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계산법
(눅 12:13-21)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지구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환경 위기, 양극화 현상 등 인류의 종말을 재촉하는 위기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년 기후 환경 재난은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동식물 또한 멸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상황입니다. 개선될 수 있다, 나아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지구의 종말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구의 위기는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연을 돌보고, 관리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탐욕입니다. 지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많이 차지하면 누군가는 갖지 못합니다. 지구라는 환경 자원은 오늘 시대의 것만 아니라 후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을 사는 세대가 지구를 망가뜨리면 후손은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환경은 후손들에게 빌려 온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후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자연 환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것인양 착각하고, 자기만 누리려고 하고, 파괴합니다. 내것을 내 맘대로 이용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탐욕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욕심들이 모여서 기후 환경 위기, 자원 위기를 부추겼고 함께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개인의 탐욕이 지역의 탐욕이 되고, 국가의 탐욕이 되고, 기업의 탐욕이 되었습니다. 탐욕은 성장과 발전이라는 허울을 쓰고 정당화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편리함을 핑계로 파괴하고, 개발하면서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각종 경제 통계 숫자를 보면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도 50년 동안 수백 배의 성장을 했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라기보다는 편리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행복하고 지속 가능한 나라일 텐데, 지금 우리나라는 행복하지도 않고, 지속 가능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그저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편리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편리하게 살려면 비용이 듭니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지불해야할 대가가 있습니다. 노동이든, 이윤이든, 아니면 남의 것을 빼앗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비용을 마련하고 편리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편리함을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하고,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계산해야 합니다.
미국의 부자가 남태평양에 있는 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 느긋하게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는데, 옆에 현지인인 듯 구릿빛 피부에 건장한 남자도 같이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그에게 묻습니다. 현지인인지 물어보고, 직업이 무엇이냐 물으니 어부라고 합니다. 왜 고기잡이를 하러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오늘 먹을 만큼 잡았다고 하니까, 그래도 더 많이 잡으면 좋지 않으냐고 충고합니다. 어부가 ‘왜’ 많이 잡아야 하느냐고 물으니 ‘많이 잡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뭐하느냐고 물으니, 큰 배를 사서 더 많은 고기를 잡고, 더 많은 배를 사서 더 많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부가 ‘그렇게 부자가 돼서 뭐 하게요?’라고 묻습니다. 부자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나처럼 바닷가에서 편안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어부가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어부는 부자와 나란히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야만 행복하고, 편리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탐욕을 감추는 것일 뿐입니다. 어부는 오늘 필요한 모든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쌓아둔 재산은 없을지 몰라도, 원하는 행복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과 발전을 외치며 달려오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인간이 파괴했던 것이 이제는 인간을 공격합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생명과 성공을 파괴합니다. 환경오염은 인간에게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을 지불하게 만듭니다. 파괴된 인간관계와 공동체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를 만들고, 미움과 시기, 증오로 가득한 분노의 사회로 만들어 서로를 해치고 공격합니다. 편리해진 것은 맞는데,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안전한 사회와 안전하지 않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편리한 사회 중에 어느 것이 나은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계산을 잘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탐욕이 생기면 미련한 사람이 되고, 미움, 시기, 질투가 있으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말씀에서 ‘탐욕’을 경고하십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와서 형이 받은 유산을 나누라고 말씀해달라고 청합니다. 아마 유산 때문에 형제의 우애가 깨졌을 것입니다. 유산을 갖고 싶은 탐욕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미움은 증오가 되어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려면 탐욕부터 버려야 합니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사이 좋게 유산을 나누었을까요?
예수님은 탐욕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한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는데, 쌓아둘 창고가 없어 고민하다가 더 큰 창고를 짓고, 그 안에 곡식을 가득 채운 다음 만족한 듯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현대인들이 가장 부러워하고 꿈꾸는 삶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좋은 계획을 세웠지만,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편안하게 쉬고, 먹고, 즐기는 삶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지만, 생명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의 계획이 예수 믿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부자는 땅을 많이 가진 지주였을 것입니다. 소작농들이 열심히 일해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벌어들인 것이 자기 노동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많은 것을 소작농들과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인데 자기 혼자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한 것입니다.
재물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원과 기술은 한정되어 있는데 한 사람, 혹은 한 나라가 많은 것을 가지면 다른 사람, 다른 나라는 자신의 몫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많이 가지면 미움과 시기, 질투를 얻게 되겠지요. 진정한 부는 나눔으로써 함께 부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또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쌓아둔 재물을 가지고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이 세상의 삶’에 한정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인생인데 먹고 쉬고 즐기다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기에 자기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이 오늘 밤에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즐기는 것으로 끝낼 인생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눔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또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말을 합니다. 주위에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혼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합니다.
많은 것을 쌓아두었으면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않는 자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버리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일 죽어도 부자로 살아보고 싶다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눔으로써 주님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나눔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전 지구적인 인류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위기를 헤쳐나가는 길은 탐욕을 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 주위에 가난한 사람,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그의 것을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눔은 여러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나누는 장기기증부터, 재물과 시간을 나누는 후원과 봉사의 방법도 있습니다. 나눔은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것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은 모르겠고, 나만 예수 잘 믿고 복 받아 행복하게 인생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의 계산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면 나만 잘 살고, 잘 먹고 지낼 수 없습니다.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이 예수 잘 믿고, 복 받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