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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 2호차, 여기는 1호차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차를 좌측으로 바짝 붙여 통과하세요. 나뭇가지가 차체지붕에 부딪힙니다. 조심하여 통과하세요.”
우리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선현유적답사일행 70여명을 실은 두 대의 리무진버스는 명재 윤증고택 입구에 서 있는 팽나무와 느티나무 老巨樹 아래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었다. 불가에서 一柱門은 世間과 出世間의 경계라 하였고 반면 不二門은 세상 삼라만상은 그 경계가 없으니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였다. 버스가 일주문인 듯 불이문인 듯한 그 나무가지 아래를 기다시피하며 어렵사리 통과하는 순간 나는 기사님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윤증고택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참으로 상서로운 生氣를 품고 있는 집이였다. 風水家의 말을 빌면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대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1대간과 그 곁가지 역할을 하는 13정맥으로 구분을 한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이 지리산 쪽으로 남하를 하다가 마이산 쯤에서 두 개의 정맥을 만들어내는데 하나는 모악산,내장산,무등산 쪽으로 남하하여 호남정맥을 이루고 또 하나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둔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향하는 금남정맥이 된다. 바로 이곳 명재종택의 主山인 노성산 옥녀봉은 계룡산에서 뻗어 나온 한 지맥이 그 날이 선 殺氣를 충분히 脫殺하고 난 뒤 마치 철모를 엎어놓은 듯 부드럽고 둥그스름한 형국의 金體形 산이다. 그 지맥이 끝나는 이곳 옥녀봉 일대가 바로 풍수에서 말하는 地氣를 맺은 터 곧 명당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主山 옥녀봉의 祖山이 되는 계룡산은 어떤 산인가? 산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불같은 기질을 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火體形 산이 아니던가. 담금질 잘된 무쇠가 좋은 연장이 될 수 있듯이 이 곳 명재종택의 옥녀봉은 담금질이 잘된 보기 좋은 금체형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인걸은 지령이라. 다시 풍수가의 말을 빌려보면 이 곳 옥녀봉 자락은 잘 단련된 무쇠 기질을 지닌 인물과 관련이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다.
잘 단련된 무쇠 기질의 소유자 명재 윤증
‘窮則獨善其身 通則兼善天下’ 라 했다. 무쇠는 때를 잘 만나면 좋은 연장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때를 잘못 만나면 대장간 한쪽 귀퉁이에서 그냥 녹슬어 버릴 수도 있다. 명재 윤증은 1626년 인조4년에 태어나 효종,현종,숙종 대를 거쳐 간 인물이다. 파평윤씨 노종파(노성윤씨)인 명재의 집안은 祖父 윤황, 父 윤선거, 윤증 자신에 걸쳐 3대가 모두 시호를 받았고 47명의 대과급제자를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였다. 명재는 38세 때 처음으로 공조좌랑의 벼슬을 제수 받았고 이후 줄곧 수많은 벼슬을 하사받는다. 81세에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의 벼슬까지 제수 받았지만 명재는 단 한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바가 없었다. 우의정을 사임하는 상소는 18번,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는 9번을 올렸다고 한다. 이러하니 명재는 평생을 벼슬과 싸움을 한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거기서 어머니의 순절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그에 대비되는 아버지 윤선거의 강화도 탈출을 또한 지켜보게 된다. 자신과 누이 역시 오랑캐들에 의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그때 명재의 나이 불과 9세였다고 한다. 후일 주위에서 명재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그에게 과거응시를 권했으나 그는 “ 가슴에 통한을 지닌 사람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며 일평생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겠다” 며 단 한번도 과거에 응시한 적이 없었다. 또한 명재는 임금과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지만 정승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사람들은 이런 그를 두고 ‘백의정승(관복을 입고 조정에 나간 적이 없는 선비 정승)’이라 불렀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에 “징사(徵士)라고 써라” 하였으니 징사란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선비’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대표적 處士는 남명 조식이요, 대표적 徵士는 명재 윤증이 되는 셈이다.
조선시대 정치권은 크게 보면 노론,소론,남인의 3당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론이 화려한 여당이였다면 남인은 서러운 야당이였다. 이들 노론과 남인의 사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한 당은 소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소론의 리더가 바로 명재 윤증이다. 스승인 노론의 대표 송시열과는 회니분쟁(懷尼紛爭)과 삼인동사(三人同事) 건으로 완전히 결별을 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인해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대과급제자 47명 배출, 조부,부,자신 3대에 걸쳐 시호를 받았던 조선시대 명문가의 출중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적 겪었던 가슴 속 통한’과 ‘당쟁에 휩싸이지 않겠다’는 의지만으로 어떻게 달콤한 권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까? 또한 자신의 신념만으로써 어떻게 스승이자 당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음식물쓰레기수거함 보다도 몇 배는 더 냄새나고 지저분하달수 있는 요즘의 정치판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 못할 인물이다. 손재주 좋은 대장장이의 절묘한 담금질을 잘 견디고 이겨낸 질 좋고 간덩이가 부은 무쇠덩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처세가 아닐까.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터에 대한 생각들을 ‘風水地理’ 라 하여 신념화한 우리민족이다. 이러한 풍수사상으로 접근해본다면 계룡산의 火氣에 잘 단련이 된 이곳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 옥녀봉의 金體形 산자락의 地靈은 무쇠 같은 뚝심의 명재 윤증과 같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파평윤씨 노종파 가문의 규율에는 다음과 같이 宗法의 엄수를 당부하는 내용이 있다.
宗法金石(종법은 금석과 같이 소중히 지키고)
先訓鈇鉞(선조의 가르침은 부월같이 무섭게 알아야 한다)
敢有犯者(감히 이를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鈇鉞臨汝(그 부월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국법도 아닌 한 문중의 종법을 두고서 그 종법을 따르지 않으면 도끼가 너를 용서치 않는다니 이 얼마나 섬뜩한 경고인가? 과연 무쇠덩이 기운을 지닌 산 아래 가문의 규율답지 않은가?
명재종택의 음양오행
우리 일행의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명재의 12대 후손인 윤완식 씨(종손인 형님의 작고로 현재 봉사손 역할을 수행)는 사랑채 뜰아래에 먼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재종택 주변부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채, 안채중문, 안채 등의 순으로 우리 일행을 인솔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유머를 곁들여 가며 고택을 안내했다. 나는 윤완식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에 걸쳐 내심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고택의 규모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영남지방의 큰 문중의 고택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윤완식 씨의 설명을 통해 명재종택의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전통한옥 건축양식의 실용성, 과학성 등을 내 눈으로 하나하나 실증적으로 확인을 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사랑채 누마루의 남쪽으로 나있는 분합문을 위로 들어 올리면 누마루 창(?)의 싸이즈가 현대판 와이드비젼 16:9의 비율과 동일하다는 점, 사랑채 내부의 문이 필요에 따라서는 미닫이와 여닫이 그리고 분리형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가능하다는 점, 역시 필요에 따라 사랑채 내 공간을 크게 또는 작게 자유롭게 공간분할을 할 수 있는 이동식 문, ㄷ 자형 남향으로 놓여있는 이 집의 안채의 경우 대청마루에 가만히 앉아서도 대문 밖을 포함 집안 전체를 걸림이 없이 살펴볼 수 있는 절묘한 공간구성, 안채의 서쪽 안방과 그 바깥의 곳간 사이 통로의 간격을 남,북쪽을 다르게 하여 춘,하,추,동 방향이 바뀌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갈무리 할 수 있도록 한점, 안채와 서쪽의 곡간 두 건물의 기단의 높이와 처마의 높이 그리고 처마의 길이 등을 각각 통풍,채광,빗물낙수 등을 고려해 정확한 계산에 따른 건축물이라는 이야기 등에 전통한옥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꺼리를 담고 있는 명재 종택. 나는 종택 동편 언덕받이 사이의 터에 사열하듯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이 집안의 家傳되어 내려오는 비법으로 담는다는 그 유명한 400여개의 校東간장독을 바라보면서 명재종택에 담겨있는 이러한 유,무형의 이야기꺼리에 과연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를 두고 한참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삶을 통해 체득한 저마다의 철학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 철학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들은 자신만의 철학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세상사 모든 것들을 재어보는 법이다. 나에게도 철학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비천하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재주가 하나 있다. 혹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는 않다. 틈틈이 동양학을 공부를 해오면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하는 정도는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꺼리를 담고 있는 이곳 명재종택을 나는 어떠한 나만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이 혼란 속의 명재종택을 ‘음양오행’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木 - 사랑채 이은시사(離隱時舍)
홍범(洪範)에는 오행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水曰潤下,火曰炎上,木曰曲直,金曰從革,土爰稼穡. 명재종택에서 먼저 木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보자. 목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생명력이다. 명재종택에서는 ‘離隱時舍’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사랑채를 대표적 건물로 친다고 한다. 이 곳 사랑채는 여느 양반가와는 달리 솟을대문도 사랑채를 둘러싼 담장도 없다.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그저 툭 터진 터에 格을 갖춰 평지보다 조금 높게 자리 잡고 있는 뿐이다. 수령이 오래된 노거수들이 그러하듯 이 곳 명재종택의 사랑채 ‘이은시사’는 300여년의 세월을 비가오나 눈이오나 전쟁통이나 평상시나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서서 이곳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좋은 나무라하여 나무가 스스로 경계선을 긋는 일을 본적이 있는가. 좋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맛있는 열매, 시원한 나무그늘을 제공하듯 여기 명재종택의 사랑채는 그저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곳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사랑채를 바라보면 그 형세가 마치 땅을 뚫고 하늘을 향해 무한한 생명 에너지를 발산하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그루를 연상케 한다. 300년을 꼼짝않고 한 자리에 서서 신뢰와 은덕을 베풀고 있는 이 곳 사랑채에서 木의 生과 仁함을 보았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火 - 校東간장
이 집에는 또 하나 특이한 자랑거리가 있는데 바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담근다는 校東간장이다. 명재종택에서는 바로 이 간장독들이 火가 되는 셈이다. 400여개의 간장독이 종택의 동쪽이자 동시에 노성향교의 동쪽에 있다하여 校東간장이라 불린다. 답사당일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잔뜩 달구어진 질그릇 장독들은 마치 뜨거운 태양과 누가 더 독한지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있는 듯 한 모습이였다. 눈 밝은 이는 보았으리라. 뜨겁게 불꽃을 내뿜으며 고집스레 서 있는 400여개의 간장독을.
金 - 석가산(石假山),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金은 수렴을 하고 결실을 맺는 작용을 하는 오행이다. 명재종택에서 수렴,결실을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사랑채 바로 아래에 금강산을 모델로 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는 조그만 돌무더기 석가산(石假山)과 그 너머에 있는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 딴 화단으로 보고 싶다. 꿈에도 그렸을 금강산과 무산십이봉을 이렇듯 손쉽게 집안으로 끌어들여 앉히는 발상의 전환. 꿈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곧 금이 말하는 수렴과 결실이 아니겠는가.
水 - 명재종택 샘
수는 생명력을 갈무리하는 작용이다.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다시 오행을 낳는데 이 음양오행의 조화로 만물화생(萬物化生)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곧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木에서 生을 얻고 火에서 長을 얻고 金에서는 收를 얻고 水에서는 藏을 얻고 土는 이 모든 과정에 化로써 화답을 한다. 水는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生을 잉태한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물(생명수)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는 법이 없다. 무산십이봉 화단 바로 곁에는 잘 관리되고 있는 명재종택의 1급 보물인 물 좋은 샘이 있다. 바로 이 샘물이 이 곳 명재종택 교동간장의 맛을 결정한다고 한다. 어디 간장 맛만 결정하겠는가? 그 샘물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그 곳 사람인들 샘의 기운을 비껴갈 수 있을까? 샘을 덮고 있는 나무덮개가 한옥지붕형태를 띠고 있어서였을까? 그 지붕아래 생명수에서 꼬물꼬물 거리고 있을 알 수 없는 그 생명의 기운을 느껴보고 싶다.
土 - 안채 대청마루
토는 化의 작용을 의미한다. 오행 중 가운데에 자리하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萬物化生 전체를 주관하고 있는 셈이다. 명재종택에는 이러한 土의 化작용에 딱 걸 맞는 곳이 있으니 바로 안채 대청마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곳 종택의 안채마루는 ‘ㄷ’자형의 안채 전체를 비롯하여 건너 사랑채까지 문을 열거나 닫음으로써 개방과 폐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가 있다. 심지어는 담 너머 세상까지 마음먹기에 따라 간섭이 가능한 구조이니 바로 木,火,金,水의 작용 전체를 조율하는 土의 역할과 똑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재종택의 음양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명재종택은 陽이 우선이다.
통상적으로 종택의 경우는 집터의 동북방에 조상의 神主를 모신 사당이 있는 법이다. 이는 陰인 祖上神이 거하는 공간과 陽인 사람들이 거하는 공간이 서로 음태극 양태극의 형국으로 교합하며 음,양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집은 음양의 조화라는 측면에서는 양을 우선시하는 집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윤증家는 예로부터 매우 실용적인 가풍을 지닌 집안으로 알려졌다. 제사상의 크기도 줄이고 비용과 일손이 많이 드는 유밀과와 탕은 제사에 사용치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추석차례상에 송편과 전도 올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또한 100년 전부터는 가족들의 생일은 물론 제사와 설날 역시 모두 양력으로 쇠는 전통이 있다. 파평윤씨 노종파 문중의 사립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의 교육내용을 보면 성리학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재물을 다루는 이재(理財)가 커리큘럼으로 잡혀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종택 건물의 실용성,과학성 등과 더불어 윤증가가 얼마만큼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는 형이하학적인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명재종택에 양만 있고 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의 동북방에는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고 담 너머로 조금만 고개를 들어보면 종택 바로 곁에 노성향교와 궐리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재家의 실용성 우선주의는 家門의 學風이였다.
명재가의 門中 사립학교인 종학당(1618년)이 세워져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절은 조선의 성리학이 매우 폐쇄적인 성향으로 흘러가던 시절이였다. 주자의 해석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패가망신을 당하던 서슬 퍼런 시절. 실재로 명재의 부친인 윤선거의 경우도 송시열과 윤휴의 주자경전의 해석차이에서 발생한 대립에 희생이 되어 황산서원에서 큰 봉변을 당한적도 있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종학당의 커리큘럼 서책 중에 심경(心經)이 들어 있다는 점과 명재 자신도 心學에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성리학의 성즉리설(性卽理說)에 반해 심즉리설(心卽理說)의 논리를 전개한 육상산의 양명학과도 연결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자가 아니면 모두 이단이였던 시절 양명학은 心卽理, 知行合一, 致良知를 3대 골격으로 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이였다. 성리학을 불교의 교종에 비유한다면 양명학은 선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론적인 앎보다는 현실의 삶에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조선 실학자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양명학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명재 사후 3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명재 집안에서는 정치인이 전무하다고 한다. 대신 이공계출신, 경영자, 의사 등의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직업군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용헌은 자신의 저서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서 명문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단편적으로는 ‘현재까지 전통 고택을 유지하고 있는 집’을 명문가라고 판단하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고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과 경제적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 그는 구체적으로 세가지 조건을 들고 있는데 첫째는 역사성이요, 둘째는 도덕성이며 셋째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피바람이 불던 조선 당쟁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명재종택. 그곳에는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家風을 유지하며 후손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평소 배푼 적선 탓이였을까? 동학과 6.25라는 난리통에도 집안 사람 하나 다친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건물 한귀퉁이도 손상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던가. 또한 파평윤씨 노종파 는 한 문중에서 47명의 대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명재종택은 실제로 명재 선생이 생활한 곳은 아니다. 명재는 이 곳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유봉영당(酉峰影堂)의 터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보리밥에 볶은 소금과 고춧가루를 찬으로 소박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이 곳 명재종택은 1709년에 명재의 둘째 아들인 윤충교가 장손이자 형님인 윤행교를 위해 지어준 저택이다. 명재의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제 버릇 남 못준다더니 나는 유봉(酉峯)이라는 명재의 字에 특별히 관심이 갔다.
파평윤씨 시조 태사공 윤신달
12지지 중 酉는 닭을 상징한다. 지렁이가 묵어 뱀이 되고 뱀이 묵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묵어 용이 되듯 닭이 금닭이 되고 금닭이 봉황이 된다는 것이 우리네 옛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던가? 여하튼 내가 보기에 유봉은 ‘닭 봉우리 산’이란 뜻이다. 파평윤씨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는 봉좌산(鳳座山) 지맥이 흘러든 터에 자신의 천년유택(千年幽宅)을 잡고 있다. 이 곳은 봉강재(鳳岡齋,경상북도 문화재 201호)란 재실을 거쳐야 올라 갈 수 있는데 좌향(坐向)은 유좌묘향(酉坐卯向)을 하고 있다. 문중에서 이 곳을 금계포란(金鷄抱卵)형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봉좌산(봉황이 앉아 있는 산), 봉강재(봉황이 깃든 산등성이의 집),봉서암(봉황이 깃든 암자),금계포란(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유좌묘향(닭의 좌),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의 묘역은 이렇듯 봉황,닭과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다. 파평윤씨 노종파 윤증의 또 다른 호인 유봉(酉峯) 그리고 생전에 선생이 거주하였다는 터에 세워진 유봉영당(酉峰影堂). 시조의 묘와 명재 자신의 호에 나타나는 닭을 상징하는 酉자의 연관성.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파평윤씨들은 시조탄생설화에 근거를 두고 천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종법을 어기면 부월이 너를 용서치 않는다’고 가르치는데 어련하겠는가?
사라져가고 변질되어버린 우리의 전통예학을 더 늦기 전에 복원,계승,발전시켜 이 시대에 무리 없이 적용 가능한 올바른 전통예학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體와 用은 모두 중요하다. 禮에 있어서도 정신과 형식은 서로 공존할 수 있어야 무리가 없는 법이다. 윤증家의 경우 아예 제사상 크기를 반으로 줄여버리니 당연 進饌할 수 있는 음식의 수는 줄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그 곳 윤씨들은 쉽게 보았다간 큰 코 다칠 것이다. 그들은 예의 본질인 정신만은 결코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종학당의 내규 여섯 번째 재의(齋儀)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재의 : 매일 스승과 당장(학장)은 아침 일찍 기상해 의관을 정제하고 자제들을 인솔하여 선조 산소를 향해 2번 절한다.
금번 답사를 동행한 이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으리라. 종학당 정수루(淨水樓)에서 병사저수지 너머 산자락에 자리한 파평윤씨 노종파 조상묘역을 다들 보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