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앓이’
1.4 후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봄이 왔다.
어머님께서 마당에 묻어 놓은 마늘쪽에서 어느 날 파란 새순이 뾰족하게 돋아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연약한 새순 속에서 아버님의 얼굴이 아른아른 아른거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가슴속 깊이에서 비명같은 신음소리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봄이 오면 죽은 듯 잠자던 자연만물이 온몸에 물이 오르고 새순이 돋고 새잎이 돋아 기지개를 켜고 소생하는데 왜 사람은 저처럼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자연에 대한 미움이 등골이 써늘해질 정도로 머리와 가슴을 꽉 메웠었다. 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후부터 봄이라는 계절이 싫고 아팠다. 모든 것이 소생하는 봄, 왜 아버님만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마음속 깊은 곳에 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할머님과 두 동생을 잃었다.
책상 앞에,
“오늘의 문제가 무엇이냐, 싸우는 것이다. 내일의 문제가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모든 날의 문제는 무엇이냐, 죽는 것이다.”
라는 명구를 써붙여 놓고 싸우고 이기고 하는 문제보다는 죽는다는 문제를 부둥켜 안고 가장 밝고 당당하고 예민한 사춘기와 젊은 날들을 죽음이라는 허무주의에 젖어 보냈던 것 같다.
어느 의미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마음 속 깊이에 괴어 더욱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아버님을 잃고 난 후의 나의 마음의 충격을 어린 동생들이 나처럼 느껴서는 안된다는 아주 강렬한 힘이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 무의식중 용틀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제일 맏이이고, 내 남동생들에게는 하나 뿐인 누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연에 대한 미움이다. 죽음에 대한 허무사상은 어디까지나 나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을 뿐 현실생활 속에서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삶의 분위기 속에서 지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가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 내가 느꼈던 아버지의 분위기를 집안에 살려 놓아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 같은 것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고나 할까.
내가 어렸을 때 본 아버님께서 벽에 걸어 놓으셨던 안중근 의사의 휘호 ‘인내’라는 글이 마음 속에 남아 그 두 글자를 써서 아까의 그 명구 옆에 붙여놓고 지냈다. 정녕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인내인 줄도 모르면서 참고 견디는 힘이라고만 믿고 조용히 참고 견디는 힘은 어머님을 통해 서서히 배우게 된 것이다.
봄이 오고 가는 동안 한차레씩, 때에 따라서는 몹시 괴로운 위통을 앓곤 하는데 의사인 큰아우가 진찰을 하고나서 약을 지어 주면 봄이 지나가면서 모르는 사이에 가라앉곤 한다. 신경성이라는 것이다.
신경성이란 마음의 병이란 뜻일 것이다. 스스로 짐작해 보면 예의 그 봄앓이에 해당하는 병일 것이다. 이름 붙여 봄앓이이지만 세상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와 같은 사연 한 가지 없는 이 없을 것이고 인생 자체가 드라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때로는 소설이나 연극이 무색한 드라마틱한 삶의 현장이 얼마나 많은가. 속앓이를 하면서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을 초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가늠하기가 민망할 때가 많았다.
지난 이산가족 찾기의 그 숱한 드라마 이상의 드라마 속에서 만남의 기쁨과 만남의 슬픔, 삼십 여년 간의 속앓이가 풀리는가 하면 그로 인해 더 깊은 속앓이의 상처를 받아야 하는 숨은 드라마도 얼마나 많겠는가.
어머님께서는 이산가족 찾기의 텔레비전ㅇ서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반기는 모습을 보시며 ‘살아서 헤어진 사람은 언제라도 다시 살아서 만나게 되는 법이란다.’라고 눈물을 머금은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유독 나만이 앓는 병이 아닌, 어머님과 우리 모두가 앓는 이 봄앓이는 약으로 치유될 수 없는 병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번뿐인 아르마운 삶을 아름으로 삭이고 달래며 사랑과 이해로 치료해 나가는 갈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경희 ; 1935년 서울 출생으로 시인이다.
1963년 한국일보 신록시에 박남수 추천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