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11.19)
프랑스 화가. 센강 하류 노르망디의 레장드리 출생.
처음에 고향에서 Q.바랭에게 배우다가 1612년 파리로 나가 F.엘 및 G.랄르망에게 사사하였다고 한다.
1621년 뤽상부르궁(宮)의 장식에 필립 드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푸생이 18세때 고향 노르망디 마을에서 부모의 눈을 피해 파리로 진출했는데,
이 때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욱 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1624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 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도메니키노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단정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이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등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프랑스의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화가는 니콜라 푸생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서 생활하지 않고 거의 모든 생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보냈다.
'회화는 정신적인것이다'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으며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 푸생에 의하여
이에 합당한 주제의 선택, 인물의 포즈와 구도, 그것들의 질서정연한 구축이 이루어진다.
이 고전주의의 세계가 그 정신성을 상실했을 때 , 그것은 한낱 형식뿐인 아카데미즘을 낳을 뿐이다.
푸생은 카랏치를 통해 전해진 이유로 그는 카랏치를 바로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사비니 여인들을 보게 되면 그는 문학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감상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도나 형태만이 강조되고,
색채는 아예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영웅적인 인물들은 일반화되었으며, 동작은 조각처럼 굳어져 있다.
이들의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에서 빌려온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푸생은 형태와 색채, 사고와 감정, 진실과 아름다움, 이상과 현실이 모두 조화되고 균형잡혀 있는 예술세계이다.
그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성에 의해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회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상응하는 작품이 [포키온의 매장 풍경]이다.
명쾌한 구성과 수학적 비례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엄숙한 절제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겠다.
프랑스의 아카데미즘을 확립한 고전주의의 대가이다.
당시 레장들리에는 프랑스 제 1 급 무희(舞姬)들이 살았는데 이런 청소년 시절의 환경이
장래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 상쾌한 삼림(森林)·우아한 무희를 그리는 화풍을 낳게 하였다.
이 때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古典)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S.U.라파엘로의 작품에 매혹되어 이탈리아를 동경하였으며,
1624년 로마에서 V.티치아노·라파엘로의 작품에 몰두,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대로마의 회화·조각과 유적에 끌려 관련서적을 탐독하는 등 고전적 교양을 쌓았다.
그의 작품은 신화·종교·역사·비유(比喩) 등 광범위한 분야를 소재로 다루었다.
그것들은 영웅적 또는 이상주의적 풍경화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야외의 광경을 고대적·신화적 제재(題材)로 바라보며,
색채나 명암(明暗)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려고 하였다.
또한 종래 뒤떨어졌던 프랑스 회화를 선진국 여러 나라의 수준에까지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단정(明快端正)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이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등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古代風景)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1628년 성베드로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1639년 마침내 고국 프랑스의 루이13세로부터 수석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고국의 미술가들의 질시(嫉視)와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1642년 다시 로마로 돌아가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푸생은 앞에서 말한대로 1640년 15년만에 그의 조국 프랑스로 돌아와 잠시 궁정화가로 머물지만,
로마에 있는 처를 데려오겠다는 구실로 로마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영구히 돌아오지 않으며,
그의 예술발상을 자유롭게 유발시켜 주는 환경조건이 갖추어진 로마에서 일생을 마친다.
「궁정화가」로서 파리에 머물었던 건 1년9개월이었으며,
이 짧은 동안 그가 접촉한 건 왕이나 귀족보다도 자유사상가(libertin)의 모임이라던가 비관료적인 모임에 참석했고
로마에서도 그러했듯이, 조용한 가운데 철학적 명상에 잠기는게 주요일과였다고 한다.
계급적인 권력이라던가 외교적인 허례로서의 화려함은 그가 생태적으로 기피했던 인간태세 (人間態勢)였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의 왕정이 제의한 조건을 금전적으로 알아보면 여비가 1천「에큐」이며 년봉도 1천「에큐」이며
숙소로는 파리중심부의 튤르리전원에 있는 삼층건물의 호화주택이었다
(「에큐」 (ecu)는 당시의 은화(銀貨)이며, 현재의 시가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매우 높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
어떻든 이러한 부귀영화를 간단하게 뿌리치고 푸생은 로마로 되돌아갔던 것이었다.
신화(神話)와 고대사(古代史),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독특한 이상적인 풍경 속에 그렸는데,
그 장대하고 세련되고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그 후 프랑스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푸생을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문명의 보수(Poussin was the reward ofcivilisation)이다 라고 말한 이도 있다.
푸생은 고대조각의 포즈와 라파엘의 회화적 독창을 연구했고 동화 흡수시킨 해박한 예술가였을 뿐더러
고대문학의 소양에 뒷받침 되었으며 스토아파철학에 의해서 다져진 정신을 화가라는 쟝르에 도입시켰던 것이었다.
니콜라·푸생은 예술론을 썼는데 그 단편이 전해지고 있다.
즉 「회화라는 것은 자연계에 있어서 무형 (無形)의 하나이기 때문에,
화가의 모방적 실천은 합리적 교리 (合理的 敎理=rational doctrine)로 규제되었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
회화의 주제는 인간의 행위이며, 여기에 종속되는 것으로서의 동물들 또는 자연물의 행위가 첨가된다」고 말한다.
행위란 푸생에 있어서 표현과 이미지의 재현이 합치하는 것으로서의 의태 (凝態=mimique)를 말한다.
화가가 훌륭한 양식 (maniere magnifique)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가령 영웅적 행위 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하며, 세부적인 것을 버리고 모든 비속한 것을 제외시키며,
정곡을 찌를 개념, 자연스러운 구도, 그리고 순수하게 개인적(個入的)인 양식(style), 기법(manner),
기호(taste)로 재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푸생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던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데 ,
그러한 인상은 친구나 후원자에게 그의 견해를 밝힌 수 많은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회화의 최상의 목표란, 고결하고도 진지한 인간의 행위를 제현하는데 있다.
미술가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즉 미술가는 감각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호소해야하기 때문에 색깔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억제하고
형태와 구성에 역점을 두어야한다'고 말했다.
푸생은 벅찬 기대와 감격을 몸에 지닌채 1624년 봄에 로마에 도착한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미술계는 그가 꿈꾸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17세기의 이탈리아 미술은 고전적 세 계와는 달리 바로크적인 색채로 물들여져 있었다.
전 유럽이 바로크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망한 채 푸생은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데생은 라파엘로, 색채는 티치아노'. 그리하여 가급적이면 바로크적인 잔재를 배제하면서
다른 불란서 화가들이 잘하지 않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신화적 요소'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간다.
주제 속에 담겨진 극적인 요소들을 그는 표면적인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시키면서
균형과 질서를 꾸준히 다듬어 나간다.
푸생은 당시의 로마의 인문학자들이 보기에도 놀라움을 살만큼 고도의 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동서고금의 문학에 정통했다.
대부분의 주제를 성서에서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 또는 동시대의 서사시 등에서 발췌해
자신의 의도에 걸맞게 하나의 독립된 정경으로 묶는 뛰어난 구상력은 그의 삶에서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벨로리라는 문학가는 푸생과 무척 친하게 지낸 연하의 사람인데 [푸생의 생활태도와 사람됨]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예술가들, 특히 미술가 가운에서 볼 수 있는 불규칙한 생활,
기분내키는 대로의 처신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고 기분에 따라 제작한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운동을 겸한 산책을 했는데
산책 코스는 때때로 번화가를 거니는 경우를 빼고는 대개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핀치오 언덕이었다.
이 언덕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 이야기며 그림에 관한 이야기 등을 즐겁게 나눈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작업실로 들어가 점심 때까지 작품을 제작한다.
점심 후에는 잠시 쉬었다가 몇 시간씩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푸생은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했으며 저녁이 되면 으례껏 언덕에 올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하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푸생의 삶에서 보았듯이 예술가의 작품은 그 예술가의 삶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야기도 잘 했지만 남의 말을 듣는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가끔 그는 예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는데 매우 명석했으며,
말할 때는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각없이 자유스럽게, 그리고 소신대로 이야기했으며,
책을 많이 읽고 경험해서 많은 것을 아는 그였지만 잘 모르거나 자신이 없는 이야기는 입 밖 에 내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는 작품을 구성할 때 주제별로 인물을 설정해, 양초를 깍아 모형을 세우고 빛을 비추어 치밀하게 연구한 다음
작업에 임해 '머리로 그림 을 그리는 화가'라고 일컬어졌다.
역사물과 소설류, 회화에 관한 것 이외에도 학술서적과 철학 서적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했으며
이와 같은 다독이 그에게 투철한 정신과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민첩한 기억력을 갖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푸생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에 담은 갖가지 주제와 그것이 의미하는
사상적, 정신적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철학하는 화가'로서의 그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회화는 정신적인 것이다.'라고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비록 풍경을 그렸다고 해도 그것이 풍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로서의 정신적 내용을 반영했던 것이다.
만일 정신성을 상실한 푸생이라면 큰 의미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잔느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색과 빛이 있는 야외에서 살아있는 푸생을 그린다.
' 세잔느는 푸생의 재현을 꿈꾸었다.
그것은 물론 푸생의 정신을 되찾고자 한 것이지 푸생을 그대로 복사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세잔느는 푸생처럼 인간과 자연을 장엄한 질서로써 통일시키고,
무뚝뚝한 평온함 속에 정열과 열기와 로맨티시즘과 자연에 대한 심오한 감정을 숨기고자 했던 것이다.
세잔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인상주의의 수법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의 대가인 푸생이 달성한 놀라운 균형과 완벽성,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아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세잔느가 추구한 명료함과 강렬하고 순도 높은 색채를 달성한 이들은 유일하게 중세시기에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다.
중세 미술가들은 사물의 실제 모습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관념의 세계를 묘사함으로서 명료함과 색채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잔느는 사물의 실제모습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다음의 구절에서 세잔느와 푸생은 분명한 사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푸생은 ' 확고한 진리는 이해될 수 있으며, 회화는 그 나름의 법칙과 방법을 갖고 있는 예술이다.
' 라고 한 것으로 분명한 고전주의 작가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세잔느는 ' 진리를 포착될 수 없으며 탐색은 끝이 없어 근본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겸손하게
인간 조건의 신비를 가늠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세잔느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평생의 작품활동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세잔느는 또한 '우리들의 타고난 본성에 의해서, 말하자면 감각에 의해서 다시금 고전적으로 되야 한다.' 라고 하여,
고전주의의 부활을 꿈꾸었다. 세잔느는 흔히 '현대미술의 아버지'로서 입체주의를 낳은 현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잔느는 오히려 고전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푸생을 재현하고자 한 복고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에는 두 가지 것이 필요하다. 즉 눈과 두뇌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도와야 한다. 이 둘의 상호적인 발전을 위해 화가는 노력하여야 한다.
눈은 자연에 대한 비전에 따르고 두뇌는 표현 수단의 기초가 되는 조직된 감각의 이론에 따라야 한다.
양자가 각기 발전한 후 상호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네는 눈에 불과하다. 그러나 굉장한 눈이다.
' 세잔느는 눈과 두뇌, 시각과 이성, 감각과 사유의 조화를 지향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회화 그 자체에 접근하여, 리듬화 된 필촉, 형식, 절도, 비례, 긴장, 균형, 리듬을 진정한 주제로 삼았다.
사학에서는 17 세기가 프랑스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고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는 예술과 학문 분야에 있어 이탈리아에 이어 횃불을 유럽 전역에 밝혔으며
이 찬란한 시기는 19 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위대한 시대로서 유럽의 초점이 되었던 프랑스의 17 세기는 일명 베르사유궁의 세기라고도 불리어지며
영화와 사치를 상징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루이 13 세의 집권으로 시작되는 프랑스의 17 세기는 루이 14 세 시대에 들어가서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주권의 확립과 이에 따른 안정을 갖게 된 17 세기엔 자연히 격식을 따지는 장식적인 경향과
관학풍의 미술이 하나의 화파로 형성되고 이 반면 독자적인 흐름의 미술 또한 등장했다.
우선 루이 13 세 때의 궁정화가인 시몽 부에의 고전주의를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바로크 양식 표현의 근거가 잡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장기간의 수련을 마치고 1627 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그때까지 매너리즘에 젖어 있던
프랑스 회화에 카라바지오 화파의 표현 양식과 로마의 장엄한 양식 전통을 도입,
종교 및 신화 소재의 거대한 표현 양식을 통해 새로운 회화 세계를 보여 주었다.
제자로서는 르 쇠르, 샤를 르브렁, 피에르미냐르가 있었고 이들은 17 세기 프랑스 화단의 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르브렁만 해도 1642 년부터 1645 년까지 로마에서 수련했던 바와 같이 이들은 각기 나름의 개성과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경향을 합쳐 국민적 양식을 만드는 길에 선두가 되기도 했다.
국민적 양식이란 그 시대의 질서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미술도 이에 따라 구상되는 것이다.
1648 년 조각 및 회화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이곳에서 정립하고 가르치는 규범과 정설에 따라 미술이 통제되었다.
한 구체적인 예로 건축의 상위권 아래에 있는 모든 장식이 통제된 정설에 의해 새겨졌으며
회화 미술도 이에 부합되도록 초점이 맞추어져 나갔다.
만능 재능의 소유자인 샤를 르브렁은 회화뿐만이 아니고
건축-가구-조각-공예-태피스트리의 제작과 루이 14 세 자신의 영화를 위한 장식적 대사업을 통합하는
구상력까지도 보인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베르사유궁의 <거울의 방>천장 그림은 과장되고
장황하게 보이는 것이 특색이며 이탈리아 바로크 경향의 카라치식 표현법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작가들의 미술이 다행히도 그 시대적 취향과 요구에 일치되고 있었기에
17 세기 프랑스 미술은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것은 루이 14 세의 재상인 제나 바티스테 콜베르가 왕권의 신장과 더불어
프랑스의 문화적 독립과 영화를 생각하며, 모든 예술 활동과 예술 교육을 국가에서 관할토록 하면서
지도와 장려에 힘썼으며 그것을 왕과 국가의 영광으로 삼는 문화적 사업으로 집결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목적 아래 1648 년에 발족한 아카데미는 샤를 르브렁을 원장으로 정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적 고전주의 표현을 미학의 규범으로 삼았다.
아카데미 활동의 구체적 성과는 베르사유궁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 장식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로마 구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 베드로 대 성당과 그 권위의 상징에서 비교가 되며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로크 예술의 2 대 기념비와 같은 것이었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던
베르니니의 건축 설계 도안을 거절한 루이 14 세는 환상적인 교회 예술과는 다른 영구 기념비인 성격과 질서,
그리고 호화스러움 속에서의 절도라는 고전주의적 성격을 존중하였다.
이와 같이 왕권 중심의 적극적인 문화 정책이 아카데미의 육성이었으며 그 권위와
미학은 프랑스 예술을 확립시키기도 했다.
샤를 르브렁에 이어 피에르 미냐르, 그 후에는 궁정 건축가인 쥴 아르두앵 망사르로 예술의 지도권이 계승되어졌다.
태양왕 루이 14세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고전주의가 거의 완성되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말 '짐은 곧 국가이다' 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그를 찬양하는 작품들이 여기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샤를르 르블렁은 프랑스에서 예술의 독재자로 군림하게 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프랑스의 모든 미술가들에게 이 고전주의 양식을 강요하게 된다.
바로 푸생이 가지고 있었던 이성적인 예술양식에 대한 강요를 하게된 것이다.
여기서 공부하게 된 작가들은 예술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소양교육을 동시에 받게 되는 데,
여기서 카라밧치오가 0점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탈리아에서 장기간의 수련을 마치고 1627 년 프랑스로 돌아온 부에는 그때까지 매너리즘에 젖어 있던
프랑스 회화에 카라바지오 화파의 표현 양식과 로마의 장엄한 양식 전통을 도입,
종교 및 신화 소재의 거대한 표현 양식을 통해 새로운 회화 세계를 보여 주었다.
제자로서는 르 쇠르, 샤를 르브렁, 피에르미냐르가 있었고 이들은 17 세기 프랑스 화단의 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르브렁만 해도 1642 년부터 1645 년까지 로마에서 수련했던 바와 같이 이들은 각기 나름의 개성과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경향을 합쳐 국민적 양식을 만드는 길에 선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진지함과 그의 공간의 기하학적 구도 사이에는 일종의 공통성이 있다.
즉 데카르트의 정신적 풍토가 미치는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푸생은 화면의 지적 질서를 중요시하고
또 정연한 구성을 했으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화가 자신의 말처럼
'구성된'자연이지 결코 세잔에 게 있어서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의 한 모퉁이'는 아닌 것이다.
푸생은 성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이지적이며 이상적인 구도와 소재,
그리고 논리적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
미적 표현은 이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표현의 고귀한 성격은 숭고한 정신의 반영이고
따라서 작품의 소재도 숭고해야 한다는 것이 푸생의 미술관이었다.
이러한 그의 미학은 종교적인 작품 <천사와 성 마태오>, 철학적 작품 <디오게네스>, 신화적 작품 <폴뤼페모스>, 시적 작품 <오르페우스>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권위와 화려의 궁중 예술 세계와는 별도로 17 세기 프랑스를 장식한 또 하나의 흐름은
프랑스 회화 미술의 고전적 미학을 확립시키는 길이었다.
회화미술의 2 대 조류가 오늘날까지도 데생과 색채로 양분되고 있다는 점에서 푸생의 역사적 위치가 잡혀진다.
푸생의 이지적 고전 미술은 형태 위주의 데생 중심 화풍에서 비롯된 것이고,
베네치아 화파의 색채 중심 표현은 루벤스를 거쳐 발전되어 온 감성적 표현의 미술이었다.
이렇듯 회화 미술에서의 화법 분기를 보여 준 것이 푸생의 시대적 위치라고 평가된다.
자연이 창작에서 숙고 대상으로서 푸생 미술에 표현되었다면 로랭에게 풍경화는 꿈을 안겨 주는 자연의 묘사였다.
로랭은 자연에 담겨진 은은한 빛을 사람의 감흥을 돋우고
정취를 갖게 해주는 원천으로 취급함으로써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카라바지오의 빛이 로랭에게 이어졌고 이것은 또한 빛의 화가인 죠르즈 드 라 트르로 연결되고 있다.
밤의 호롱불이나 촛불에 비추어지는 광경을 소재로 삼고 분위기와 장면에 신비성을 감돌게 하는 투르의 미술은
소박하고 온화한 경향의 작품들이었다.
푸생은 이상적인 풍경화의 영웅적인 특질을, 로랭은 풍경의 목가적인 특질을 개발했다.
물론 푸생과 루벤스는 서로 대립되는 유파를 대표하게 되는데 전자는 고전파, 후자는 바로크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푸생의 경우, 그의 고전주의 는 차가운 형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크적인 성향이 강인한 조형적 의지에 의해 억제된 생명력을 지닌 고전주의인 것이다.
격동적인 리듬, 살육의 장면, 관능적이며 극적인 정경들이 그를 잘 대변해 준다.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예루살렘의 파괴》《아폴로와 다프네》 《바커스제》 《플로라의 승리》 《계단 위의 성가족》
《영아 학살(1631)》 《목동의 경배(1636)》 《아르카디아의 목지들(1634∼35)》 《사계(四季) 연작(1660∼64)》
등이 있다. 1665년 사망하였다.
[聖母의 昇天]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650
Oil on canvas, 57 x 40 cm Musée du Louvre, Paris
[사도 바울의 歡喜]The Ecstasy of St Paul 1649-50
Oil on canvas, 148 x 120 cm Musée du Louvre, Paris
[자화상]Self-Portrait 1650
Oil on canvas, 78 x 94 cm Musée du Louvre, Paris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폭풍이 몰아치는 풍경]
Strormy Landscape with Pyramus and Thisbe 1651
Oil on canvas, 192,5 x 273,5 cm Städelsches Kunstinstitut, Frankfurt
[버려진 아기 모세]The Exposition of Moses c. 1650
Oil on canvas, 105 x 204 cm Ashmolean Museum, Oxford
[아기 모세의 발견]The Finding of Moses 1651
Oil on canvas, 116 x 178 cm National Gallery, London
[하갈과 천사]Hagar and the Angel c. 1660
Oil on canvas, 100 x 75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디아나와 오리온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Diana and Orion 1660-64
Oil on canvas, 119 x 183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여름](룻과 보아즈)Summer (Ruth and Boaz)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가을]Autumn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겨울]Winter 1660-64
Oil on canvas, 118 x 160 cm Musée du Louvre, Paris
The Institution of the Eucharist 1640
Oil on canvas, 325 x 250 cm Musee du Louvre, Paris
The Sacrament of Baptism 1642
Oil on canvas, 95,3 x 121,6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Landscape with St Matthew and the Angel c. 1645
Oil on canvas, 99 x 135 cm Staatliche Museen, Berlin
Ideal Landscape 1645-50
Oil on canvas, 120 x 187 cm Museo del Prado, Madrid
Landscape with Diogenes c. 1647
Oil on canvas, 160 x 221 cm Musee du Louvre, Paris
Landscape with Polyphemus 1648
Oil on canvas, 150 x 199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Landscape with a Man Killed by a Snake 1648
Oil on canvas, 119,4 x 198,8 cm National Gallery, London
Landscape with Orpheus and Euridice 1648
Oil on canvas, 124 x 200 cm Musee du Louvre, Paris
Landscape with the Funeral of Phocion 1648
Oil on canvas, 114 x 175 cm National Museum of Wales, Cardiff (on loan)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by his Widow 1648
Oil on canvas, 116 x 176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Landscape with the Gathering of the Ashes of Phocion (detail) 1648
Oil on canvas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Rebecca at the Well c. 1648
Oil on canvas, 118 x 199 cm Musee du Louvre, Paris
A Roman Road 1648
Oil on canvas, 78 x 99 cm Dulwich Picture Gallery, London
The Shepherds of Arcadia.
1627. Oil on canvas.
아르카디아 [Arcadia]
현대 그리스어로는 Arkadhía.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에 자리잡았던 고대 그리스의 산악지역.
이 지역은 목가적이고
고립적인 특징으로 인해 그리스·로마 시대의 전원시와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에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오늘날의 아르카디아 주는 이 지역과 일치하지 않으며,
동쪽으로 아르골리코스 만까지 뻗어 있다.
주도는 트리폴리스이다.
고도 500~1,000m의 분지들이 있는 아르카디아 고원은 북쪽으로
에리만토스·킬리니 산맥과 경계를 이루고, 보다 낮은 수많은 산맥들로 분할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산맥들이 평야를 감싸고 있으며, 지하강이 흐른다.
비교적 개방되어 있는 서쪽은 알페오스 강과 지류들이 고립된 산맥을 따라 흐른다.
지류 가운데 하나인 라돈 강은 댐과 저수지를 통해 수력발전에 이용된다.
강우량이 불규칙하여 포도재배는 어느 정도 가능하나 올리브 재배는 불가능하다.
참나무 숲이 여러 군데 있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건조해 초목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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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재판 150 x 101 cm / 캔버스, 유화 / 1649년작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탄크레디와 에르미니아Tancred and Erminia.1630s
에르미타쥬 미술관 소장돼 있는 이 그림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탄크레디가
부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할 때, 그의 애인 에르미니아가 직접 전쟁터에 와서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출혈이 멈추지 않을 때,
머리를 잘라 붙이면 멈춘다는 시 구절에서처럼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소망이 나타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완벽한 원의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각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빌어 그
들의 완벽한 사랑의 실체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의미하는 갈색 하늘도 보입니다.
빛과 희망의 상징인 하늘이 구름에 뒤덮이면서
갈색의 대지와 함께 전체적인 색의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탄크레디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두 마리의 말 중 흰색 말은 에르미니아의 순수한 마음,
무기력한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고,
갈색 말은 죽음의 색으로 탄크레디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즉, 이루지 못하는 비극적인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황금송아지 숭배
211.8 x 153.4 cm / 캔버스, 유화 / 1633-34년 작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The dance to the music of time c. 1640
손에 손잡고 춤을 추는 여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를 의인화 시킨 여인이고
음악을 연주(리라)하는 노인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1594 ~ 1665)
The Shepherds of Arcadia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1638
첫댓글 원본 게시물 꼬리말에 인사말을 남깁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