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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정확한 개념 연구 필연이라는 것은 조작한 것이다
hwanheebonghang 추천 0 조회 74 20.06.03 11:43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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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0.06.04 12:16

    첫댓글 태생적 차별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부귀한 가정에 태어난 것은 본인의 공덕인가 우연인가?
    빈천한 가정에 태어난 것은 본인의 과오인가 우연인가?
    어느 경우든 간에 태어난 자의 업인가 우연인가?
    태어난 자의 전생업으로 태생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죽은 자와 태어난 자 사이에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건 문제다. 사자와 생자간의 동일성을 부여하려면 인격적 동일성이 담보돼야 한다. 그것을 담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생자가 사자를 전생의 자아로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자아를 결합시키는 도구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두 자아가 공히 소유하는 자산이라는 말이 된다.
    과연 전기억이 후기억에 이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억은 크게 색성향미촉 그리고 법으로 구성된다. 생자가 생전에 접해본 적 없는 전생의 색성향미촉법을 기억할 수 있을까?
    생자에게 전생의 기억이 이식될 수 있을까? 접촉없이 어떻게 전생의 기억이 이식될 수 있을까?
    현생의 식은 전생의 경계를 접촉하지 않는다. 전생의 경계는 전생의 식만이 접촉한다.
    만약 현생의 식이 전생의 경계를 접촉한다면 두 식은 동일한 식일 수 밖에 없다.

  • 작성자 20.06.04 12:23

    그렇다면 부귀한 가정에 태어난 식은 전생의 식과 동일한 식이다. 그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본인의 공덕이다.
    빈천한 가정에 태어난 식은 전생의 식과 동일한 식이다. 그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본인의 과오다.
    이럴진대 어째서 붇다께서는 식이 무상하고 자아가 아니라고 설한 것일까?
    이 두식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항상한 것이고 자아가 아닌가? 오직 다만 무수히 변하는 경계만을 달리할 뿐.
    외롭고 모순된 담마를 대하는 마음은 오직 피곤하고 답답할 뿐이다.

  • 작성자 20.06.04 22:26

    만약 다음의 가정이 가능하다면 약간의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_ _ _ _ 점선은 "식"이다
    "식의 집합"이 "의"다
    ______ 실선은 "심"이다

    전생과 금생과 내생은 관통하는 것은 "심"이다
    실선 위에 중첩된 것이 "식"과 "의"에 해당하는 점선과 점선의 집합이다
    무상한 것은 점선이다. 실선은 항상하다.
    심해탈은 실선 가운데 일어난다.

    변재가 미천하여 표현에 제한적이다. 다만 위에 계신 분이라면 이해하시리라...

  • 20.06.05 08:49

    心을 無明에 덮고 있으면 ...
    이것을 조건으로 意가 연기되고....
    마노가 접수한 니밋따에 식이 거주함으로써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생긴 심의식이라는 삼총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몸(=까야, 오온)을 연기시킵니다.

    그러나
    心이 明에 휩싸이면 ...
    즉 무명의 멸로 意가 멸하고 ...
    意의 멸로 새로운 오온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온에 대한 욕탐이 멸합니다)
    바로 오취온苦가 소멸합니다.

  • 작성자 20.06.05 09:43

    -----------구원겁--------심---------현재-----------심-----------영겁------------

    위의 도식과 같이 심은 "항상"하다고 가정하고, 오욕에 결박된 심이 경계와 접촉하면 그때 "식"이 일어난다고 보자.
    일어난 식은 소멸하지만 어떤 일련의 식은 기억에 저장돼 "의"라는 감관을 형성한다.
    이는 구사론에 일찍이 밝힌 바대로이니 의근은 6식이 "낙사"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는 경계에 결박된 심을 해방시키는 것이니 혹은 "심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진아이고 맑은 것이다. 그러므로 심이 이 몸안에 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지금으로선 모른다고 해야 한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그때 논해도 늦지 않다.

  • 작성자 20.06.05 10:07

    구사론의 언어가 부담스러운 것은 6식이 낙사했다는 어휘선택이 아닌가 한다. 식이 무에라고 낙사하고 말고 하겠는가?
    궂이 말하라면 경계들이 낙사한 것이겠지...
    주로 기억을 떠올릴 때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경계들이지 식이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과거의 식이 다시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좀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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