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6부 2
“사실 말이지 이 담배라는 건!” 한 대 피우고 숨을 돌리면서 마침내 포르피리는 말문을 열었다. “해롭습니다, 정말 해로워요. 그런데도 끊을 수가 없군요! 기침이 나고, 목이 근질근질하고, 숨이 가빠집니다. 나는 겁이 많아서 요전에 B씨한테 진찰을 받으로 갔었습니다만, 그 사람은 환자 한 사람을 진찰하는 데 최소 한 30분은 걸립니다. 글쎄, 나를 바라보면서 껄껄 웃기까지 하더라니까요. 몸을 두드려보고 청진기를 대보기도 하더니....당신에겐 특히 담배가 해롭습니다, 양쪽 폐가 좋지 않아서,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디 끊을 수가 있습니까? 그 대신 할 게 있어야죠? 술도 못 마시니까 정말 곤란합니다. 헤, 헤, 헤, 못마시는 게 관란하단 말입니다! 세상만사는 모두 상대적인 겁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모든 게 상대적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또 요전처럼 관청식 수단을 쓰려는 건가?’ 라스콜니코프는 혐오를 느끼면서 생각했다. 지난번에 있었던 그들의 마지막 회견 광경이 별안간 그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이 파도처럼 그의 가슴에 밀려들었다.
”나는 그저께 저녁에도 한 번 들렀었어요. 모르셨나요?“하고 방을 둘러보면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방 안에까지, 이 방 안에까지 들어왔었죠. 오늘처럼 이 앞을 지나는 길에 한번 들러볼까 하는 생각이 나서요. 와보니 방문이 활짝 열려 있더군요. 그래서 방안을 살피며 잠시 기다려보다가, 하녀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문은 잠그지 않나요?“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질 뿐이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그의 마음 속을 환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실은 해명을 하려고 온 겁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해명을 하려고요! 나는 당신에게 해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는 웃으며 말을 잇고는 손바닥으로 라스콜니코프의 무릎을 살짝 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와 거의 같은 순간에 그의 얼굴은 심각하고 초조한 표정을 지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어딘지 한가닥 우수의 그늘조차 띤 것같이 보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거니와, 또 이 사내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전번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정말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었죠.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우리 사이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그때는.....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거죠! 그래서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당신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사실 그때 우리가 어떤 식으로 헤어졌습니까, 기억하십니까? 당신도 몹시 흥분해서 무릎을 덜덜 떨었고, 나도 역시 흥분해서 무릎을 덜덜 떨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는 어떻게 된 일인지 쌍방이 다 엉망이어서 둘 다 비신사적이었어요. 하지만 우린 역시 신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우린 신사니까요. 이건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디까지 갔었는지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야말로 예의고 뭐고 없었을 정도니까요.”
‘도대체 이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라스콜니코프는 얼굴을 번쩍 들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서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를 바라보며, 놀란 듯이 이렇게 자문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솔직히 얘기하는 편이 좋겠다고요.” 포르피리는 전번의 희생물을 자기의 시선으로 더는 당황케 하고 싶지도 않고, 또 전번과 같은 수법이나 잔재주를 쓰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약간 외면을 하고 눈을 내리뜨면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 그런 혐의나 장면은 오래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때는 미콜카가 나타나서 결말을 지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잖았다면 우리가 어디까지 갔을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내 사무실 칸막이 뒤에서는 그 저주스러운 상인 놈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일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긴 당신도 물론 아시겠죠. 그때 그자가 나중에 당신 집에 들른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당신이 예상했던 것 같은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도 그때는 아직 아무도 소환하지 않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까요.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느냐고요? 글쎄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요. 그때는 나 자신도 그런 여러 가지 일에 부딪쳐서, 이를테면 좀 어리둥절했거든요. 그저 문지기를 소환하도록 조치한 것이 고작이었으니까요, 당신도 아마 지나다가 문지기를 보셨겠죠? 그런데 그때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하여간 그때는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지금은 한쪽을 놓치더라도 그 대신 다른 쪽 꼬리를 잡을 테다, 적어도 내가 노린 것만은, 내가 노린 것만은 놓치지 않겠다....그런데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선천적으로 성미가 급하신 것 같아요. 당신의 성격과 감정의 여러 가지 근본적 특질을 고려한다면, 나도 그 일부는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만, 아무래도 정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야 물론 나는 그때도 사람이 좀 흥분했다고 해서 대번에 모든 비밀을 죄다 지껄여버리는 일은 그렇게 흔치 않다는 걸 판단하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 그야 물로 ㄴ사람이 참다못해 분통을 터뜨릴 때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매우 드문 일이니까요. 그건 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그저 심리적인 것이 아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 구체적인 사실ㄹ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나 반드시 무슨 구체적인 사실이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정말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때 나는 당신의 성격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무엇보다도 그 성격에 기대를 걸었단 말입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당신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는....무엇 때문에 지금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자기 질문의 뜻도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라스콜니코프는 가까스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내심으로 몹시 어리둥절했다.
’정말 나를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나?‘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느냐고요? 나는 해명을 하려고 왔으니까요. 이를테면 신성한 의무로 생각해서요.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죄다, 그때의 내 오해를 남김없이 죄다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을 몹시 괴롭혔으니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러나 나도 악인은 아닙니다.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여러 가지 사정에 시달리면서 고결하고 자부심 강하고 특히 성미가 급한 사람에게는 이런 괴로움을 계속 짊어지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일인가 하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여튼 나는 당신을 더없이 고결한 분으로서, 아니 그뿐만 아니라 지극히 관대한 소질을 지닌 분으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모든 신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의무로서 솔직하게, 충분한 성의를 가지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남을 속이는 걸 싫어하니까요. 나는 당신의 사람됨을 할고 나서 당신에게 애착을 느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은 아마 웃으실 테죠? 아니, 당신에겐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를 싫어하셨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요. 하긴 또 좋아하실 리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ㅣ 어떻게 생각하시든, 지금 나로서는 온갖 방법으로 여태까지의 인상을 지워버리고 내가 성의도 있고 양심도 있는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위엄 있게 말을 끊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 어떤 새로운 공포심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포르피리가 자기를 무죄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때 돌발적으로 일어난 전말을 일일이 순서대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학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히려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나 자ㅣ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또 어떻게 그런 상태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첫째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어떤 소문이며, 언제 누구의 입에서 나왔느냐....그리고 어떤 동기에서 당신에게까지 미치게 됐느냐 하는 것도 역시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나 개인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로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연 가운데 우연이어서,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겁니다. 그럼 대체 그건 어떤 우연이냐? 흠, 이것도 새삼스레 말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것이, 그런 소문과 우연히 그때 내 머릿속에서 부합되어 한 가지 생각을 낳게 했던 겁니다. 어차피 털어놓을 바에야 모든 걸 깨끗이 털어놓겠습니다만, 실은 그때 당신에게 혐의를 건 사람은 내가 맨 먼저였습니다. 그 저당물에 노파의 메모가 있었느니 뭐니 한다 해도, 그런 건 아무 쓸데도 없는 겁니다. 그런 건 몇백 가지라도 꼽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 마침 나는 그 경찰서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것도 물론 우연이죠. 그러나 우연이라고 해도, 지나는 길에 어쩌다 몇 마디 들은 것이 아니고 권위 있는 어느 특정인 한테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으면서도 그때의 장면을 놀랄 만큼 잘 기억하고 있더군요. 결국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자꾸 계속해서 겹쳐져 나갔던 겁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자, 그러니 어찌 그 방면으로 생각이 기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 마리 토끼로도 한 마리 말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백 가지 혐의도 결국 하나의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영국 속담 그대롭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있을 대나 그렇다는 말이지, 무슨 일에 골똘히 열중해 있을 때는 어림도 없는 이야깁니다. 예심판사도 역시 인간이니까요. 게다가 나는 당신의 논문을 상기했습니다. 처음 당신이 찾아오셨을 때 자세히 이야기하신 그 잡지의 논문 말입니다. 나는 그때 당신을 놀렸었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을 유혹해서 더 지껄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너무나 참을성이 없고 너무나 병적입니다. 당신은 대담하고, 자부심이 강하고, 진지하고, 그리고 ....감수성이 강합니다. 지나치게 강하단 말입니다. 그건 나도 훨씬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느낌은 내게 낯선 것이 아니어서, 당신의 논문만 해도 나는 일종의 친근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그런 논문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미칠 듯이 흥분되는 기분에서 착상되는 것입니다. 가슴이 뛰고 억눌린 흥분 속에서 쓰이는 것입니다. 이 억눌린 긍지에 찬 흥분은 젊은 사람에겐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나는 그때 당신을 놀리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대체로, 아니 문학 애호가로서 당신의 그 젊고 열렬한 최초의 습작을 몹시 사랑합니다. 그것은 연기입니다. 안개입니다, 안개 속에서 현(絃)이 울리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논문은 어디까지나 불합리하긴 합니다만, 말할 수 없는 성의가 엿보입니다. 젊디젊은 불굴의 긍지가 있습니다. 거기엔 절망적인 용기가 보입니다. 음산한 논문입니다만, 그런대로 멋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논문을 읽고 따로 간직해두었습니다....따로 간직해두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사나이는 결코 이대로 무사할 리 없다!‘ 자, 어떻습니까, 말씀해보세요.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어찌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에 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무리일까요! 나는 제멋대로 단정을 내리고 있는 걸까요?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이것뿐입니다. 도대체 생각할 게 뭐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다.....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그러나 이토록 일에 열중한다는 것은 예심판사인 나로서는 온당치 못한 짓이었습니다. 내 손안에 이미 미콜카가 들어와 있을뿐더러 구체적인 사실까지 드러나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그건 사실임에 틀림없었거든요! 이자도 역시 자기 나름의 심리적인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자도 방심해서는 안 되죠, 아무튼 생사가 걸린 문제니까요.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걸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건 다름아니라 당신이 그 양식과 이성으로 사태를 잘 양해해주시고, 그대의 내 간악한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긴 결코 간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정말입니다. 헤, 헤, 헤! 그래, 당신은 내가 그때 당신 집에 가택수색을 하러 오지 않은 줄 아십니까? 왔었습니다, 왔었어요, 헤, 헤! 당신이 여기 자리에 누워 계실 때 왔었죠. 정식으로도 아니고 나 개인으로서도 아니지만 하여튼 왔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집에 있는 것은, 증거가 없어지기 전에 조사해두려고 머리털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umsonst('허사’라는 뜻)였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사나이는 올 것이다. 자기 쪽에서 올 것이다, 머지않아 올 것이다, 만약 죄가 있다면 그땐 반드시 올 것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사나이는 꼭 올 것이다, 라고요. 그리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라주미힌이 여러 말을 떠들어 댄 것을? 그건 당신을 흥분시키려고 우리가 꾸민 일이고, 그가 당신에게 말하도록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겁니다. 아무튼 라주미힌은 그런 일로 분격하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사나이거든요. 그러나 자묘토프의 관심을 끈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분격과 그 개방적인 대담성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릿집 같은 데서 느닷없이 ‘내가 죽였다!’라고 뇌까리다니, 그건 너무나 불손하고 너무나 대담합니다. 그래서 나는 만약 이 사나이가 유죄라면 정말 무서운 적수다, 라고 생각했지요! 정말 그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길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자묘토프는 그때 당신에게 압도당하고 말았어요.....바로 여기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저주받을 심리적 농간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당신이 나타나시지 않았겠어요! 정말이지 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꼭 오셔야 할 이유라곤 없었거든요? 그리고 그 웃음,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때 들어오면서 낸 그 웃음소리, 나는 마치 유리창 너머로 보듯 모든 걸 환히 알아차렸습니다. 만약 그런 특수한 사정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겠습니다만. 그런 기분으로 있기란 참으로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 그때 라주미힌이....아, 참 그렇군! 돌, 돌, 기억하십니까? 장물을 숨겨두었다는 그 돌 말입니다! 나는 어느 채소밭에 있는 그 돌을 눈앞에 보는 듯했습니다. 채소밭이라는 것은 확실히 당신이 말씀하신 거죠, 자묘토프에게. 그리고 나한테도 또 한 번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그런데 그때 우리가 당신의 그 논문을 검토하기 시작하고 당신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 뒤에 딴말이 숨겨져 있는 듯이 이중으로 들렸습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기둥까지 이르러 거기다 이마를 부딪치고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아니,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마음만 먹으면 이런 것은 모두 최후의 한점에 이르기까지 반대되는 방향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게 아닌가, 오히려 그 편이 더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라고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단 말입니다. 정말 고민했습니다! ‘하다못해 털끝만한 증거라도 잡았으면!’하고 생각하던 중에 바로 그 초인종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고 부르르 몸을 떨기까지 했습니다. ‘자, 이게 바로 털끝만 한 증거다! 그렇다!’ 나는 그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았고요. 사실 그때 당신을 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1천 루블쯤 기꺼이 내던졌을 겁니다, 그 상인이 당신한테 직접 맞대 놓고 ‘살인자’라고 말했는데도 당신이 그 사나이와 100보쯤이나 나란히 걸어가면서 그동안 한마디도 그 사나이에게 물어볼 용기조차 없던 그때의 당신 얼굴이 보고 싶었습니다! .....어때요, 등골이 오싹해진 그 전율, 병중에 반쯤 열에 들뜬 채 잡아당긴 초인종....그러니까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때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짓궂게 장난을 쳤다 해도 별로 놀랄 건 없잖습니까? 그리고 왜 당신은 하필이면 그런 때 나한테 왔습니까? 마치 누군가가 당신을 떼밀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 안 그래요? 만약에 그때 미콜카가 우리를 떼어놓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그때의 그 미콜카를 기억하고 계시겠죠! 잘 기억하고 계시겠죠? 정말 그것은 청천벽력이었어요! 구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 번개의 화살이 번쩍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데 나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나는 그런 번개 따위는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 자신이 보신 대로입니다!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그 사나이가 몇 가지 점에서 사리에 맞는 답변을 시작하는 바람에 나도 좀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털끝만큼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건 내가 다이아몬드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죠. 어디 두고 보자! 미콜카 따위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말이야, 라고요.”
“라주미힌이 조금 전에 나한테 말하더군요. 당신은 지금도 니콜라이를 유죄라고 인정하고, 그걸 라주미힌한테 역설하셨다고요......”
라스콜니코프는 숨이 막혀서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상대편 속을 빤히 꿰뚫어 보듯이 형언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귀를 바싹 기울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자기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믿기가 두려웠고, 또 믿고 있지도 않았다. 아직도 양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대방의 말속을 열심히 더듬으며, 그는 더 정확하고 결정적인 것을 잡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라주미힌 씨 말인가요?” 지금까지 침묵만을 지키던 라스콜니코프의 질문이 자못 반갑다는 듯이 포르피리는 외쳤다. “헤, 헤, 헤! 라주미힌 씨는 그렇게 해서 옆으로 밀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둘이면 족한 일을 제삼자까지 끼울 필요는 없다는 거죠. 라주미힌이 참견할 일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은 국외자예요. 창백한 얼굴로 남의 집에 뛰어들기나 하는.....아니, 그 친구는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여기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미콜카 말입니다만, 그자가 어떤 사람이며, 즉 내가 그 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고 싶지 않습니까? 첫째, 그자는 아직 나이가 덜 찬 풋내기입니다. 그리고 겁쟁이랄 정도는 아니지만, 일종의 예술가 비슷한 친구죠. 아니, 정말입니다. 내가 그자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해서 웃진 마십시오. 순진하고, 무슨 일에나 감동하기 쉬운 사내지요. 감정이 풍부한 몽상가예요. 그 사나이는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얘길 시키면 다른 곳에서 일부러 들으러 올 만큼 잘한다는 겁니다. 학교도 좀 다녔고, 사소한 일에도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어대는가 하면,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술도 도락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어쩌다 술판에 끼게 되면 마시는 정도인데, 아직도 어린애 같은 친구죠. 그때 그는 절도를 하고서도 자기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루에 떨어진 걸 집었는데 뭐가 도둑이냐?’라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자가 라스콜니키(17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탈한 분리파교도)라는 걸 아십니까? 아니 분리파 교도까지는 아니지만, 무슨 다른 종파의 교도입니다. 그의 집안에는 베군파(분리파 교도의 일종, 원칙적으로 사제의 존재를 인정치 않음)가 있었으니까요. 그 자신도 최근까지 만 2년 동안이나 마을의 어느 장로 밑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더군요. 이런 이야기는 모두 미콜카 자신과, 그와 동향인 자라이스키 마을 사람한테서 들은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늘 황야로 가고 싶어 했다는 거예요! 여간 열심이 아니어서 밤마다 하느님에게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낡은 ‘성서’를 탐독 했답니다. 그런데 페테르부르크, 특히 여자와 술이 그에게 심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원래 감수성이 강한 사나인지라 곧 장로고 뭐고 다 잊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곳의 어느 화가가 그 사나이에게 호감을 느껴서 찾아다니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덜컥 겁을 집어먹고 목을 매고 죽는다느니, 도망을 쳐야겠다느니 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법률에 대한 우리 민중의 관념은 참으로 말이 아닙니다. 개중엔 ‘재판을 받는다’는 말만 들어도 겁먹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이건 누구의 죄입니까! 새로운 재판제도는 여기에 대해서 무슨 해답이 있을 겁니다. 제발 그래주길 바라죠! 자, 그건 그렇고, 정작 감방에 들어가니까 또다시 고마운 장로 생각이 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또 성경책이 나타났습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런 족속에게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고통을 받아야 한다’, 즉 고통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하물며 나라에서 내리는 고통이라면 더욱 좋다는 식이죠. 내가 이런 예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지극히 온순한 죄수가 만 1년이나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매일 밤 페치카 위에서 성서만 읽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탐독한 결과, 아무 일도 없는데 공연히 벽돌을 주워다가 나쁜 짓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은 간수장에게 그걸 내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던지는 방법이 걸작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두어 자쯤 옆으로 던졌단 말이에요! 하지만 상관에게 물건을 던진 죄수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고통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지금 미콜카가 ‘고난을 받으려’하고 있든가, 이니면 그와 비슷한 짓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사실에 입각해서 모든 걸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안다는 것을 본인이 모를 뿐이죠. 어떻습니까, 그런 민중 가운데 이런 공상가가 나온다는 걸 당신은 부정하십니까? 천만에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어요. 거기다가 또 그 장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특히 목을 매려 했던 뒤부터는 장로 생각이 더욱 절실했겠죠. 그러나 이제 곧 제 발로 와서 나한테 모든 걸 자백할 겁니다. 당신은 그자가 끝까지 버티어낼 것 같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이제 곧 손을 들고 말 테니! 나는 그자가 자기 진술을 부정하러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 미콜카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한번 철저히 연구해볼 작정입니다. 그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헤, 헤, 헤! 그자는 어떤 점에 대해서는 무척 조리 있게 답변을 했습니다. 아마 필요한 정보를 얻어서 제법 잘 준비를 했던가 봐요. 그런데 그 밖의 점에 대해서는 물구덩이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도 아는 게 없어요. 게다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자신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건 절대 미콜카 짓이 아닙니다! 이건 환상적인 음산한 사건입니다, 현대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마비되고, 피로 ‘싹 슬어버린다’는 말이 도처에 인용되며, 안락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산물입니다. 이건 탁상공론이고, 논리적으로 자극받은 마음의 산물입니다. 거기에는 첫걸음을 내디딘 의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성질의 결의입니다, 마치 산 위에서 몸을 던진다거나 종루에서 껑충 뛰어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에 범죄를 결행하는 마당에서도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는 것조차 잊었으면서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죽였습니다. 이론에 의거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이긴 죽였지만 돈은 가지고 나오지도 못하고, 성급히 가지고 나온 것은 돌 밑에 감추어버렸습니다. 더욱이 문 뒤에 숨어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초인종을 울리기도 했는데, 그때의 고통만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그 후 열병을 앓으면서도 또다시 초인종 소리를 상기하려고, 등골을 스친 그 오한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욕망에서 그 빈집을 찾아갔습니다.....그러나 그건 병의 탓으로 돌리더라도, 이건 또 어떻게 된 겁니까....그는 사람을 죽여놓고도 자길 결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면서 창백한 천사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에요. 아니, 이건 미콜카 따위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건 미콜카의 짓이 아닙니다!”
이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늘어놓은, 부정하는 듯한 말쿠의 연속으로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마치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온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럼....대체....누가....죽였다는 겁니까?”
그는 참다못해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물었다. 포르피리는 뜻하지 않은 질문에 놀란 듯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기까지 했다.
“누가 죽였느냐고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그건 당신이지 누구겠습니까,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이 죽였습니다.”
그는 완전히 자신에 찬 음성으로 거의 속삭이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몇 초 동안 그냥 버티고 서 있다고, 한마디 말도 업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느다란 경련이 갑자기 그의 안면을 스쳐 갔다.
“입술이 또 그때처럼 떨리는군요.” 마치 동정하는 듯한 어조로 포르피리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내 말을 잘못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는 다시 덧붙였다.
“그러기에 그렇게 깜짝 놀라셨겠죠. 내가 오늘 방문한 것은, 모든 걸 죄다 말하고 일을 분명히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켜서 놀란 어린애처럼 라스콜니코프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당신입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이에요. 다른 사람일 수 없어요.” 자신에 찬 엄격한 음성으로 포르피리는 속삭였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이상할 만큼 길게 거의 10분이나 이어졌다. 라스콜니코프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괴고 말없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거렸고,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는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멸시하는 듯한 눈으로 포르피리를 쳐다보았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또 그 낡은 수법이군요! 이건 당신의 그 상토적인 수법이에요! 그래도 아직 싫증이 안 나는가 보죠.”
“그런 말 마세요, 지금 내 처지에 수법이 다 뭡니까! 그야 이 자리에 증인이라도 있다면 별 문제지만, 우선 지금은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보시다시피 나는 토끼를 몰아 잡듯이 당신을 잡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백하시든 말든 지금 여기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아무 말 안 하시더라도 나는 속으로 학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뭐 하러 오셨습니까!”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초조하게 물었다. “다시의 전의 질문을 되풀이하겠습니다만, 만약 나를 유죄라고 인정한다면 왜 구속하지 않으시죠?”
“아, 그 문제 말입니까! 좋습니다, 요점을 추려서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당신을 그렇게 성급히 체포하는 건 나한테 불리하기 때문이죠.”
“왜 불리합니까! 만약 당신에게 그런 확신이 이;ㅆ다면 의당 그러헥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아니, 내 확신이란 게 뭡니까? 아직은 내 공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그런 데다 편안히 쉬게 해서 뭘 하겠습니까? 당신은 스스로 그걸 요구하고 계실 정도니까, 잘 아실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을 그 상인하고 대질시키더라도 당신은 이렇게 말하실 테죠. ’자넨 취했는가 보군? 내가 자네와 같이 있는 걸 누가 봤나? 나는 다만 자넬 주정뱅이로만 알아왔어, 게다가 사실 자넨 취했었잖냐 말이야.‘ 자, 이렇게 나오면 난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 좋습니까. 더욱이 그자가 하는 말보다는 당신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게 들릴 테니 말입니다. 그자의 진술은 심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 이건 그런 상판을 한 친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 당신 쪽은 그야말로 급소를 찌르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자는 고주망태로 유명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이미 몇 번이나 고백했듯이, 심리라는 것에는 양쪽에 꼬리가 있고 두 번쩨 꼬리가 더 크고 더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다가 아직도 나로서는 그것 말고 당신에 대한 반증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당신을 수감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걸 미리 당신에게 설명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거죠. 상식적인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당신에게 솔직히, 이것 역시 보통 방법은 아닙니다만, 이런 짓을 하는 건 나한테 불리하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온 두 번째 이유는......”
“그래, 두 번째 이유는?” 라스콜니코프는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 당신에게 해명을 해드리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악인으로 생각하시는 걸 원치 않습니다. 더욱이 믿으시든 안 믿으시든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갖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세 번째로, 깨끗이 자수하라고, 솔직하고도 기탄없는 권고를 드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유리한지 모르며, 또 나를 위해서도 훨씬 유리한 겁니다. 아무튼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 셈이니까요. 자,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나로서는 솔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잖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보세요,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당신은 자기 입으로 심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역시 수학적인 계산까지 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만약 당신이 잘못 생각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잘못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털끝만 한 증거는 쥐고 있으니까요. 그 털끝만 한 걸 나는 그때 발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겁니다!”
“털끝만 한 것이라니?”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하여튼 이제는 더 시간을 끌 권리가 없으니까 수감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나한텐 어차피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다만 당신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렇게 하시는 편이 당신을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는 증오에 넘친 웃음을 흘렸다.
“이쯤 되면 웃어넘길 수도 없군요. 뻔뻔스럽다고 해야 할 지경입니다. 설사 내가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시인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만, 당신 자신이 이미 나를 수감하여 편히 쉬겠다고 말하시는데 내 편에서 일부러 자수하고 나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아아, 로지온 로마느이치,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편안히 쉬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건 다만 이론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나 자신의 이론일 뿐입니다. 나 같은 게 당신 앞에서 무슨 권위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나는 지금도 당신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라고 해서 모든 걸 당신한테 남김없이 털어놓아야 한다는 법은 없거든요, 헤, 헤! 다음엔 당신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하는 문젭니다. 그 결과로서 당신이 얼마나 감형을 받게 될지, 그건 당신도 아시겠죠? 당신의 자수가 어느 때 어떤 순간에 행해지는가, 그 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다른 사나이가 죄를 도맡아서 사건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때가 아니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자수가 완전히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법정에서‘ 잘 꾸며드리겠습니다. 그런 심리주의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당신에 대한 혐의도 모두 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범죄도 일종의 정신적 혼미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기는 정직하게 말해서 혼미인 것만은 사실이니까요. 나는 정직한 인간입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침울하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다시금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얌전하고 서글펐다.
“아니, 필요없습니다!” 이미 포르피리에겐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그럴 가치가 없어요! 나는 구태여 당신들한테서 감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염려하던 건!” 포르피리는 거의 정신없이 열띤 어조로 외쳤다. “바로 그걸 나는 두려워했습니다. 감형 같은 건 필요없다고 나올까 봐서요.”
라스콜니코프는 침울한 눈으로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생명을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하고 포르피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직도 앞날이 창창하니까요. 감형이 필요 없다니, 어째서 필요 없다는 거죠! 당신은 정말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군요.”
“앞날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인생이 있죠! 도대체 당신은 예언자입니까, 뭡니까.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라는 말을 아시겠지요. 아마 하느님도 그 점을 당신에게 기대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요, 쇠사슬도 말입니다......”
“감형이 있으니까요.......” 라스콜니코프는 웃었다.
“뭡니까, 당신은 부르주아적인 치욕을 꺼리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것을 꺼리면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가 보군요. 그러니까 아직 젊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걸 무서워하거나 자수를 부끄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쳇, 듣기도 싫소!” 라스콜니코프는 입도 놀리기 싫다는 듯이 혐오에 찬 얼굴로 멸시하듯 속삭였다. 그는 어디로 나가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켰으나, 이내 절망의 빛을 띠며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뭐요, 듣기도 싫다고요?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남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아부라도 하는 걸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인생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세상일은 얼마나 많이 아십니까? 당신은 하나의 이론을 생각해냈지만,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너무나 평범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부끄러워진 겁니다! 결과가 비열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혀 가망성 없는 비열한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비열한은 아닙니다! 적어도 당신은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현혹함이 없이 대번에 최후의 기둥에 부딪쳤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아십니까? 내가 보기에 당신은 만일 신앙이나 신 같은 걸 발견하기만 하면, 창자를 찢긴다 하더라도 꿋꿋이 서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그것을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이미 오래전에 공기를 일변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니, 고통도 좋긴 하죠. 고통을 받으십시오. 어쩌면 고통을 받고 싶어 하는 미콜카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당신이 믿기는 어려우리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듯이 너무 재주를 부릴 생각은 마시고 곧장 생활에 뛰어드십시오. 걱정할 건 없어요, 바로 강변으로 끌어올려서 땅 위에 세워드릴 테니까. 어떤 강변이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아직도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는 것만을 믿고 있을 뿐이죠. 당신이 지금 내 말을 무슨 상투적인 설교같이 생각하리라는 건 나도 압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상기하게 될 테고 도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당신이 노파를 죽이는 정도로 끝난 건 그래도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무슨 다른 이론을 생각해냈더라면, 그야말로 몇억 배나 더 추악한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을 지켜주시는지 그건 당신도 모릅니다. 당신은 큰마음을 가지고 좀 더 대담해지십시오. 눈앞에 다다른 위대한 실천을 당신은 두려워하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걸 다 두려워하다니, 그야말로 수치스럽습니다. 일단 그렇게 걸음을 내대딘 이상 좀 더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이건 이미 정의의 문제니까요. 자, 정의가 요구하는 걸 실행하십시오. 당신에게 신앙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문제없습니다. 인생이 당신을 이끌어줄 테니까요. 그리고 끝내는 인생이라는 걸 좋아하게 될 겁니다. 지금 당신에겐 공기가 부족할 뿐입니다, 공기가, 공기가!”
라스콜니코프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도대체 당신은 뭡니까!”하고 그는 외쳤다.
“당신은 예언자라도 됩니까? 왜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며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그 잘난 예언을 하는 겁니까?”
“내가 뭐냐고요? 나는 이미 끝장을 본 인간입니다.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야 감정도 있고, 동정심도 있고, 게다가 다소 지식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젠 끝장을 본 인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생명을 마련해주셨으니까요. 하긴 당신의 경우도 연기처럼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인간의 다른 부류로 옮겨진다고 해서,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설마 당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안일한 생활에 미련을 갖진 않으시겠죠? 또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당신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대체 어쨌단 말입니까? 문제는 시간에 있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 속에 있습니다. 태양이 되십시오. 그러면 만인이 당신을 우러러볼 겁니다! 태양은 어디까지나 태양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왜 또 웃으십니까? 내가 실러 같은 소리를 하기 때문입니까?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만, 당신은 필시 내가 지금 당신에게 아부를 한다고 생각하시겠죠! 아니, 어쩌면 정말 아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헤, 헤, 헤! 하지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내 말 같은 건 믿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절대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것이 나의 악벽이니 하는 수 없죠. 그런데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만, 내가 얼마나 비굴한 인간이고 또 얼마나 정직한 인간인지는 당신 자신이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겁니다!”
“당신은 언제 나를 체포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 하루 반이나 이틀쯤은 산책할 수 있게 해드리죠. 잘 생각하시고, 하느님께 기도나 올려두십시오. 그 편이 더 유리해요, 암, 유리하고 말고요.”
“하지만 내가 도망친다면?” 이상하게 히죽거리면서 라스콜니코프가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당신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농부라면 도망치겠죠. 요즈음 유행하는 이단자라면 달아나겠지요, 남의 사상의 추종자라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패는 해군 소위 드이르카처럼 손가락 끝을 조금 보이기만 해도 아무거나 이쪽이 원하는 대로 한평생 믿게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이론도 믿지 않는데 갖고 달아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도망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도망생활이란 지긋지긋하게 괴로운 법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생활입니다. 안정된 환경, 거기에 알맞은 공기가 필요합니다. 어때요, 거기에 당신의 공기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도망치더라도 제 발로 되돌아옵니다. 당신은 우리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만약 내가 당신을 감옥에 가둔다면....한 달이나 두 달이나 석 달쯤 지나는 사이에 당신은 문득 내 말을 상기하고 스스로 자백하러 올 겁니다. 자기도 모를 정도로 뜻밖에 말입니다. 설마 자기가 자백하러 가리라고는 한 시간 전만 해도 모를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당신은 반드시 ‘고난을 받으려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금은 내 말을 믿지 않으시지만 자연히 그렇게 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로지온 로마느이치, 고통이란 위대한 것이니까요. 내가 이렇게 살이 쪘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실 것까진 없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발 웃지는 마십시오. 고통 속에는 이념이 있습니다. 미콜카의 말이 맞아요. 아니, 당신은 도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었다. 포르피리도 따라 일어났다.
”산책이라도 하시렵니까? 오늘 밤은 날씨가 좋을 겁니다. 소나기만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오는 것도 괜찮겠죠. 공기를 깨끗이 해주니까......“
그도 역시 모자를 집어 들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제발 엉뚱한 생각은 말아주십시오.“ 거칠게 달라붙는 듯한 어조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내가 지금 자백한 건 아니니까요. 당신이 너무 이상한 사람이라 다만 호기심으로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당신에게 자백하지 않았습니다....이 점을 잘 기억해주십시오.“
”아니, 그건 잘 압니다, 기억해두죠. 그런데 왜 그렇게 떠십니까! 걱정하실 건 없어요, 당신 뜻대로 될 테니까요. 산책을 좀 하시는 것도 좋겠죠. 그러나 너무 오랜 산책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을 위해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는 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에, 만일의 경우 -이런 건 나도 믿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 하여튼 만약의 경우 앞으로 40 내지 50시간 안에 무언가 다른 엉뚱한 방법으로 이 사건을 처리해버리려는 생각이 당신 머리에 떠오르면, 즉 스스로 자기 몸에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예상이니 용서하십시오 - 그대는....간단해도 좋으니 요령 있게 쓴 메모 같은 걸 남겨두고 가십시오. 그저 두어 줄, 한두 마디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 돌 이야기도 써주십시오, 그게 더 고상하니까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훌륭한 사색과 현명한 행동을 하시길 빕니다.“
포르피리는 되도록 라스콜니코프를 보지 않으려는 듯이 이상하게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창가로 다가가 속으로 시간을 재면서, 포르피리가 밖으로 나가서 멀리 사라지기만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조바심을 떨며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자기도 황급히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