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심사평 등입니다. 인쇄 받아 읽어보구요. 여기에 빠진 것들도 여러분이 올려주시기를.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철로변'
철로변
이길상
역사엔 톱밥난로가 홀로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이길상 약력
●1972년 전주 출생
●전북 전주시 효자동 1가 550-5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교 4학년
[당선소감]
원고를 투고한 후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당선될 수 있을까. 더욱이 올해는 이른 봄부터 내 마음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게 과연 시적 재능이 있을까. 시집을 읽고 습작을 해도 좀처럼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영화와 음악은 지쳐 있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와 우체부의 삶과 우정을 다룬 영화 ‘일포스티노’처럼 애정으로 사물과 사람들을 대하고 싶다.
새벽 거리를 걷는다. 주위는 어둡고 가로등 몇 개만이 빛을 내뿜고 있다. 가로등이 내뿜는 것은 과연 빛일까. 다 잠든 시간, 깨어 있는 것들의 삶이 궁금하다. 불 켜진 집에서 새어나오는 온기가 몸에 닿는다. 차창마다 어둠을 매단 새벽 기차가 역에 닿기 전, 뭔가가 그리운건 꼭 쓸쓸한 풍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어두운 길보다 더 먼 길이 나에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 길, 파도처럼 출렁거릴지라도 결코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 생활을 마치는 겨울 한 자락을 딛고 서 있다. 4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 잊고 지낸 것들이 너무 많다. 시도 생활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내야 하리라.
고마운 분들이 많다. 먼저 마음 고생이 많으셨던 부모님, 그동안 지도해 주신 교수님들께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문우들과 친구들이 많이 기뻐할 것이다. 또 전북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서도 정말 감사드린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당선소감-심사평
<당선 소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담바라꽃 피워내듯…
밤새 뒤척이고 난 새벽 불곡산을 올랐다. 돌아와 문을 여는데 발 밑으로 이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옷에 묻히고 온 많은 이슬 중에서 단 한 방울만이 나를 떠난 아침, 젖은 옷 벗어 걸며 내 안에서 마르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 그들에게 미안했다.
얼마 전, 삼천 년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꽃을 보았다. 금불상을 뚫고 나온 그 꽃은 마치 이슬방울 같았다. 시를 쓴다는 것이 가슴으로 우담바라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닐까. 일생동안 갈고 닦아 좋은 시 한 편 써야 할 숙명의 길로 나는 지금 한 발 들어서고 있다.
삶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오지 않음을 알고 느꼈던 비애마저 기쁘게 감싸 안도록 다독여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친정 부모님과 종가의 맏며느리 역할에 소홀함을 덮어주느라 더 바쁘셨던 시어머님, 글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현식과 담비 그리고 야생화로만 알았던 당신이 내겐 우담바라꽃이었음을.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
시의 호흡법조차 모르는 내게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신 정호승 선생님, 이제 ‘어떻게’ 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로 고민하라고 하신 말씀 늘 기억하겠습니다. 황야에 조심스레 밀어올린 대궁에 튼실한 뿌리가 되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슬프게 떠난 이와 그리움으로 머무는 뭇인연들에게도 인사해야겠다. 그들과 함께 하고, 함께 할 세상이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약력 -- 1961년 충북 괴산 출생 -- 충북대 졸업 -- 분당 불곡중학교 독서토론 지도
<조선일보 심사평> 정직한 자기성찰 돋보여
조필수 이채운 정임옥 세 분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더라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옥의 ‘뿌리’가 당선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주의깊은 관찰력, 섬세한 즉물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이 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정 씨의 모든 응모작은 당선작에 못지 않았으며, 특히 ‘명암방죽’은 보기에 따라서 더 매력있는 작품으로 뽑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채운의 ‘리듬체조’와 ‘사과알 속의 수행자’도 당선작에 비해 손색없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편 조필수의 ‘내부 순환로’는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당선권에 든 분들은 아니지만 최승철의 몇몇 작품들도 힘이 있어 보였으며, 하정임의 ‘햇빛별빛 잔치’도 동화적 목가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황동규·김주연)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조/ 보길도 시편.........홍라나
처용의 달을 안고 즈믄 바다 찾아간다 깨어진 복사뼈로 곤두박힌 질경이풀만 무너진 언덕 괴면서 피돌기로 잇던 섬.
속살 찢어 일구던 땅 푸른 싹 언제 돋을까 희미해진 눈 비비며 북극성 불러와서 파도는 잠들 수 없는 빈 새벽을 깨웠다.
툭툭 튀는 포말 앞에 짙붉게 타는 동백 수평선 끌어당기면 어둠도 부서지고 먼 하늘 가로질러서 천궁을 퍼올렸다.
보길도 비탈마다 돌아갈 길 열어놓고 조선의 검은 깻돌 자르르 물살에 굴려 서늘한 무명의 아침 씻어 널고 있었다.
[신춘문예] 시조/당선소감-심사평
<조선일보 시조 당선소감> 넘치지 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빛나게
길은 멀리 있었다. 굽이굽이 휘어진 그 길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치고 허기진 것들, 두 손을 내밀어도 속내 보이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노래였다. 조금씩 타 들어가 감감히 사라질지라도 또 다시 가야만 할 길이었다.
물 한방울 찾을 수 없는 사막을 헤매고 있을 때 금호 강가에서 하야로비를 만났다. 철새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않는 금호에 하야로비 홀로 풀씨를 물어 기슭에 풀어놓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가위눌린 내 꿈 속에 하야로비 한 마리 둥지를 틀었다.
자글자글 끓어대는 매운 뙤약비늘 아래 목타는 나무들 등이 휘고 실뿌리 타닥타닥 핏발 서던 그 여름, 하야로비는 엉클어진 삶을 건져 강둑에 쌓아두고 있었다. 묵정밭 콩꽃, 깨꽃을 부리로 다 어루만지며…
천리 밖 묻혀있는 깊은 잠을 기슭에 풀어놓는 하야로비처럼 시조의 율과 격을 내 가슴에 심어두고 싶다. 이빠진 모음들 물어 시조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피워 올리고 싶다. 아직 가야할 길 멀고 험하지만 부족한 작품에 등불 밝혀 길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시조의 길로 이끌어주신 심재완 선생님, 가르침 주신 이기철, 민병도 선생님, 시안(시안)을 키워주신 문무학 선생님께서도 아울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바로 세워준 문우들과 모자람 투성이인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아 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기쁨을 드린다.
◇약력 -- 1960년 경북 고령 출생 --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 한우리 독서 문화원장
<조선일보 시조 심사평> 탄탄한 서사구조로 긴장감 유지
절차탁마 내공이 녹아있는 작품 여러 편을 만나게 되어 즐겁다. 「황야에서」(김규), 「억새」(김수연), 「시립도서관」(이승은), 그리고 「신 동의보감」(최우현), 「알터, 그리고 암각화」(홍라나)는 녹록지 않은 「저력」을 보이고 있다. 당선권 반열에 오른 이들 작품이 지닌 밀도나 그 성취도는 저마다 한 두편씩 보내온 사설시조, 혹은 옴니버스 시조(평시조+사설시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비유로 말하면 평시조는 대중가요의 트로트나 뽕짝조의 가락을, 사설시조·옴니버스 시조는 랩이나 힙합 계통의 가락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지닌 공통적 결함은 사설시조의 필요충분조건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설 및 옴니버스 시조의 요체는 서사구조·풍자정신·갈등구조를 오롯이 담아내는 데 있다. 걸쭉한 입담·웅장한 스케일·복선·판소리의 아니리조·휴지와 종장의 대반전 효과 등 여러 구성 요건을 두루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사설시조는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올해는 사설시조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당선작 「보길도 시편」(평시조)은 긴장을 늦출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공이 부족하거나 연륜이 짧은 신인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거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서사구조를 포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인데 당선작은 그 함정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끈기를 잃지 않고 있다.
시조 특유의 폐활량을 유지한 「보길도 시편」이 커다란 임팩트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윤금초ㆍ시조시인)
[신춘문예 당선작] 동시/ 찻물 끓이기........하정심
가끔 누군가 미워져서 마음이 외로워지는 날엔 찻물을 끓이자
그 소리 방울방울 몸을 일으켜 솨 솨 솔바람 소리 후두둑후두둑 빗방울 소리 자그락자그락 자갈길 걷는 소리
가만! 내 마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주전자 속 맑은 소리들이 내 마음속 미움을 다 가져가 버렸구나 하얀 김을 내뿜으며 용서만 남겨놓고.
[신춘문예] 동시/당선소감-심사평
<당선 소감> 자연을 빚고 사신 아버지와 이 기쁨을
나에게 한세상을 더 살아보라는 신의 은혜가 주어진다면 유년의 그 시절을 한번 더 살고 싶다. 들판가득 연보랏빛 자운영이 눈물처럼 피어 있고 그 들길을 누렁소가 한가롭게 걸어가고 있는 풍경. 그 뒤를 따르는 송아지. 엄마소의 긴 울음 끝에는 졸래졸래 따르던 송아지도 엄마 곁으로 다가가 얼굴을 엉덩이에 비비곤 하던 풍경. 이제는 기억 속에서나 남아 있는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그 봄날의 정겨운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의 동시 쓰기는 유년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문이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봄이면 집 뜰에 온갖 꽃씨를 뿌려 가꾸셨던 아버지. 그리고 바깥뜰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비단잉어를 키우셨는데, 연못에 비치는 저녁노을만으로는 너무 쓸쓸하게 느껴져서 빨간 넝쿨장미를 울타리 가에 심으셨다고 한다.
비단잉어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그 연못에 비쳐든 넝쿨장미와 저녁놀. 아름다운 자연이 빚어내는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고 사셨던 아버지. 생활의 멋을 아셨고 그것을 손수 가꾸고 즐기셨던 아버지였건만 지금은 여든을 넘기신 나이가 되어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신 것이다.
막내딸의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하시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이 당선의 기쁨을 꼭 전해드리고 싶다. 처음 아동문학의 길을 열어주신 엄기원 선생님, 그리고 이야기샘, 물방울의 여러 글벗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약력 1957년 경남 남해생 한국 아동문학 연구소 회원 ‘이야기샘’ ‘물방울’ 문학 동인
<조선일보 동시 심사평> 생활철학 소박하게 담아내
당선작으로 뽑은 「찻물 끓이기」에는 소박한 생활철학이 들어있다. 부글부글 끓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여과를 암시했고 용서만 남는다고 결론했다.
다른 네편의 작품도 수준이 높고 기량이 돋보였으나 이런 관점에선 처지는 편이다. 동시라고 하여도 고운 말 예쁜 말로 바구니 엮어내듯 낱말의 조합으로는 시의 멋을 담아낼 수 없다.
마지막까지 검토한 응모작품들은 다섯편이다. 「아이와 염소」(성명진), 「할머니의 시간」, 「밥그릇」(하인혜), 「미술시간」(권극남), 그리고 「찻물 끓이기」다. 「밥그릇」은 지난해 당선작을 연상시킨다. 이 가운데 딱 한편만을 가려내는 것은 속떨리는 일이었다. 1천여편 가운데 골라낸 것으로는 너무 아깝다. 이런 까닭에 작품이름과 응모자를 밝히는 것이니, 포기하지 말 일이다.
작품수준으로 봐서 당선권 안에 들었던 응모자를 밝히니 재도전을 바란다. 장수경, 안성아, 김형태, 유희윤(이상 서울). 박미숙(구미), 선미선(전곡), 박성우(익산), 조유인(경주), 김용산(안동), 조엽(제주), 송부선(부산), 정양연(보령), 이무완(동해), 김삭불(포항), 이문석(김제), 박가리(대구). 대부분 필명 또는 익명이므로 각자 잠재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는 명단으로 보아주길 바란다. 올 당선작도 재도전자이다. (유경환)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개신고물상
박옥순
1
충대우 6로 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경향신문 시 심사평]낮은곳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
정감이나 관념을 구체적인 표현 없이 실감나게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체적인 표현에 얽매이면 묘사할 수 없는 부분까지 묘사하게 되어 시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체험이 부족한 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비명까지 묘사하려 들지 말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묘사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김지혜의 ‘그런 것이 아니다’ 외 4편은 비교적 마무리가 잘 된 작품들이다. 표현도 치밀하고 긴장도 있다. 그런데 그 긴장이 주로 구성이나 인위적인 호흡조절에서 일어나고 있어 오히려 시를 더 공허하게 만든다. 내용이 채워지면 “울고 싶음의 막막함” 같은 어색한 표현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안성호의 ‘의자’ 외 4편은 모두 상상력이 뛰어나고 재치있다. 생명이 고려되지 않은 표현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민규의 ‘거미에 관한 보고서’ 외 7편은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삶의 내용이 구체화된다면 호소력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혜선의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외 4편은 신선미가 확 풍긴다. 특히 ‘산부인과 대기실에서’는 생명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발전되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 아기와 풀씨 중 하나만 선택하거나 새 틀을 짜야 할 것이다. 박옥순의 ‘개신고물상’ 외 10편은 단순하긴 하지만 삶이 묻어나 있고 표현에 무리가 없다. 호흡도 자연스럽다.
이중에서 선자들은 ‘개신고물상’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했다. 당선작 한편만 두고 본다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느껴지고 낮은 곳을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눈도 없는 시보다 미숙하지만 눈을 떠가는, 생명 있는 시를 밀어본다. 당선작과 함께 투고된 시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기대가 된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신경림·신대철〉
[경향신문 시 당선소감]주머니속 호두알같은 시됐으면
그것은 눈물이었을까? 그래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어둠 속을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릴 뿐 내게 아무도 없던 날. 목마름으로 가슴 쥐어뜯을 그리움도, 미치도록 뜨겁게 끓어오르던 울분도 없던 날들. 그런 중에도 떨리는 아버지의 숟가락 사이를 빠져나와 조금씩 조금씩 어둔 곳으로 흘러들던 모래알 같은 시간들. 저녁 하늘에 의좋게 떠 있는 개밥바라기와 초승달 사이에 걸린 씻부신 듯 반짝이는 시간들. 나는 오랫동안 닿을 수 없는 그 시간들 사이에 걸려 있었다.
오후 내내 시장을 돌아다녔다. 시든 시금치단을 떨이로 넘기기 위해 마지막 목청을 돋우는 야채장수 아주머니,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더 커져야 땅거미가 내리는지. 리어커 가득 생선을 싣고 나온 아저씨, 그의 좌판 위에 얼마나 많은 고등어와 꽁치의 눈 시린 대가리들이 쌓여야 저녁이 오는지. 주차요금 오백원을 받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할아버지, 그의 비척거리는 발걸음이 얼마나 더 빨라져야 따뜻한 밤이 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갈곳 없는 노인들이 비둘기떼처럼 모여앉아 윷판을 벌이는 한낮의 공원 귀퉁이. 언제나 정문에서 먼 쪽으로 자리를 잡던 구부정한 허리들. 주머니 속에 있는 몇개의 꽁초를 만지작거리며 줄어들지 않는 배식줄 틈에 끼어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시린 손 녹여줄 저 주머니마저 없었다면…. 나는 지금 그들이 기다리는 한 국자의 국물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보다도 따뜻하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의 시는 헐렁한 젓가락질로 시린 겨울의 허기를 채운 그들이 짧은 저녁햇살을 등지고 돌아설 때, 간혹 하루종일 만지작거려 따뜻해진 주머니 속 두개의 호두알처럼 외로운 사람들의 삶 그 언저리에서 달그락거리고 싶은 거다.
무딘 가슴에 시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2년 동안 속 끓이신 노창선 선생님을 비롯하여, 학과의 오영미, 한원균, 장효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에 대한 긴장의 고삐 늦추지 않도록 이끌어주신 허혜정 선생님, 함께 공부한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 학우들, 기꺼이 내 시의 첫 독자가 되어준 벗 경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철부지 막내딸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고맙습니다.-박옥순-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 노인이 지은 집'-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꿈·현실 어우러진 시 쓸겁니다"
시 당선자 길상호씨 인터뷰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고통은 '내 마음 속의 집'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 집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질 것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쓴 시입니다." 시 당선자 길상호(吉相鎬ㆍ28)씨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면 좋은 시인은 못되더라도 좋은 사람을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순박한 소년처럼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고 있는 문학도이지만 길씨의 신춘문예 응모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응모에서 그는 1만여편 가까운 응모작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당선 통지를 듣고 너무 쑥스러웠습니다. 첫 응모라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고 더 다듬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부터 정말 큰일이구나' 하는 걱정부터 드는군요."
길씨는 자신이 아직은 꿈에 많이 치우쳐있지만 '꿈과 현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시가 안읽히는 시대, 시의 위기라는 말들을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할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줄 수 있는 것들은 언제 어느 세상에고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씨는 농사를 짓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아래 5남 5녀중 아홉째다. 앳돼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의 그는 상기된 얼굴에도 뚜렷한 어조로 자신의 시관을 피력했다. 하종오기자
[신춘문예] "사는 내 마음속에 집을 짓는 것"
시 당선자 길상호씨 소감
언제부터인가 집에 대한 생각이 쾅쾅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몇 달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집이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새벽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들여놨다가 좁아서 나가버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 뚝뚝 떨어져 돌아서 버리고, 누구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허술한 집을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아주면서, 새는 지붕을 덮어주면서 저의 집을 지탱해준 사람들. 그들 때문에 마음속 집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집 한 채 세우고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쓰는 일은 저에게 집을 짓는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아직 서툴기만 한 저의 집짓기는 언제 끝이 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머리칼 허연 노인이 되어도 끝끝내 그 아름다운 집을 이루겠다는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기대도 앞으로 튼튼한 기둥으로 저를 받쳐줄 것입니다.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많은 지도와 관심을 베풀어주신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강정희ㆍ신익호ㆍ김균태 선생님 외 여러 선생님들, 문예창작학과의 김완하 선생님,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 했던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더욱 힘찬 걸음으로 걷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약력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 1999년 한남대 국문과 졸업
▦ 한남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중
[한국일보 신춘문예] "서정·서사성 조화…마치 한권의 책 읽는 듯"
시부문 심사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편이나 이번 시 부문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여러 편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상호의 '그 노인이 지은 집', 김남극의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 정선용의 '달팽이', 박판식의 '장지', 최요기의 '2월의 강'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은 역동성과 천진성이 돋보였으나 '가련한 생들 아니랴'와 같은 미숙한 표현이 지적되었다. '생'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생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달팽이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의 생태학적 여정을 충실히 그린 작품이었으며 , '장지'는 할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와 통닭을 먹는 나와 가족들의 회한과 상처를 깊게 그리고 있었으며, '2월의 강'은 침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노인이 지은 집'에는 못미치는 작품이었다.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 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커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자는 부디 노력을 통해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 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올려대기 시작한다.
<고현정>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소감, 세상뜨신 `무명시인` 아버님께…
한국 문학사에 남는 시 한편 쓰고 죽고 싶었다. 이젠 세계 문학사에 남는 시 한편 쓰고 싶다로 업그레이드 시킨다. 당선 통보 전화를 정신 없이 받고 끊은 뒤, 잠시 울었던가…. "시인이야말로 상상력의 힘으로 타자의 고통과 연대하고 새 시대의 전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계층인 것이다"고 리처드 로타는 말했다. 틈만 나면 흐트러지려는 내 시 정신을 올곧게 지켜준 좌우명이다.
또한 김사인 교수는 "뜻의 독실함으로 속이 채워지지 않은 재주란 시간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한낱 원숭이의 재간만도 못한 것이지 않겠는가"라고 피력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시쓰기에 스스로 절망할 떄조차도 의연할 수 있었던 내 정신의 소중한 머릿돌들이다.
이제야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흩어져 사라져간 내 시들의 진혼제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지 못한 수 백 편의 내 시들아, 뜯겨져나간 내 삶의 붉은 피톨들아, 이젠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고 제 갈길로 가거라. 무지 축복하고 싶다.
그리고 끝내 무명시인의 아버지로 세상을 뜨셨던 아버지. 부디 저승에서라도 시인의 아버지되심을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가족들. 이들이 없다면 나도 없음을 너무도 잘 안다. 욕심없는 청거북들이 올해도 건강하길.
생명공학의 시대. 이 엽기의 시대를 능가하며 내 지적 갈급함을 끊임없이 두들겨 깨워주신 박제천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마운 문우들. 나를 통해 용기백배 하기를. 마지막으로 내게 마음놓고 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문화일보와 황동규·감태준 심사위원께도 백골난망,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고현정>
▲56년 서울출생 ▲성심여대 영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0뇬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심사평, 새로움 찾으려는 패기 돋보여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현정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과 박병준의 '봉천동 山 5번지에 남아 있는 불빛들'이었다.
'봉천동…'은 그 무엇보다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 노련함은 동봉한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그러나 어디서 미리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신인다운 패기가 설 장소를 아끼고 있다.
이에 비해 '밀란 쿤데라…'는 노련하지는 않지만 새로움을 찾으려는 정신이 있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에서 새로움과 패기가 더 나타나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고 '밀란 쿤데라…'를 택했다.
우리는 두 작품 중에 어느 것을 당선시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몇번씩 읽고 오래 생각한 끝에 팽팽히 수평을 지키고 있는 두 작품의 촌평에서 '밀란 쿤데라…'쪽을 누르기로 했다.
조재형의 '수평선을 감아올리는 수차', 김종훈의 '냉장고', 조성순의 '느티나무'도 눈을 끄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그 시선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했다. 좀더 남들과 다른 감각과 생각을 지속적으로 가지도록 노력하면 좋은 재목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동규·감태준>
매일신춘문예 시 당선작
금관 -조 유 인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 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식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듯.
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낙동강 -송 진 환
말없이 흘러가도
안으로 쌓인 세월의 깊이
으어리 왜 없었겠나만
모래톱에 묻어두고
보아라
가슴 그 안쪽
또다른 강이 되었다
햇살 더 눈부신 날
물빛 곱게 담아내면
굽이 돌아 서럽던
눈물마저 서럽던
눈물마저 갈앉는다
이런 날
강 기슭으론
갈대꽃이 피었다
물소리리로 길을 열어
달려온 역사 앞에
미움도 사랑으로
달빛되어 내린다
어디서 풀잎 서걱이는 소리
내일을 여는 몸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