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여성만큼이나 성형과 미용에 관심이 높고 패션에 대한 시각 또한 발달했다. 특별히 ‘메트로섹슈얼’이란 단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여성 취향의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 ‘2005 봄ㆍ여름 서울컬렉션’에서 발표된 남성복을 통해 본 새로운 남성들의 스타일 이야기.
남성들은 전보다 아름다워진 외모를 운동과 미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꾸고, 쇼핑도 즐기게 됐다. 소재, 색상, 디자인에서는 분명 남성복이지만 여성들이 탐낼 정도로 우아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남성복에서 나오고 있다. 반드시 꽃무늬 셔츠를 입어야 신남성이 되는 건 아니다. 구태의연한 남성복의 공식을 따르기보다, 아니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주변과 엇비슷하게 입으려는 버릇을 버리고 내게 어울리는 외모를 만들어 간다면 박수 받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눈치 볼 일이 아니다.
메트로섹슈얼의 시작에는 새로운 남성상이 제시된다. 정치나 경제를 쥐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 대신 디자인, 음악, 미디어 분야 등에서 예술적 감성을 지닌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델이다. 이처럼 새로운 직업을 동경하는 남성들이 메트로섹슈얼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게이들의 독특한 패션으로 시작된 메트로섹슈얼. 그러나 메트로섹슈얼리스트들은 성적인 정체성이 분명하다. 근육질의 남성성과 감성적인 여성성이 모두 한 사람 안에 존재하나, ‘중성’의 이미지와는 구별된다. 주기적으로 미용실과 피부 관리실에 다니며 유행에도 민감해 직접 쇼핑에 다니는 것도 즐긴다. 집안꾸미기와 요리도 수준급. 헬스나 수영 등 운동은 필수다. 세련된 매너를 갖췄으며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영화, 문학, 미술, 예술에 대한 지식도 보통 이상이어야 한다.
컬렉션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여성복 패션 쇼임에도 남성 모델들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 고객의 시선을 잡기 위한 ‘구색 갖추기’ 정도를 뛰어 넘었다. 아예 남성복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려는 듯 여성복에 버금가는 남성복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또 최근 몇 년 남성복 디자이너의 새로운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신인 남성복 디자이너들의 약진은 패션계의 큰 사건이다. 패션계의 스타디자이너 정욱준, 오랜만에 패션 쇼를 참가해 건재함을 확인시킨 송지오, 남성복과 여성복을 넘나드는 홍승완, 단 두 번의 컬렉션 참가로 그 이름을 각인시킨 이주영 등이 남성복 디자이너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봄 메트로섹슈얼의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인 우영미, 한승수, 김서룡의 신작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아미를 강조한 리조트웨어
2005ㆍ봄여름 패션 경향은 리조트웨어, 단 한마디로 요약된다. 이국적인 휴양지로의 여행과 휴식을 떠올려야 한다. 리조트웨어의 유행을 알리고 있지만 알록달록한 꽃무늬 하와이언 셔츠에 반바지 차림 휴가복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휴가의 편안한 분위기는 가져가되, 간단한 야외 파티에 참석해도 좋을 정도의 예의 바른 옷차림이어야 한다.
장식이 많지 않은 부드럽고 깔끔한 흰색 정장, 자유분방한 프린트 티셔츠, 색의 조화가 경쾌한 줄무늬 니트웨어, 커다란 가방과 선글라스, 부드러운 밑창의 운동화와 조리 슬리퍼만 있으면 고급휴양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다. 참, 가느다란 줄무늬 넥타이도 잊지 말 것.
색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라
화려한 색은 여성복과 다름없었다. 깨끗한 흰색을 기본으로 선명한 노랑과 분홍,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빨강도 정장에 적용될 정도였다. 하늘빛의 청명한 파랑, 풀빛처럼 선명한 연두 등 자연을 닮은 색들이 휴식의 이미지를 주었고 노랑과 주황이 뒤섞인 로고플레이는 신선한 색 배합에 눈뜨게 했다. 회색에 노랑, 주황, 파랑, 연두 등 선명한 색이 끼어든 줄무늬나 프린트 원단도 옷차림에 생기를 더 했다.
화려한 프린트는 캐주얼웨어에 한정되지 않고 정장 수트에도 과감하게 적용됐다. 노란색, 분홍색, 연보라 등 여성적인 색이 정장 재킷에 사용되기도 했다. 광택이 많고 색감이 강한 보라색 수트(정욱준)나 鞭체봉?엿보이는 강렬한 빨간 면바지(홍은주), 옅은 노란 줄무늬 재킷(송지오), 무지개색 프린트 수트(홍승완)는 더 이상 남성복에 색의 제한은 없음을 증명했다.
겹쳐 입고 섞어 입어야 멋쟁이!
셔츠 안에 티셔츠, 셔츠 위에 브이넥 카디건과 니트를 입는 것은 기본. 정장 재킷, 턱시도 재?아래에 물 빠진 청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운동화. 정욱준은 모자가 달린 후드 티셔츠에 턱시도 재킷을 걸치기도 했고, 턱시도에 청바지를 덧입는 믹스&매치의 감각을 발휘했다. 또 점퍼에 정장 바지를 입고 정장 재킷 위에 점퍼를 걸치는 파격적인 코디네이션도 어색하지 않게 소화해냈다. 홍승완은 티셔츠를 길게 디자인해 마치 원피스를 레이어드해 입은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노출은 필수!
남성복에서도 노출은 필수 요소다. 열심히 운동해서 만든 멋진 몸을 보여준다는데 누가 거부하랴. 셔츠의 단추를 풀어 재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배꼽을 드러날 만큼 깊이 파인 V 네크라인 니트 카디건, 티셔츠도 가슴 근육이 보이게 커다란 라운드 네크라인을 그렸다. 마치 여성 한복 저고리처럼 조끼는 들썩 올라가 있었고 반바지는 허벅지가 드러났다. 몸에 착 달라붙는 니트나 속이 비치는 소재도 남성미를 풍겼다. 김규식의 쇼에서는 건장한 흑인 모델을 세워 그들의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변형된 수트와 조화시키기도 했다.
그대 이름은 소년! 연약해도 좋아라!
패션쇼의 꽃 모델. 모델의 스타일만 봐도 유행 경향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차승원 같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모델이 선호되었지만, 이제는 강동원처럼 모성을 자극하는 소년 같은 모델이 패션쇼 무대를 휘어 잡고 있다. 근육질은 사양, 중성적인 매끈한 몸매에 남성 모델이 선호되고 있는 것. 흰 피부에 생머리를 휘날리며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미소년들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성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장광효 쇼에 모델로 선 현빈과 17살 백성현이 새로운 남성상의 모델이 됐다.
패션계의 스타 정욱준 |
컬렉션 개최가 알려질 경우, 기자단을 포함한 관객들이 제일 먼저 스케줄을 확인하는 디자이너는?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손꼽는 디자이너는 바로 정욱준이다.
'론코스튬(Lone Costume)'의 디자이너 정욱준은 패션계의 스타다. 이번에도 그의 쇼를 보기 위해 평일 이른 시간에도 4,000석의 규모의 행사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채워졌고, 그가 피날레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환호성으로 행사장이 떠나갈 것 같았다. 말끔하고 세련된, 그리고 너무나 럭셔리한 도시 남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정욱준의 옷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매료시킨다.
드라마에서 그의 모델이 된 가수 비의 정장 차림을 떠올리면 정욱준 스타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성복 패션쇼에 아찔한 비키니 차림의 여성 모델을 단체로 등장시키거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술잔을 든 웨이트리스 여성 모델을 눈요기로 세우는 것을 두고 '호객 행위'라는 비평도 있지만 완성도 높은 쇼 연출 안에 약간의 장식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정욱준은 국내파다. 그 흔한 해외 유학길 한 번 안 올랐고, 국내 의류업체에서 실력으로 성장했다. 캐주얼의 성공한 브랜드로 꼽히는 '클럽모나코'와 청바지계의 신화 '닉스'의 디자이너 출신이며 자신의 브랜드를 이끌면서도 가죽 제품 전문 브랜드인 '루이까또즈', '소다', 진 브랜드인 '버커루' 등의 일부 디자인 라인을 담당하는 솜씨 좋은 상업 마인드를 갖추고 있다. 노골적이지 않은 상업성 말이다.
이번에는 론커스텀을 캐주얼 'L'라벨로 상품화 했다. 흰색과 줄무늬의 향연, 유니콘을 고유 무늬로 각인했다. 캐주얼하지만 왠지 격식이 느껴지는 귀족주의, 그의 쇼에는 분명히 찰나의 흥분감이 주사되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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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