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전에 우연히 금강경의 키워드인 相이 니밋따(nimitta, 외관, 영상)의 번역어가 아니라 산냐(saññā, 인식, 개념, 명칭)의 번역어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산냐는 최초기 부처님 말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숫따니빠따 4장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산냐와 딧티(견해)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늘어놓고 논쟁을 하며 깨달은 자는 이런 산냐와 딧티에 초연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다는 것이 4장의 구핫타까 숫따(2번째경)나 청정경(4번째경)이나 마간디야 경(9번째)나 쭐라위유하 경(12번째)의 핵심이다. 이렇게 산냐를 극복하라(saññānaṃ uparodhanā, Sn. 737)는 숫따니빠따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금강경이다. 발제자는 상이 산냐의 역어라는 이 한가지 사실때문에 조계종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이 초기불교의 핵심사상을 분명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직관할 수 있었고 큰 환희심이 생겼다. 그래서 금강경이야말로 최초기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하는 경이라서 이런 측면을 밝히고 싶어서 번역과 주해를 시도했고 금강경 결제에 발제자로 동참하게 되었다.
상(산냐)을 금강경에서는 아․인․중생․수자로 정형화해서 들고 있다. 인간들 특히 수행자들이 가질 수 있는 대표적인 관념, 즉 산냐가 바로 자아, 중생, 개아, 영혼이라는 네 가지이다.(4상과 9상에 대해서는 제2일에 중점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이런 산냐를 세우게 되면 그 실재하는 것과 합일하거나 그것의 은총으로 행복을 누리려는 구도(構圖)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고정관념을 타파하지 못하는 한 참다운 해탈이란 있을 수 없다.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은 단지 산냐일 뿐임을 지혜롭게 관찰해야 한다.(금강경 역해 14-3의 주해) 그래서 불교는 무아를 거듭강조하며 금강경에서도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17-7장)이라고 통쾌하게 결론짓고 있다. 산냐의 척파와 무아는 같은 말이다.(금강경이 空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초기불교의 無我를 강조하여 천명한다는 것만으로도 금강경이 반야부 경들 가운데서도 최초기에 결집된 경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체 산냐를 멀리 여의었기에 불세존들이시다(離一切相 卽名諸佛, 구마라즙 역/ 諸佛世尊 離一切想, 현장 역, 14-3장)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중생이니, 무상정등각이니, 보살이니, 불국토 건설이니 법이니 보시니 인욕이니 반야니 하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거론하고 이런 것들이 고정불변의 진리로 정해져 있다는 산냐를 거듭해서 척파하고 있다. 그래서 17-7에서 제법무아의 불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르침을 제기하면서 여기에 확신을 가져서야 그를 일러 보살 마하살이라 한다고 역설하면서 금강경은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 우리 한국 불교를 돌아보자. 말로는 모두 무아, 무아 하면서도(아니 말로도 무아를 설하지 않는 자들도 너무 많다!) 무아의 참된 의미를 두고 고뇌하거나 사유하는 자는 정말 드물다 할 것이다. 특히 수행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참선이나 수행에 대해서는 고뇌하는 흔적도 보이지 않고 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곳에 빠져 자성불(自性佛), 참나(眞我), 견성(見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내 부처 등을 설하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서 몰입하면서 아뜨만을 거듭 거듭 찬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아라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설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아뜨만을 역설하는 전도사로 변해버렸다. 왜 부처님이 무아를 역설하셨던가는 차치해 두고 부처님이 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로 대표되는 인도사상과 인도수행에서 최고의 경지라 자부하던 것을 아직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 하여 버리고 당신의 수행을 스스로 해나가셨던가에 대해서 불자라면 수행자라면 한 번쯤은 고뇌하고 서로 탁마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대충 얼버무려서 어물쩍 넘어가기 바쁜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다시 우리의 참선수행을 되돌아보자.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발상으로 참선을 하고 불교를 설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발상으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자리인 자아(ātman)가 있나니 그것을 찾기 위해서 생명을 걸자고 힘으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이러한 힘의 논리를 앞세워, 화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여서 온 몸과 마음을 몰아세워가고 있지는 않은가?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에 도인이 되고 부처가 되어 만중생의 존경과 귀의와 찬탄과 예경을 받게 되는 것으로 돈오돈수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조금 거칠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한국불교의 수행에는 이러한 허망하기 짝이 없는 힘의 논리가 너무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자아든 불성이든 대아든 진아든 진인이든 자성이든 주인공이든 내 부처든 불생불멸이든 공이든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몰입하면 아무래도 힘으로 그것을 향해서 밀어붙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니 바른 수행은 아니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업이 되면 매사가 그런 힘을 쓸려는 강력한 의도에 지배되어 정념정지(正念正知) 즉 살피는 기능이 개발되지 못해서 경계에 속게 될 것이다. 아니, 건전한 상식이나 경우를 무시하고 세상사 모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발제자는 반성해본다.
그런데 설사 힘으로 밀어붙여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고 위대한 선포를 하더라도 기실 그것은 그것과 하나 되었다는 산냐에 지나지 않는다고 금강경은 설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떤 영원한 무엇이 있다.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알아야 하겠다. 그래서 본 경은 거듭해서 그런 것이 없다고 제법무아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몇 몇 불자들이 얼토당토않게 ‘이 뭣꼬’를 ‘꼬아함’(ko ahaṃ)1) ‘나는(aham) 누구인가(kaḥ)’로 번역되는 산스끄리뜨로 베단따 본류를 자처하는 상까라(Saṅkara)파의 힌두 수행자들이 참구하는 명상 주제임. 이들은 이 ‘나’를 영원한 자아(아뜨만)라 하여 이 아뜨만에 몰입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니 화두참구를 이런 수준으로 파악한다면 참으로 문제가 많다고 하겠다. 그리고 요즘 몇 몇 인도 사두들은 숨을 들이쉬면서 ‘꼬(ko)’하고 내쉬면서 ‘[아]함(aham)’하라고 지도를 한다니 참 화두와는 십만 팔천 리라 하겠다.
의 아류쯤으로 이해하려 드는데 이러고서도 한국불교를 선(禪)의 정통 운운하면서 세계불교에 내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선종의 소의경전인 이 금강경으로써 화두라는 산냐, 선종이라는 산냐, 마음 깨쳐 성불한다는 산냐 등 일체의 공부에 대한 산냐를 한번쯤 점검해봐야 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발제자의 말을 화두 참구하지 말라, 참선하지 말라고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참 슬픈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신도들은 어떠한가. 축자영감설의 신봉자들이 산냐 문제는 추호도 생각해보지도 않고 독송하는 공덕에만 잔뜩 탐욕을 부려 몇 백 독(讀), 몇 천 독, 몇 만 독 하면 병이 낫고 영가가 눈에 보이고 천도가 되고 운운해가면서 금강경을 망쳐놓고 있지 않은가. 향상의 길을 가기 위해서 백천만억겁 동안 백천만억의 수없이 많은 몸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금강경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 몸뚱이를 낫게 하기 위해서 아니 독송하면 낫게 해준다니 죽어라 하고 독송만 해대고 그래서 몇 천 독을 했다, 몇 만 독을 했다, 영가가 눈에 보인다 등등의 가당찮은 경계, 그런 산냐에 빠져서 허우적대니 참으로 세존께서 통탄하실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 해서 금강경 독송을 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분은 발제자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다.(15-1, 5번 주해)
이처럼 승속을 막론하고 서릿발보다 냉엄하고 벼락보다 더 날카로운 벼락경/금강경을 매일 독송하고 무아상을 거듭 거듭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모두 아상 저 아뜨마산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3장의 15번 주해)
발제자는 이런 배경에서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시고자 한 산냐의 척파라는 근본을 되새겨 바른 수행에 대해서 사유하고 고뇌해보고자 금강경의 번역과 주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산스끄리뜨 원문과 의역위주인 구마라즙본과 직역인 현장본을 철저하게 대역하였다. 그러면 한문에 익숙한 분들이 금강경의 원의미를 파악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쟁점 2. 경의 제목: 벼락경인가 금강경인가
금강경의 원제목은 Vajracchedikā금강 Prajñāpāramitā반야바라밀 Sūtra경이다. 이 가운데서 Vajracchedikā(와즈라 체디까)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와즈라(vajra)는 √vaj(to be strong)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한다. 베다에서는 ‘벼락’이나 ‘번개’를 뜻했으며 산스끄리뜨 일반에서도 이런 의미로 많이 쓰인다. 특히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인드라(Indra, Sakka, Śakra)라고도 하며 불교에서 호법선신으로 받아들여져서 중국에서는 제석 혹은 석제라 옮겨 부르고 있다)의 제일의 무기로 베다에 나타난다. 자연계에서 제일 위력적인 벼락을 고대 아리야족들은 신들의 왕인 인드라의 무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뜻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다이아몬드’ 즉 금강석이며 그래서 중국에서는 금강(金剛)으로 옮기며 본 경에서도 이 뜻으로 쓰였다고 간주한다. 다이아몬드는 제일 귀한 보석으로 보석 중의 왕이며 제일 단단한 물질이다. 그래서 본 경도 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제일 값지고 귀중한 가르침일 뿐 아니라 다른 경전들이나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종교를 갈아서 검증해볼 수 있는 최고로 수승한 가르침이요, 이 가르침으로 저 아·인·중생·수자로 대표되는 산냐를 철저히 척파하여야 무상정등각을 실현하게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겠다. 체디까(chedika)는 √chid(to cut)의 명사 cheda(자름, 부숨)에다가 ‘~하는 것’을 뜻하는 ‘-ika’ 접미어를 붙여서 만든 명사이다. ‘자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vajracchedika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먼저 와즈라를 금강 즉 다이아몬드로 간주하면, 첫째가 와즈라와 체디까를 동격으로 취급해서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chedika) 금강석(vajra)’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둘째는 ‘금강석마저도(vajra) 능히 잘라 버릴 수 있는 것(chedika)’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겠는데 첫 번째의 의미가 가장 적합한 뜻이라 하겠다. 현장은 능단(能斷, 능히 잘라버릴 수 있는) 금강이라고 경의 제목을 옮겼는데 ‘자름’을 의미하는 체디까의 뜻을 적극적으로 살린 번역이라 하겠다. 구마라즙은 그냥 금강이라 옮겼는데 금강석은 당연히 모든 것을 잘라버릴 수 있는 물질이라서 ‘능히 잘라버릴 수 있는’의 의미를 굳이 옮기지 않고 생략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와즈라를 벼락의 의미로 파악한다면 벼락이 번쩍하는 섬광과 천둥소리와 함께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찰나에 잘라버리듯이 아무리 정교하고 견고한 산냐일지라도 이 가르침으로 능히 다 잘라버린다는 뜻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 가르침 그것을 벼락이 하든 금강석이라 부르든으로 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산냐를 잘라버린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자름’을 의미하는 chedika는 ‘산냐를 부숨’이나 ‘산냐의 척파’를 뜻하는 최초기경 숫따니빠따 4장의 saññānam uparodhana와 같은 의미를 지녔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금강경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초기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여기에 대해서는 6장 21번 주와 부록 등을 참조할 것)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와즈라체디까는 금강(다이아몬드)의 의미보다는 벼락, 霹靂(벽력)의 의미가 더 강하며 인도에서는 이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쟁점 3. 상(想, 相)이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상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지만 다시 한번 산냐의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想이나 相으로 옮기고 있는 원어는 산냐(Sk. saṃjñā, Pali. saññā)이다. saṃjñā는 saṃ(함께)+√jñā(to know)의 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같게 인식하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즉 a1, a2, … 의 경우를 보고 a라고 뭉뚱그려 인식하는 행위라 보면 되겠다. 즉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종이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 글이 적혀 있고 제본이 되어 있는 그 무엇들을 보고 책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개념작용을 일으키는 경우와 같다 하겠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산냐를 문자 그대로 合知라 이해하면 되겠다.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notion)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nam- ing) 작용을 기본적으로 산냐라 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초기경들에서 산냐는 별달리 정의된 말이 없다. 단지 푸르다고 아는(saṃjānāti) 것, 누르다고 아는 것, 붉다고 아는 것, 희다고 아는 것을 산냐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perception(인식)으로 옮기고 있다. 심리 용어에 착안하여 요즘 몇몇 서양학자들은 appercep- tion(통각)으로 옮기기도 한다. 사전에서는 '경험이나 인식을 자기의 의식 속으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이라고 통각을 설명한다.
발제자가 조사한 바로는 초기경장에서만 이 산냐라는 단어는 6800번 이상이 나타난다. 그 정도로 많이 쓰이는 술어이다. 물론 이 중에서 3500번 정도는 모두 오온의 세 번째로서의 산냐로 나타나지만 나머지 경우,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산냐는 주로 수행 중의 경계와 관련되어서 나타난다 할 수 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초기 경에 나타나는 산냐에 대해서는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본 경에서도 산냐를 단순히 인식의 차원 정도에서 이해하면 본 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심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마라즙이 산냐의 일반적인 한문 역어인 想으로 옮기지 않고(현장은 모두 想으로 옮기고 있다) 相으로 옮긴 것은 아주 고심한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본다. 본 경에서 그냥 想 정도로만의 의미로 산냐를 보기에는 더 심오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구마라즙이 산냐를 想이 아닌 相으로 옮긴 점은 정말 그 안목이 수승하다 하겠다.2) 그러나 구마라즙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산냐도 相으로 옮기고 니밋따(nimitta, 4장 4번 주해 참조)도 相으로 옮기고 있고 락샤나(lakṣaṇa, 5장 1번 주해 참조)도 相으로 옮겨서 원어 없이 한문본만 가지고 보면 아주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문권 특히 우리 나라에서 금강경의 제일의 사구게로 꼽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에 나타나는 상은 32가지 대인상 즉 락샤나의 번역어이지 본 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범어 원문에서는 사구게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결제 3일에 논의하도록 하겠다.
단순히 인식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을 궁글리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에 어떤 모양[相]을 굳게 그리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상태를 산냐로 파악한 것이다. 그 마음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름 아닌 이념, 이상, 관념, 고정관념, 경계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사실 초기경들에서도 이런 의미로 산냐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다 그렇다.
예를 들면 무색계 사선으로 후대에 인식되고 있는 사처(四處, āyatana)는 모두 이 산냐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즉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는 다른 말로 공무변처 산냐로 나타난다. 허공이 무한하다는 산냐를 수행 중에 만나서 그 경계에 주저 앉아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이 공무변처 산냐는 다음의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yatana)로써 극복하고 식무변처에 주저앉아 생기는 식무변처 산냐는 다시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로 극복하고 무소유처에 안주해서 생기는 무소유처 산냐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 saññā-na-asaññ-āyatana)로서 극복하고 이 산냐도 산냐 아닌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의 경계는 상수멸(想受滅,saññā- vedayita-nirodha), 즉 산냐와 느낌이 완전히 해소된 경지로써 극복하는 것을 초기경에서는 많이 설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산냐 놀음의 최상은 산냐인 것도 아니고 산냐 아닌 것도 아닌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요, 여기서는 산냐 놀음이 극대화되고 있다.(아래 15번 주해 참조할 것)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러한 산냐 놀음을 완전히 벗어난 경지로서 산냐웨다이따니로다(saññā-vedayita- nirodha) 소위 말하는 상수멸(想受滅)을 설하셔서 이런 외도선에 빠져 있는 수행자들을 제도하신 것이다. 그 외 수꾸마삿짜산냐(sukuma-sacca-saññā), 즉 진리에 대한 미세한 산냐 등 수행에서 나타나는 경지를 묘사한 경우가 허다하다.(부록의 ‘초기경에 나타나는 산냐’를 참조할 것) 문제는 이런 산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고 세존 이전의 모든 수행자들이 이 산냐놀음에 빠져서 그 경지가 최상이라 우기고 즐기고 안주하였지만 세존께서는 결연히 그것이 단지 산냐일 뿐임을 철저히 아시고 홀로 길을 찾아나서서 드디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법을 선포하신 것이다. 불교가 불교인 것은 바로 이 산냐에 속지 않고 산냐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산냐는 초기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오온의 세 번째인 想蘊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개념, 관념, 명칭 등의 뜻으로 쓰인다. 오온의 세 번째로 쓰일 때는 통각의 개념이다. 개념이나 명칭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아비담마에서는 빤냣띠(paññatti)라는 술어로 사용하는데 궁극적인 단위(dhamma)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개념적인 존재나 추상적인 개념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 남자, 컴퓨터, 모든 추상적인 개념 등등은 모두 빤냣띠의 영역에 속한다. 나아가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도 모두 산냐의 영역에 속하므로 구경의 경지는 아니라고 초기경에서 부처님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은 모두 빤냣띠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