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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6;12-18. 받은 은혜와 달란트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2025. 3. 9.
여러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할 하나님의 사람이 주신 은혜와 구원을 외면하고 지내온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인 중에도 괴수로 고백을 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에 능통한 사도 바울은 그의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주님께서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삼았고 사도로 세웠습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죄인이었고 괴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예배 속에 부름을 받았고 은혜를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왜요? 주님께서 부탁하실 영역에서 영혼들을 위한 그릇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합당한 그릇에 담겨질 사명은 무엇인가요? 받은 은혜와 달란트로 보답해야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보답하겠다는 생각과 마음은 어디서 나오나요? 은혜 받은 것을 인정할 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무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해 주셨고 거기에 맡는 달란트를 주셨는데 무엇으로 보답이 되겠습니까? 8절.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사망에서, 보아야 복이 되는 눈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물에서, 전진해야 할 시온의 대로에서 넘어지는 나의 발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나온 그 무엇이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입은 사람이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까요? 고후 9;15에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받은 그 큰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의 말과 중심의 태도가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왜 시편기자가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우리는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고전1;26-29절. 지혜 없고 무능하고, 문벌 없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아무 것도 없는 우리들이 택함을 입었습니다. 고전15;8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부르셨습니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선택을 통해서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시온의 대로와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까요? 다윗의 표현대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에 대한 의미입니다.
1-1. 고민과 생각입니다. 다윗은 평생을 살면서 여호와 앞에서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았고, 크고 귀중해서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는가? 받을 자격도 없는데 이 자리와 이 은총을 받았으니 어떻게 할까? 평생을 갚아도 갚을 길 없다는 진실한 고백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참된 인격자는 얼마나 지식을 많이 갖추었느냐? 얼마나 젊잖게 말을 하고 얼마나 고상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된 인격자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고 받은 것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 생각과 그 고민과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슨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십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고 얼마나 인식하십니까? 아무리 갚으려 해도 갚을 길 없다고 날마다 생각하고, 날마다 고민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날마다 메이고 꼬이고 풀리지 않는 일로 인하여 원망하며 불평을 하십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싫어하는 부류 중에 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배은망덕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잊어버리면 확정 되어진 시온의 대로를 열지 못합니다. 약속과 축복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버림받고 미움을 당했습니다. 기적의 현장을 목도하고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실제의 현장에 대하여 감격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가롯 유다만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겪어야 할 전쟁에서 아말렉과 싸워 극적으로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깃발을 안겨 주었습니다.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옷이 헤어 지지 않았습니다. 40년을 하루 같이 먹이시고 책임지시고 구원하셨는데 이 백성들은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 스스로 광야에서 1세대가 끝났습니다. 약속의 복을 받지 못하고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왜 불평과 불만을 했을까요? 왜 원망을 했을까요? 은혜를 입은 사람이 고민과 생각과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었습니다.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할꼬? 그 무엇으로도 갚을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역대 하 32;24,25절은 히스기아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입니다. 히스기아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통보 받고 난 이후의 일련의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때에 히스기아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히스기아가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아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여러분, 은혜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보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삶을 더욱 부요하게 하고 교만을 제거합니다.
1-2. 갚을 길이 없는 은혜는 알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보답할까? 끈질긴 생각과 끊임없는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고민의 계속성입니다. 간절한 소원이고, 간절한 영적인 마음이고 실제와 행동입니다. 13절에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고민하던 다윗은 하나님께 드릴 방법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방법을 찾았습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곳저곳 다니시다 나병환자 열 명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오직 한 명만,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나머지 아홉은 다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 말세에 고통을 하는 때가 이르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배반하고 패역하여 감사치 아니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 요사이는 보답할 마음과 보답할 생각과 감격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받음 은혜를 끈질기게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끊임없는 묵상이 답을 얻었습니다.
2.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고, 은혜를 입은 자로서 보답하려는 실제와 행동의 내용이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2-1.평생 기도하는 것이 보답입니다. 다윗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평생 부르고, 구원의 잔을 들고 평생 기도를 합니다. 12-13절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할렐루야! 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2절. 평생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왜요? 8절에 이유를 말하는데,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영혼이 살아야 육신이 강건한데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 눈물 골짜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볼 수 있는 복된 눈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꾸시고, 삶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삶의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이런저런 애환과 문제로 인하여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는데, 그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문제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시고,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높은 것이면 낮추어 주시고 구덩이면 평탄케 해 주셨습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선한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며 진행하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원의 잔을 들고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잔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고난과 고통 받을 때의 구원을 기억했습니다. 무엇인가 이루려고 할 그 때에 힘써주고 격려를 하시고 이 끌어준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의 잔을 내려놓으면 아니 됩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롬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이지만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고후5;14-15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잔을 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잔은 상황이 다 다르잖아요. 환경이 다르잖아요? 하지만 구원은 예수님과 연합되는 삶입니다. 경건함과 의로움과 온전한 아카페의 사랑으로, 살롬을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잔을 들고 받은 은혜에 대하여 보답하는 삶입니다.
2-2. 평생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많이 부릅니까? 예배드릴 때입니다. 그래서 성전과 예배가 중요합니다. 구원의 잔은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서 나타나나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배가운데 구원의 잔이 경험됩니다. 주님이 친히 마신 그 구원의 쓴잔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와 고난의 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 주님이 구원의 잔입니다. 딤전1;12.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누구입니까? 과거 완료로 표현해서 이었으나~~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입니다. 고전15;10, 갈1;1.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것이라.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이나 부름을 받았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무엇으로 드려야 은혜에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날마다 고민하고 생각하여 얻은 방법과 얻은 결론이 이것입니다.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무엇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서 바울은 주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40년을 받쳤습니다. 주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살았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바라보며 날 오라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는 보답의 방법과 결론인데 더하여 평생을 구원의 잔을 들고 기도하는 삶이 보답입니다. 왜 평생을 기도로 보답해야 하나요? 벧전5;7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라. 잠16;3 너의 행사를 주께 맡겨라. 시55;22 너의 짐을 여호와께 맡겨라. 시37;5 인생의 길도 맡기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 염려를 맡기고 행사를 맡기고 짐을 맡기고 인생의 길을 맡기는 이 4가지를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와 행사, 짐과 인생의 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래서 2025년에 부를 때마다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은혜를 받게 되면 서원으로 이어지는데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은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시면 어떻습니까? 서원을 하게 되지요. 다짐보다 좀 더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지요. 그런데 서원은 해로울 지라도 갚아야 합니다. 14절,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다윗의 보답하는 방법은 백성 앞에서 자기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감정이나 신앙이 아닌 그 어떤 상태에서 서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신앙 안에서 서원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환난 날에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던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생각하면서 남김없이 모든 백성들 앞에서 갚겠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빚이고, 빚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전5;4에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을 갚지 않은 것과 더딘 것은 우매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시15;4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다윗은 어려울 때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서원을 했습니다. 도망을 가는 현장과 도움을 받는 요나단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제 하나님께 그 서원을 백성들 앞에서 갚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합니다. 18절에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대강 대강이 아니고, 겉치레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직하게 감독을 받으면서 이 서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잘 됐으니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졌으니까 서원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니까 서원을 안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을 갚는 것이 보답하는 것입니다. 내 병만 고쳐 주시면, 사업만 잘 되게 하시면, 주의 종으로 써 주시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면, 자녀를 고치고 세워 주시면, 가는 길에 형통의 은혜를 주시면~~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서원은 빚이면서 보답입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은 서원을 한 사람이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의무이지만 구원받은 백성의 증거이고 형통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 받을 때의 서원을 갚으시고 보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감사제로 감사하는 것이 보답입니다. 16-17절.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결박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의 제사,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은혜에 보답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마음을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거룩하고, 가치가 있고 더 큰 은혜와 더 큰 복을 받게 되지만 보답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2가지 형이 있는데 소유 형과 존재 형이 있습니다. 소유 형은 감사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고 받은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보답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 형은 내가 누구인가? 나의 나됨은 어디서 온 것인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반문하는 사람입니다. 존재 형은 은혜를 알고, 보답을 알고, 예배를 드립니다. 다윗은 존재 형이었습니다. 늘 24시간, 365일, 일생동안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사로 보답을 합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외치는 감사가 손과 발로 나타나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결국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고 성전 지을 것을 고민했습니다. 다윗은 결국 감사의 제사로 보답하기 위해서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춤추어 찬양하며,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습니다. 왜요?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제사로 보답하려는 다윗을 하나님은 더 크게, 더 위대하게 더 축복을 하셨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역사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것도 감사의 보답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좋을 때만이 아니고, 잘 될 때만이 아니고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과 문제 앞에서도, 피눈물을 흘릴 때에도 감사를 하는 것이 범사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목제인 감사의 예배가 또 다른 감사를 가지고 옵니다. 감사가 감사로 연결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느 때나 예배로 영광과 감사로 보답하시는 그래서 더 놀라운 축복과 위대한 삶이 계속해서 이어져서 이 땅의 예수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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