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물 장군, 집안의 남자 4대가 전사… 조정에서 ‘정문’을 세웠다
김여물 장군(1548~1592)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외암(畏菴)이다. 선공감정(繕工監正·토목과 수선을 맡아보던
선공감의 관원) 약균(若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주목사 수렴(粹濂)이며 아버지는 찰방(察訪·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
훈(壎)이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다.
남에게 베풀기 즐기고 매사
신중
부친이 일찍 별세하자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혹시 꾸중 듣는 일이 있으면 하루 종일 문밖에 엎드리고
말씀이 없으면 물러가지 않았다. 봉급으로 들어온 것을 전부 어머니에게 바치고 한 푼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남에게
베풀기를 즐겼고 매사에 신중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상대의 빈부귀천을 가려 차별을 두지 않고 항상 예의를 다했다. 친구 중 자녀를 많이 두고
부부 모두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어리고 병약한 아이를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길러 친아들 김류와 함께 장성시켰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다른
성씨인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김여물이 함께 교유했던 사람은 모두 뛰어난 선비들인데 의주목사 서익(徐益)과 귀성군수
임식(林植)은 가장 마음이 맞았다. 두 사람은 노모가 계셨는데 항상 생신 때면 친어머니처럼 모셨고 친구들도 역시 서로 그렇게
했다.
1577년 장원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전사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문과(謁聖文科·국왕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이 김여물의 지략(智略)을 알고 자기 휘하에 두려고 했다. 도순변사(都巡邊使·군무를 총괄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하던 국왕의
특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특청해 선조가 신립과 함께 출전시켰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했다. 상주에서 쫓겨온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만난 후
조령 방어가 어렵겠다고 판단한 신립은 충주로 가서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김여물은 강력히 반대하며 “소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령을 점령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해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숫자도 적은 데다 전력은 약하고 전의(戰意)도 상실한 상태였다. 이미 견고(堅固)하지 못한 우리 군사는
싸움이 시작되자 모두 겁에 질려 달아났다. 김여물 장군이 지휘하는 군중(軍中)에도 단 한 명의 병사만 대오(隊伍)에 남아 있었다.
상황이 지휘명령을 내릴 수가 없게 되자 신립 장군이 김여물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 또한 이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는가?”라고 했다.
김여물이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죽는 것을 애석히 여기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며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에 이르러서 직접 왜적 수십 명을 죽인
다음에 결국 충주 달천에서 함께 물에 뛰어들었다. 이때가 1592년 4월 28일이었다. 나이는 겨우 45세였다. 1593년에 의관을 갖추도록
염습해 안산(安山)에 모셨다.
집안의 부인 4대도 병자호란 때 목숨
끊어
김여물 장군은 충렬(忠烈)도 뛰어났거니와 그의 후손과 부인, 며느리 등 여인들의 충절(忠節)도 역사에 길이
빛나는 집안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김여물의 후손들은 강화도로 피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음으로 정절을 지키려 1637년 1월 25일 강화도 앞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4대에 걸친 고부(姑婦)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
김여물을 비롯한 4대의 남자는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이 4대의 부인들은 병자호란 때 모두 자진한 것이다.
4대의 부인들은
김여물의 후실 평산 신씨(신립 장군의 누이동생)를 비롯해 김류(김여물의 아들)의 부인 진주 유씨, 김경징(김여물의 손자)의 부인 고령 박씨,
김진표(김여물의 증손)의 부인 진주 정씨다. 김여물의 첫 부인 박씨는 장군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영의정으로 추증… ‘장의’ 시호 받아
이처럼 남자 4대는 전사하고
부인 4대도 남자들 뒤를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조정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웠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됐으며, 1788년(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4주년이자 김여물 장군 순국 424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모두 호국의 의지를 다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때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