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뭐든 필연을 좋아한다. 아니 열광한다.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도 우연이고 빈곤한 가정에 태어나는 것도 우연이다.
좋은 지능과 부모의 재력과 노력이 만나면 아이는 명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지능이 안좋고 부모가 가난하고 노력도 못하면 명문학교에 못간다. 그뿐이다.
그 아이는 우연히 그렇게 태어난 것이지 아이의 어떤 공덕이 작용하여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자수성가한 재벌은 운과 노력할 수 있는 조건을 우연히 획득한 것 뿐이다.
그런 기회와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자랑하거나 혹은 주눅들 필요가 없다.
누구나 그런 조건이 갖춰지면 성공하는 것 뿐이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열차게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우연이지 개인의 순수한 의지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남보다 노력을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남보다 노력을 많이 했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다.
이 세상을 어떤 필연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해석해선 안된다.
그것은 우연히 기득권자된 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주입한 이념이다.
인간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지 필연적 인과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은 자화자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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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무명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는다. 윤회의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 <붇다>
만약 세상이 필연적 인과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면 무명이나 윤회의 시작점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붇다는 그렇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필연적 인과원리는 도그마는 될 수 있어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도의 캬스트제도는 사기요 범죄요 조작이다.
이러한 우연의 원리가 보이면 세상을 내맘대로 재단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게 그저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태어난 세상에 살면서 삶의 목적을 고민할 필요도 없어진다.
진지함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비록 우연히 생긴 조건이지만 결과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현상을 필연적 원인에 의해 해석하려는 시도는 배척돼야 한다.
다만 살인자가 살인의 의도를 가지면 살인으로 연결될 수 있다. 살인의 의도를 가지는 것은 필연적 원인
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갖게된 의도가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필연적으로 살인의 고의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운명론이다. 결과를 놓고 소급적으로 추론하여 원인을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필연적 살인의 고의라면 처벌할 수 없다. 오히려 우연적 살인의 고의이기 때문에
처벌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우연히 생긴 살인의 고의를 포기하지 않은 데 대한 처벌인 것이다.
보기와 달리 이 세상은 우연이 지배한다.
원인은 우연히 발생한다. 필연적인 원인이란 없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것은 우연적 자연현상이다.
자연이 반드시 그렇게 작동해야 된다는 어떤 근거는 없다. 자연은 우연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태생적 차별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부귀한 가정에 태어난 것은 본인의 공덕인가 우연인가?
빈천한 가정에 태어난 것은 본인의 과오인가 우연인가?
어느 경우든 간에 태어난 자의 업인가 우연인가?
태어난 자의 전생업으로 태생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죽은 자와 태어난 자 사이에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건 문제다. 사자와 생자간의 동일성을 부여하려면 인격적 동일성이 담보돼야 한다. 그것을 담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생자가 사자를 전생의 자아로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자아를 결합시키는 도구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두 자아가 공히 소유하는 자산이라는 말이 된다.
과연 전기억이 후기억에 이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억은 크게 색성향미촉 그리고 법으로 구성된다. 생자가 생전에 접해본 적 없는 전생의 색성향미촉법을 기억할 수 있을까?
생자에게 전생의 기억이 이식될 수 있을까? 접촉없이 어떻게 전생의 기억이 이식될 수 있을까?
현생의 식은 전생의 경계를 접촉하지 않는다. 전생의 경계는 전생의 식만이 접촉한다.
만약 현생의 식이 전생의 경계를 접촉한다면 두 식은 동일한 식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귀한 가정에 태어난 식은 전생의 식과 동일한 식이다. 그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본인의 공덕이다.
빈천한 가정에 태어난 식은 전생의 식과 동일한 식이다. 그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본인의 과오다.
이럴진대 어째서 붇다께서는 식이 무상하고 자아가 아니라고 설한 것일까?
이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항상한 것이고 자아가 아닌가? 오직 다만 무수히 변하는 경계만을 달리할 뿐.
외롭고 모순된 담마를 대하는 마음은 오직 피곤하고 답답할 뿐이다.
만약 다음의 가정이 가능하다면 약간의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_ _ _ _ 점선은 "식"이다
"식의 집합"이 "의"다
______ 실선은 "심"이다
전생과 금생과 내생은 관통하는 것은 "심"이다
실선 위에 중첩된 것이 "식"과 "의"에 해당하는 점선과 점선의 집합이다
무상한 것은 점선이다. 실선은 항상하다.
심해탈은 실선 가운데 일어난다.
변재가 미천하여 표현에 제한적이다. 다만 위에 계신 분이라면 이해하시리라...
心을 無明에 덮고 있으면 ...
이것을 조건으로 意가 연기되고....
마노가 접수한 니밋따에 식이 거주함으로써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생긴 심의식이라는 삼총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몸(=까야, 오온)을 연기시킵니다.
그러나
心이 明에 휩싸이면 ...
즉 무명의 멸로 意가 멸하고 ...
意의 멸로 새로운 오온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온에 대한 욕탐이 멸합니다)
바로 오취온苦가 소멸합니다.
-----------구원겁--------심---------현재-----------심-----------영겁------------
위의 도식과 같이 심은 "항상"하다고 가정하고, 오욕에 결박된 심이 경계와 접촉하면 그때 "식"이 일어난다고 보자.
일어난 식은 소멸하지만 어떤 일련의 식은 기억에 저장돼 "의"라는 감관을 형성한다.
이는 구사론에 일찍이 밝힌 바대로이니 의근은 6식이 "낙사"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는 경계에 결박된 심을 해방시키는 것이니 혹은 "심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진아이고 맑은 것이다. 그러므로 심이 이 몸안에 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지금으로선 모른다고 해야 한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그때 논해도 늦지 않다.
구사론의 언어가 부담스러운 것은 6식이 낙사했다는 어휘선택이 아닌가 한다. 식이 무에라고 낙사하고 말고 하겠는가?
궂이 말하라면 경계들이 낙사한 것이겠지...
주로 기억을 떠올릴 때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경계들이지 식이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과거의 식이 다시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좀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