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1~15)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4절)
이렇게 악한 세대와 환경의 깊숙한 곳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다.
‘오바댜.’ 악한 아합을 받드는 신하였기에
아합에게 분명 친화적인 표정, 순종적인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많은 부분을 아합에게 내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장 중요한 행동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을 높이는 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일이 바로 악한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100명을 숨긴 사례이다.
그 일이 들키면 오바댜는 처참한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는 그런 일을 했다.
오바댜가 악한 아합왕에게 아첨 같은 말을 하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은
다른 기독교인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의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지 않고
그의 외적 행동만을 보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된다.
현실에서 거룩함, 순결함을 지켜나가야 하는 신앙은
그저 단순한 거룩함, 순결함만 가지고 극복해 나가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항상 비유하듯 진흙탕이 삶과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무대라면
진흙이 내 거룩한 흰옷에 처참하게 묻더라도 그곳에 가야 하고
진흙이 범벅이 되더라도 끝까지 투쟁하며 그 현장에서
진리와 사랑을 위해 나뒹굴어야 한다.
거룩하게 보이는 하얀 옷이 뭐라고,
그 흰옷 버리는 것이 두렵거나 걱정스러워
진흙탕을 벗어나거나 우회한다면,
그는 무대조차 오르지 않은 회피자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유지한 흰옷이 뭐가 거룩한가?
더럽고 험한 진흙탕에서의 싸움에서 끝까지 지켜야 할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만을 위해 그 일을 하게 되는
순전한 마음의 중심과 동기이다.
마음의 중심과 동기는 절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흙탕이든, 호화로운 파티장이든 견고하게 불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견고한 중심과 동기가 굳건한 상태에서라면
진흙탕에서는 진흙으로 범벅이 되고
호화로운 파티장에서는 아름다움을 뽐내면 되는 것이다.
씨름장에 가서는 씨름장의 옷을 입고
법관이 된다면 법관의 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된다면 목회자 복장을 하고
노동자가 된다면 노동자의 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총과 칼을 드는 군인이라면, 총과 칼을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 험하고도 다양한 현실의 상황’과
‘견고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향한 마음의 중심, 동기’
그 사이의 괴리, 간극.
그것을 채우기 위해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는 삶.
그것이 이곳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천로역정의 여정이다.
그래서 악한 야합의 아래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굳건히 가진 오바다가 있어야 한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가지고 비판하거나 흉보는 일을 하지 말라.
가장 성스러운 것 같은 목회의 자리를 더럽히는 자들도 많다.
오히려 세상 사람, 신앙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리로 간 이들이
눈보다 더 흰 거룩한 자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