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디아
김제김영
흐름이 매순간 젊어지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 머무름은 찰나마다 낡
아가는 일에 집중할 뿐이지요. 부딪혀도 좀체 깨지지 않는 이 방식을 그
냥 끈질긴 놀이이지요.
이국의 소금을 구하려고 당신이 인도양까지 다녀오는 동안, 나는 컴
컴한 계곡에서 달을 보고 있어요.
계곡의 어둠은 비길 데 없이 씁쓸하지만 기연가미연가하던 것들이
분명해지는 아침에는 안개가 제일 먼저 타래를 풀어요.
기원이 다른 사유가 한 페이지에 머무르는 것은, 갈등을 부르는 존재
방식이었나 봐요. 누군가는 흘러야 하고 누군가는 머물러야 한다면 머
무르는 거 내가 할게요. 나뭇잎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격려해
야 한다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숲의 어깨를 지그시 다독여 주어야
한다면, 그거, 내가 할게요. 서로 같이 가는 것도, 서로 달리 사는 것도
숲의 한 이름이겠지요.
나는 이제 양말을 살 필요가 없어졌어요. 치밀하게 직조되었다는 양
말을 골고루 신어봤지만 머무름의 매혹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어요. 흐
름을 따라나서고 싶지 않아요.
서리를 담뿍 뒤집어 쓴 나무들이 생의 갈구를 지어요. 그걸 받아쓴
달빛이 썩어가는 낙엽사이, 거기 쟁여 있는 어둠을열고 들어가 결가
부좌해요.
ㅡ<현대시> 5월호
전북 김제 출생
1996년 시집『눈 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