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인시(引示)된 인물화는 신원미상 화가의 1590년작 〈몽테뉴 초상화〉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에서나 자연에서나 일상생활에서 느낀 것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로서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고, 필자의 개성이나 인간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유머, 위트, 기지를 포함하는 글”이라고 얼추 풀리는(설명되는) “수필(隨筆)”은 “만문(漫文), 만필(漫筆), 상화(想華), 에세이(essay)”의 유의어(類義語)나 동의어(同義語)이다. 같은 대사전에는 수필과 상통할 만하게 보이는 “수상록(隨想錄)”이라는 낱말도 등재되어 “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이라고 후루룩 뚝딱 풀린다(설명된다).
동양에서 수필이라는 글갈래(작문분야; 글쓰기형식; 장르; genre)나 용어의 최초일례는 중국 남송(南宋, 1127~1279)에서 활동한 정치인·유학자(儒學者) 용재(容齋) 홍매(洪邁, 1123~1202)의 1180~1197년작 16권짜리 《용재수필(容齋隨筆)》이라고 통설(通說)된다.
한반도에서 수필이라는 글갈래의 최초일례는 고려(高麗, 918~1392)의 문신(文臣)·학자 역옹(력옹; 櫟翁)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1342년작 《역옹패설(력옹패설; 櫟翁稗說)》이라고 통설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수필(隨筆)” 항목(☞ 참조)에 인용된 이 패설의 서문에는 “한가한 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바로 수필인데, 그때그때 보고 느끼며 흥미로운 것을 표현하는 붓이 가는 대로 쓰는 (수필하는; 隨筆하는) 산문이다”고 기록되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수필은 “낙수(落水)를 벼룻물로 삼아 한가한 마음으로 수의수필(隨意隨筆)하여 울적한 회포를 풀거나, 닥치는 대로 적은 것”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니까 수필은 ‘붓의 행로를 따라 쓰인 글, 펜의 행로를 따라 쓰인 글, 자판을 치는 손가락들의 행로를 따라 쓰인 글’이라고 얼추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근래의 한국에서 글쓰인 수필들의 “전부는 아닌 대다수”는 베스트셀링당하고파 안달하여 이른바 “하나마나한 말이나 쓰나마한 글”만 힐링말랑달달훈훈몽롱하게 술술 중언부언하는 자기계발형 섬망문(譫妄文)(☞ 참조), 아니면,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내는 최루성 고생담과 훈시성 교훈담을 짬뽕한 신변잡기 따위를 점점 더 빼닮도록 변이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수필의 유의어나 동의어라고 통인(通認)되는 영어 에세이(essay)의 어원이나 유래나 기원이 감안되면, 수필은 에세이와 서르 ㅅ·ㅁ·ㅅ디기는커녕, 서로 사무치기는커녕, 정합(正合)하기는커녕 서르 슬그머니 미적미적 ㅅ·ㅁ·ㅅ디 아니ㅎ·려는 듯이, 서로 슬그머니 미적미적 사무치잖으려는 듯이, 슬그머니 미적미적 불합(不合)하려는 듯이 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의 2022년판 한국어본 《에세(Essais) 1》(1580)을 공역(共譯)한 한국 프랑스문학자·덕성여대 명예교수 심민화의 번역자 서문에서 증언되듯이(《에세 1》, 18~20쪽), “몽테뉴는 1580년에 《에세(Les Essais; 에세이집)》를 초판하여 새로운 글쓰기 형식의 탄생을 알렸다. 에세(essai)는 ‘시험하다, 검사하다, 경험하다, 처음 해보다, 해보려고 애쓰다, 시도하다’를 뜻하는 동사 ‘에세이예(essayer)’의 명사”이다.
그러니까 ‘에세’는 몽테뉴의 신조어(新造語)였고, ‘에세이(essay)’라는 영어를 파생시켰으며, 한국에서는 여태껏 대체로 수필이라고 번역되었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따르는 기록’을 뜻하는 이른바 수상록(隨想錄)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심민화의 번역자 서문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은 에세이, 수필, 수상록의 의미와 어원이나 유래나 기원을 재고(再考)시키면서 ‘에세’의 본의마저 소환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몽테뉴의 글쓰기는 자신답지 않은 상태를 벗어나려고, 나아가 ‘자신을 탐구하며 … 자신의 원본을 뽑아내어’ 자신을 알려고 애쓰며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힘겨운’ 노력(essayer)이요 그런 과정의 기록이다. 몽테뉴는 《에세 2》(1588) 제8장에 ‘우리 정신의 행보처럼 정처없는 행보를 좇으려는 시도, 우리 정신의 내적 주름들의 불투명한 심연에까지 파고들려는 시도, 움직이는 정신의 미묘한 음조를 고르고 잡아내려는 시도는 까다로울뿐더러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다’고 글썼다.”
이런 맥락은 브리튼 작가·철학자 사라 베이크웰(Sarah Bakewell, 1963~)의 몽테뉴 평전 《인생방법(How to Live)》(2010, p. 8)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소견과 조응한다.
“몽테뉴는 이렇게 새로운 글쓰기 장르를 창조하여 그것에 에세(essais)라는 총칭을 붙였다. 오늘날에 통용되는 에세이(essay)라는 영어는 본연의 의미를 깡그리 유실해버렸다. 에세이라는 낱말을 듣거나 보는 사람들의 다수는 중고등학교에서나 대학에서 (이른바 추천도서나 권장도서라는 명목으로) 지정된 필독서들을 읽고 습득한 지식을 검증받을 수 있게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독서감상문, 독후감, 서평, 비평문, 보고서 같은) 과제물을 상기한다. 그런 과제물의 본문에서는 타인들의 주장들이 짜깁기되고, 그런 본문의 앞뒤에는, 마치 옥수숫대의 양끝에 포크가 하나씩 꼽히듯이, 지루한 서론과 안이한(facile; 술술 쉽게 읽히는) 결론이 덧달린다.”
이런 세태가 감안되면, 적어도 한국에서나 영어권에서는, 수필과 에세이가 오히려 슬그머니 미적미적 밀합(密合)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라 베이크웰은 곧이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런 과제물 같은 글들은 몽테뉴의 시대에도 있었지만(존재했지만) 에세는 없었다(존재하잖았다; 부재했다). 에세이예(essayer)는 단순히 ‘시도하다’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뭔가를 ‘에세이하다(to essay; 에세이예하다)’는 뭔가를 ‘시도하다, 검토하다(맛보다; 알아보다; 살펴보다; 검증하다), 시험하다(실험하다)’를 뜻한다. 17세기에 어느 몽테뉴주의자(Montaignist)는 에세이예를 ‘권총의 성능을 검증하는 시험발사’에 비유했고 ‘말(馬)의 순종성(順從性)을 확인하는 시승(試昇)’에 비유했다. 그러니까 요컨대, 몽테뉴는 권총을 망가뜨릴 때까지 시험발사하면서도 지겨워하지 않았고 말(馬)을 조종하지 못할 만치 과속(過速)으로 몰아 시승하면서도 힘겨워하지 않았다. 그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자신의 에세이예를 구경하듯이 즐겼다.”
에세이의 이런 어원이나 유래나 기원이 감안되면, 적어도 근래의 한국에서 수필이나 에세이랍시고 쓰인 모든 글의 팔 할쯤은, 몽테뉴의 의지를 반영하는, 비록 아쉬우나마 ‘시론(詩論)이 아닌 시론(試論), 시도문(試圖文), 소론문(小論文)’이라고 약역(략역; 略譯)될 수 있을, ‘에세’와 어지간하게나 미지근하게 서르 ㅅ·ㅁ·ㅅ디 아니ㅎ·리라고, 서로 사무치지 않으리라고, 불합(不合)하리라고 억측될 수 있을 확률이 영(0; 령; 零)으로 수렴되지는 않을 성싶다.
그리고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기록되었듯이, 잉글랜드 작극가(作劇家)·시인 벤 존슨(Ben Jonson, 1572~1637)은 1609년에 에세이스트(essayist)라는 호칭을 최초로 사용했다. 이 대목에서 얼핏 추정될 수 있다면, 미국 에세이스트들의 대표자는 랠프 월도 에머슨일 것이다.
☞ 시인 철학자 에머슨 영향 독립독행 스피노자 쇼펜하워 소로우 윌리엄 제임스 니체 권력 처세론
그런데 적어도 한국에는 ‘수필가(隨筆家)’라고 얼추 후딱 번역되는 에세이스트나 에세위스트(essayiste)라는 호칭과 어지간히, 아니면 아쉬우나마 미지근하게라도, 정합할 만한 작가나 글쟁이가 과연 몇 명이나 현존하느냐는 문제의 정답은 게을러터진 꾀죄한 죡변의 몫이 결코 아닐뿐더러 죡변의 흐리멍덩한 눈깔에 핏발마저 세울 만한 중대관심사도 아니리라.
뭐, 어쨌거나, 하여튼, 아랫그림은 브리튼 화가 존 해밀턴 모티머(John Hamilton Mortimer, 1740~1779)의 1768년작 풍자동판화 〈서평꾼들의 소굴(The Reviewers Cave)〉이다. 물론 이 그림의 제목은 ‘서평쟁이들의(서평가들의; 리뷰어들의) 동굴(비평꾼들의; 비평쟁이들의; 비평가들의; 평론가들의 소굴이나 동굴)’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성싶다. 이 그림의 좌상부(왼위쪽)에 묘사된 ‘왼손으로 칼을 쥐고 구름 위에 드러누워 잠든 여인’은 ‘멍청(아둔; 둔감; 우매; 무분별; 몽매)의 수호신(The Genius of Dullness)’이고, 우상부(오른위쪽)의 ‘동굴천장에 고정된 끈들에 꿰여 매달린 사람얼굴가죽(인면피; 人面皮)들’은 좌하부(왼아래쪽)에 묘사된 ‘하인의 목덜미에 얹혀 운반되는 바구니에 담긴 책들을 집필한 저자들의 얼굴에서 박피된 것들’이며, 좌중부(왼가운데)에 ‘모여 앉은 서평꾼(서평가; 리뷰어)들의 뒷줄에는‘ 고개를 쳐든 당나귀가 아가리를 벌리고 울어젖힌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2022.11.29.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