 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20절의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에서 “알리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로서 친밀함, 진짜 관계로 들어간다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장가들다”(“아라쓰”)라는 말은 법적으로 동등한 남편, 아내 관계로 봅니다. 결혼과 똑같은 관계로 봅니다.
그러면 신붓값은? “공의(쩨대크), 정의(미쉬파트), 은총(하쉬), 긍휼(라아밈, 자궁), 진실(에무나)”입니다. 출애굽기 34:6절의 하나님의 속성이 다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공유 속성이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윗 왕가는 메시아 속성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11:3~4절을 보면 속성이 잘 나타납니다. 신붓값은 전적인 선물입니다. 인간의 노력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안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선물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같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선물 받게 되면 결과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알다”라는 말은 “야다”로서 “지식으로 안다, 분별, 남자와 여자가 결합한다”의 의미입니다.
21~22절의 “이스르엘”이라는 말은 호세아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21절의 “그 날에”는 종말, 심판의 날입니다. 21~22절에서 “응답하고”는 총 5회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하는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바알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풍성과 풍요이었습니다. 바알에게 기도하지 말고 나를 향해 기도하라. 내가 응답하겠고 하늘을 열고 땅을 열어서 모든 곡식, 소출이 나로 주어질 것이다. 심판의 이스라엘이 아닌 축복의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서, 결혼 공식(선언) 후, 각자의 책임(의무)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으로 하나님 노릇 해주심(신실하심)을 하는데, 북이스라엘은 인간의 편에서 인간으로서 인간 노릇(신실함)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들(광야)로 데려가서, 첫 결혼 때의 장소, 신혼기를 보냈던 장소, 아내로서 남편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장소인데, 그곳에서 설득해(타일러서) 슈브(구약 회개)케 하여, 그들을 다시금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한 열망,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보내셔서, 내어주심으로, 일으켜 주셔서, 우리의 주 되심, 주 예수 그리스도 되심으로 법정적 칭의, 즉 죄 용서, 무죄 선언,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관계적 칭의로서 관계 회복하여 성도됨, 자녀됨, 백성됨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우리 편에서 신실함, 즉 이중 사랑 계명(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