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동반자가 좋아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히11장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으로 무엇을 했는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했다면 우리도 우리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동행이라는 단어를 구글에 쳐보았더니 단어의 뜻은 나오지 않고 최성수라는 가수의 동행, 김동율이란 가수의 동행 이 두 노래가 뜨더군요. 그리고 KBS의 프로그램 가운데 동행이라는 좋은 프로그램이 뜨더군요.
그 단어의 의미가 좋으니까 방송도 하고 노래도 만들고 프로젝트도 진행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동행(同行)이란 둘이 같이 걷는 것입니다. 동행은 히브리어로 ‘할라크’ 영어로는 walk with 인데 동행은 ‘함께 걷는다’란 본래의 뜻 이외에 ‘삶의 방식을 따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두가지 의미에 집중해서 동행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동행은 둘이 팔짱을 끼고 계속 대화하며 더욱 가까워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친구가 그렇죠? 형제가 그렇죠? 부부가 그렇죠? 목사와 교인들이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을 하나님과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으로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이 간단하게 나옵니다(창 5:21-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들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팔짱을 끼고 가깝게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나와 동행하며 살고 있는가?”나와 팔짱을 낄 정도로 친밀하게 관계를 갖고 있는가? 살아오면서 남자들은 팔짱을 잘 안끼지만 여자들은 팔장을 잘 낍니다. 어떤 관계에서 팔짱을 끼게 될까요? 친밀함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팔장을 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친밀함은 어떻게 생길까요? 자주 만나고 자주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주 만난다고 팔짱을 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얼굴 보는 직원들 사이에서 팔짱 끼는 장면이 있나요? 부장님하고? 사장님하고?
가정으로 돌아와서 딸들이라면 엄마 아빠와 어디 갈 때 팔장을 끼더라구요. 그런데 아들들은 여간해서는 불편해하죠? 잘 안합니다. 그렇다고 다 불효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들의 감정선과 딸들의 감정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팔짱을 낀다는 것은 그 사람이 좋기 때문입니다. 싫은데, 무서운데 팔짱을 끼겠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우리 아버지하고 팔짱을 낀다.”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네버 그런 장면은 볼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아주 싫다는 말은 공개적으로 하는구나! 이렇게는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을 좋아하셔야 합니다.
레지나 브렛의 책 <행복한 사람은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을 사랑한다.>에 보면 그녀는 동행을 위한 한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저는 남자를 만날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뭔지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끌리면, 저는 즉시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시작과 함께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만일 없다면,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쓸모없는 남자와는 거리를 둬야 합니다. 예컨대, 동성애자와 유부남과 약혼한 남자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비밀 같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제 친구의 남편은 여러 해 동안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 둘은 관계 회복을 위한 부부상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남자는 상담치료에 참석하는 척만 했습니다. 꼬리가 잡히기 전까지, 사귀던 여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좋은 관계란, 서로의 참모습을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제가 사귀었던 어떤 남자는 ‘내가 종교적인 점만 제외하면 모든 면이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은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은 덜 믿으라.’는 것일까요? 제가 중시하는 가치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데이트 상대는, 더 나아가 결혼 상대가 될 사람은 ‘나의 모습 그대로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레지나 브렛 여사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미국 오하이오의 대표 신문사인 <플레인 딜러The Plain Dealer>의 인기 칼럼리스트였습니다. 이 분의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이대로를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각, 의견, 삶의 방식, 행동들, 취미와 심지어 우리의 게으름과 낭비마저도...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서로에 대한 존중보다 비난과 평가절하가 더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비난하며 깍아내린다면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에게 하인으로 살면서 탕진한 재산을 갚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탕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탕자는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책임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 재산을 탕진하고, 가문을 망신시키고, 거지 꼴로 돌아왔어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눅15: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새 옷을 입히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게 하고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탕자를 미안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공한 아들에게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그의 모습 그대로를 품어주신 아버지의 사랑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의 감추어진 모습이 드러나도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존중하고 사랑할까요?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감추고 싶은 어둠이 있습니다.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사랑도 존중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자신을 감춥니다.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너는 왜 나를 부인했느냐?“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셨고, 그는 변화되어 주님의 동역자가 되었고, 마침내 그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으로 품어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교회의 지체들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뜻이 하나가 되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모스3:3은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두 사람의 뜻이 같아야 한다 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뜻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살아도 뜻이 일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무엇이든지 내 마음과 내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뜻을 합하여 동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한 부자가 랍비를 찾아와 삶의 기쁨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랍비는 말없이 그를 창문으로 대려가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지나가는 사람들, 노는 아이들이 보입니다.”부자가 말하자 이번에는 거울로 데려가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제가 보입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유리에 은이 칠해져 있을 때는 밖을 볼 수 없습니다. 독선과 이기주의라는 은을 벗겨 내야 이웃을 볼 수 있고 그래야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거울을 보고 사느냐? 창문을 보고 사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할라크의 두 번째 뜻은“삶의 방식을 따른다.”입니다. 부부가 행복하려면 둘의 삶의 방식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렵습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가치관)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중국 산동성을 방문해서 교류를 할 때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직접 매미 애벌레를 접시에 놓아주었을 때 눈을 질끈 감고 그 이상한 식감과 향을 맡으면서 얼굴로는 웃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입에 넣었다가 뱉으면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우리 방문단은 어떻게든지 중국교회와의 교류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입안으로 웃으면서 넘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을 찾아 보여드리려다가 오늘 점심 드실 때 어려울까 봐 포기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방을 써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엄마가 왜 잔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옷 벗어놓고 정리하는지 여부, 이불, 일찍 자고 늦게 자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화장실 쓰는 방식등등 다르거든요, 어떤 것은 정말 불편합니다. 그때도 상대방의 생활 방식을 존중해주는 마음, 동행의 열쇠입니다.
동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기 생각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방식이 만들어집니다.
부모가 서로 다른 방식의 삶을 고집하면 자녀들이 혼동을 느낍니다. 두분의 선생님이 같은 것에 대해서 다르게 가르치거든요.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최선의 가치관을 세워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본이 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 최고의 가치관은 성경속에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에 성경에 뿌리를 내려야 자녀들도 신앙안에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뜻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합니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일군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의 가치는 순종에 달려있습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양은 방목이 쉽고 털과 젖, 고기까지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귀중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양을 사고 팔 때 나이와 크기, 건강상태 뿐 아니라 특이하게 양의 성질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파른 비탈에 양을 두고 경사를 올라가면서 풀을 뜯는지, 아니면 내려가면서 뜯는지를 살핍니다. 비탈을 올라가면서 풀을 뜯는 양이 내려가면서 풀을 뜯는 양보다 더 비싸게 팔립니다. 내려가는데 익숙한 양들은 목자의 명령에도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양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후에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고집이 쎄서 겪지 않아도 될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흔적과 고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인생의 길도 돌아가는 시간적인 손해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예신 가족 여러분! 그리고 청소년 여러분, 내 삶을 증거로 삼아 간증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세워주신 권위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시온의 대로를 걷고, 인생의 지름길을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에녹은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에녹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에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미리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에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늘 한 걸음더 가까이 가서 거리를 좁히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 예배와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동행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에녹과 같은 영광과 믿음의 증거가 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