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북부 및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주 근거지 흑수지역인 퉁구스계 고대 종족.
중국 주대(周代)의 역사서에 나오는 숙신(肅愼) 또는 식신(息愼), 한대(漢代)의 읍루(挹婁),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물길(勿吉)은 모두 말갈과 같은 계통의 종족에 대한 이칭으로 추정된다. 말갈이라는 종족명은 중국 수당시대(隋唐時代)의 문헌에 나오는 호칭으로 각기 부족별로 나뉘어 산과 계곡 사이에 거주하면서 수렵과 농경에 종사했다. 각 부족에는 대인(大人)으로 불리는 우두머리가 있어 부족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관하고 처리했다. 하천유역의 저습지에 살던 부족은 밭농사를 주로 했으며, 산악지대의 부족은 수렵을 주로 하고 농경을 부수적인 산업으로 삼았다. 곰·호랑이·이리 등의 동물을 토템으로 삼았으며 기후관계로 소 대신 말을 사용해 밭을 갈았다. 남만주 및 한반도 중북부 일대를 근거로 했던 예.맥계(濊貊係) 민족에 비해 사회발전단계 및 문화수준이 떨어져, 이들이 세운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을 받았다. 숙신으로 불리던 시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읍루로 불리던 시기에는 부여의 지배를 받다가 남만주를 근거지로 발흥한 고구려 강성해지면서 부여와 같이 고구려에 복속해 그 영향을 받았다. 숙신으로 불리던 시기부터 고시(楛矢)·석노(石砮)·각궁(角弓) 등이 특산물로 알려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활쏘기에 능하고 몸이 날래어 이들로 구성된 군사가 고구려의 대중국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의 수당시대에는 수십 개의 부족 가운데 7개의 부족이 강성해 말갈사회를 주도했다.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오늘날의 헤이룽 강[黑龍江]과 쑹화 강[松花江] 일대를 근거로 하여 세력을 떨치던 흑수부(黑水部)를 제외한 백똘[伯咄]·불열(拂涅)·호실(號室)·안거골(安車骨)·속말(粟末)·백산(白山) 등의 6부는 고구려의 직접 지배를 받거나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들의 일부가 본래의 부족적 자치생활로 돌아간 반면, 고구려화되었던 일부 부족은 이들이 고구려의 부흥에 협력할 것을 우려한 당에 의해 상당수의 고구려인들과 함께 요동의 영주(營州) 일대로 강제 이주당했다. 대조영(大祚榮) 이 고구려의 유민을 이끌고 고구려의 재건을 시도하자 이에 적극 협조해 발해건국의 주체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발해 멸망 이후에는 고구려·발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의 세력을 유지했던 흑수부를 포함한 모든 말갈족이 거란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들의 후신이 고려와 요(遼)의 변경을 침입하면서 그 문화적 영향을 받다가 뒤에 금(金)을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여진(女眞)이다. 여진족 가운데 고려와 송의 영향을 받아 농경화된 갈래를 숙여진(熟女眞), 수렵 위주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유지하던 부족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금을 세운 주체세력은 생여진이었다. 그뒤 이들은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淸)을 세운 만주족의 원류가 되었다.>여진
민감한 부부에까지 이슈화돼는 경우가 많다.
자처했기때문이 아닐가 한다.
고려 태조는 건국직후부터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두고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며 북방경영의 중심지로 삼고 의욕적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동북방면에서는 영흥까지 올라갔으며 서북방면에서는 청천강 하류까지 점령했다. 이에 따라 압록강 동쪽의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중부 이북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의 여러 부족과 국초부터 접촉이 잦았다. 달고도 그런 부족 중의 하나였다. 921년(태조 4) 2월 달고적(達姑賊) 171명이 등주(登州:안변)를 거쳐 신라를 치러 가다가 고려 장군 견권(堅權)의 공격을 받아 섬멸되었다. 그후 달고는 흑수(黑水)·철륵(鐵勒) 등의 부족과 함께 고려의 번방(藩邦)이 되었다. 936년 9월 왕건이 3군을 이끌고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군을 맞아 후삼국을 통일하는 최후의 전투를 치를 때 달고는 흑수·철륵 등의 부족과 함께 기병 9,5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또한 북방의 유금필이라는 왕건이 총예했던 장수로 신천출신으로 패수일대 살고있던 말갈족의 부족장격으로 건국초기부터
많은 전쟁에나가 큰공을 세우는데 그가나가는 전쟁마다 말갈족들이 자주 동원되는 점으로 보아 고려건국과 통일과정에
이들이 큰 지지 기반이 아니였나한다.
대조영과 말갈족도 부흥 운동초기부터 말갈족이 등장이 발해 건국의 추축 세력이고 말갈족 출신으로 오해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조영의 부는 걸걸중상으로 말갈식이름을 쓰다가 대걸중상 대중상 ,대조영 고구려식이름으로 변경한다
대조영과 사돈관계를 맺은 말갈추장 걸사비우는 영주탈출당시 당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속말갈인을 데리고 신성에서
이해고의 당추격군과 결사항전후 대부분의 말갈인과함꼐 전사한다. 걸사비우가 당군을 막아주는 동안 천해요새인
천문령에서 남은 말갈인과 고구려 유민등으로 천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당군을 대파하여 건국의 계기를 마련한다.
추모 성왕도 졸본지역에서 부여하고 전쟁시 식량부족으로 위험에처할때 읍루(말갈계부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적이있고
대조영과 왕건도 말갈인이 건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뿐만아니라 이성계도 쌍성총관부 부관시절부터 그의 충복들은 여진족이였다는점,금나라가 사대관계를 요구하며
고려를 침략당시 형제국임을 차처했고 청이 병자호란당시에도 같은 주장을 한바 있듯이 말갈족은 한민족 역사에서
밀접한관련이 있다.
이러한 말갈족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에 있어서나 중국사에 있어서나 동일하다. 만주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야만 종족으로서 일찌감치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주력 전투 세력으로 활용되었던 존재이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 유민 세력의 지배하에 발해를 구성하며 만주 일대에 자리 잡은 종족. 이게 바로 일반적인 말갈족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럼 말갈족을 역사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자
우리 사서에 있어서 말갈의 존재를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말갈의 존재는 고구려의 건국과 함께 이미 언급되고 있을 정도인데, 추모왕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후로는 백제와 신라측의 기사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 때의 말갈은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끊임없이 침입하는 침략세력이다.
중국측의 기록은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서의 말갈에 대한 인식은 물길의 후예라는 것인데, 물길 역시 존재 인식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만주 남동부에 걸쳐 존재하던 수렵 민족이라는게 흔한 설이지만, 공식적인 물길의 문서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건 6세기에 접어 들어서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과 때를 비슷하게 하여 말갈의 문서가 중국에 등장한다.
일단 국내의 기록을 살펴 봤을 때의 문제점 부터 살펴 보자. 가장 중요한건 백제와 신라의 기사이다. 백제와 신라의 기사에서 말갈은 끊임없이 북방을 침입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고대 국가 시기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괴롭힐 정도의 세력이라면 적지 않은 전투력을 가져야 정상이다. 일단 말갈은 상당한 수준의 전투 세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립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측 사서의 어디에도 말갈이 독자적인 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북방의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이라면 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백제와 신라의 북변은 현재 비정되고 있는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틀리지 않는 한 산악지대이며, 유목민족이 이동하며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군다나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도 말갈의 기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말갈이 독립세력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괴롭힐 정도의 독립적인 전투 세력이 남부에 근거하도록 놔둘리도 없을 뿐더러, 이 정도의 세력을 정벌을 했다면 당연히 정벌 기사가 고구려 기사에 등장해야만 정상이기 떄문이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측 사서에 등장하는 말갈이 공격군일 뿐이라는 점도 문제이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모두 압도할 정도로 강성함을 자랑했을 시기에도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침입한 기사가 등장하는데, 그 정도로 자신들의 북변을 괴롭히는 말갈을 치는 기사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즉, 말갈이 독립세력일 가능성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복속된 세력이라는게 가장 우세한 설이 될 것이다. 실제로도 가장 일반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복속된 세력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완전히 동화가 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네들의 풍습이나 복식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측 사서 어디에도 말갈의 전투 기사는 많이 찾아볼 수 있을지 몰라도 말갈의 풍습이나 복식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부분은 없다. 말갈은 전쟁시에만 등장하고 평화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복속 세력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인 셈이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말갈이 강력한 전투력를 가진 세력이라는 점이다. 사서에 나타나는 말갈은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끊임없이 괴롭힐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백제와 신라에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기 떄문이다. 이만한 수준의 전투 집단이 동화되지 않고 복속된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경우, 단 한건의 변란도 없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고구려의 기사 어디에도 말갈의 변란에 대한 기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말갈의 존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주종-복속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설사 강력한 체제를 이용하여 말갈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정도 수준의 전투 세력을 한건의 변란도 없이 복속시킬 정도의 통제 시스템이 있었다면 그에 대한 언급 역시 당연히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측 사서 어디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 만일 말갈이 일반적인 복속 세력이었고, 사서의 기록이 정상적이라면, 말갈은 그야말로 고구려에 어떤 불만도 없이 알아서 충성을 다했던 존재가 되는 셈이다.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말갈과 고구려 유민의 연합정권과 같은 발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우리는 흔히들 발해의 지배계층은 고구려 유민들이며, 말갈은 그 피지배 계층을 이뤘고 그 수는 말갈이 더 많다고 배워 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수가 더 많은 피지배 계층, 그것도 600년이 넘게 지배를 받아왔던 피지배 계층이 단 한건의 내란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말갈과 고구려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종-복속 관계를 쉽게 적용시킬 수가 없다. 사서의 기록만 본다면 말갈은 10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타 민족에게 맹목적적인 충성만을 바치는 바보 같은 종족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복속 관계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우리 사서에 등장하던 말갈은 고구려-백제의 멸망과 함께 기사에서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후는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발해의 피지배 계층으로 존재하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으로 이어져 금-청을 세우는 존재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중국측 사서에 말갈의 존재 인식이 제대로 되기 시작하는 시점도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 이후 부터이다.
정리하면, 말갈을 일반적으로 하나의 종족으로 인식하는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서의 기사들과 중국 사서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살펴볼때 말갈은 정상적인 종족이라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고구려 그 자체에 가깝다.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말갈의 복속을 언급한 이후, 단 한번도 말갈의 존재를 스스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백제와 신라의 북변을 그리도 끊임없이 괴롭히고, 중국 왕조들로 부터 고구려와의 전쟁시 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말갈병의 존재가 그 많은 고구려의 전쟁 기사나 비문의 기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고구려 내에서는 말갈과 고구려는 분리되어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단 한번의 변란 조차 일으키지 않았던 말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말갈에게 있어서나 고구려에 있어서나 말갈은 고구려 그 자체였던 셈이며, 말갈은 단지 백제나 신라, 그리고 중국의 왕조들에 있어서 최대의 적 가운데 하나였던 고구려를 비하하는 의미의 상징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마치 왜(倭)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황 인식 속에서 여진족의 나라인 금나라가 산해관을 넘은 후 단군의 제단에 제를 올리고 자신들의 역사인 금사(史)에 자신들의 뿌리를 고려로 기록하고 있는 점, 또 청나라가 황실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 자신들이 계림에서 왔으며, 선조들이 신라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밝힌 점들은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쩌면 말갈은 반도 중심의 사관으로 인해 반도 밖으로 밀려났다는 이유 만으로 우리 스스로 떨쳐버린 같은 겨레붙이 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첫댓글 정답을 찾은듯 합니다........
님의 글에 동의하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금이 세워질 당시도 신라말 고려초 신라마이태자의 후손과 그 무리들이 만주로 가 여진족의 세력을 규합해 금을 건국할때도 같은 혈연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말갈(여진)입장에선 항상 누군가 지배층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해 주길 기다리는 민족도 아니고...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서에 자신의 뿌리는 신라(고려)에서 온 김함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죠...그리고 요양의 많은 비들에서도 망한지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스스로 발해인라고 칭한 비들이 많습니다. 즉 말갈, 여진, 만주족은 우리와 형제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역사 스페셜에서 중국 역사학자의 인터뷰에서도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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