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가수.
대만, 홍콩, 마카오, 일본[3], 중국[4]까지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물론 화교가 많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으며 '아시아의 가희(歌姬)'라고 불렸다.
생전 음반 판매량은 공식적으로는 2200만 장이나 해적판까지 포함하면 무려 2억 장이다.
진숙화와 함께 대만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여자 가수 중 하나다. 소위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에 딱 맞는 청아한 미성과 간드러지는 소프라노 음색으로 유명했다. 원래 중국 전통가요는 남자든 여자든 맑고 서정적인 음색과 가사를 선호한다.
등려군의 대한민국 내 인지도는 중화권이나 일본 등 타 동북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상당히 낮다. 그래도 '야래향(夜來香, 예라이샹)',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위에량따이뱌오워디신)', '첨밀밀'(甜蜜蜜, 톈미미)' 등 그녀의 노래는 드라마 OST 등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다수가 알 만큼 노래는 유명하지만 정작 가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은 특이한 경우다. 어찌보면 당연한 게 이 노래들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녀의 노래를 한국에 알리는 데 공을 세운 홍콩 영화 첨밀밀도 홍콩에선 1996년, 한국에선 1997년에 개봉되었는데 역시 사후 개봉된 작품이며, 영화 첨밀밀에서 등려군의 사망이 보도되는 장면이 있다. '테레사 텡(Teresa Teng)'과 등려군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이름
본명은 덩리윈(鄧麗筠, 등려균)이지만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덩리쥔(鄧麗君, 등려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이 이름을 활동할 때 썼다. 중국어에서 筠[yún, 윈]과 君[jūn, 쥔]은 본래 발음이 다르지만 예외적으로 筠이 지명/인명에 쓰일 때는 [jūn, 쥔]으로 읽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쓰촨성의 筠連縣(Jūnlián Xiàn)은 쥔롄현으로 읽는다. 중국에서는 발음이 같은 글자로 애칭을 많이 붙여 주는데 이를 그대로 예명으로 쓴 것이다. 원래는 한국식으로 읽을 땐 일반적으로는 이름에 두음법칙이 적용된 등여군이 되어야 하지만 관습적으로 등려군으로 굳어졌다.
영어 이름은 Teresa Teng으로, 이 이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테레사 텐(テレサ・テン)'으로 계속 불렸다. 이 영문 이름 테레사는 그녀 자신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던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데뷔 전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현 바오중향에서 출생했다. 양친 모두 중국 출신의 외성인으로 부친은 허베이성 한단시, 모친은 산둥성 타이안시 출신이다. 부친은 국민혁명군의 장교로, 국부천대 당시 대만으로 후퇴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왔다. 부친의 영향인지 군 위문공연에 열심히 활동했고 대만에서는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아직도 중화민국 국군에서는 등려군이 인기다. 인기투표에서 늘 1등을 한다.
사실 등려군과 군대와의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는데 아버지도 군인이었지만 그의 셋째 오빠도 아버지를 따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군인의 길을 걸었고 그녀가 첫 노래를 한 장소도 군대였다.
데뷔
1967년 14세의 나이에 첫 스튜디오 앨범인 <鳳陽花鼓>가 발매되었고 대만의 인기 드라마인 '징징(晶晶)'의 주제가인 '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아일견니취소, 我一見你就笑)'[15]를 불렀으며 이후 5년 정도 대만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73년에는 홍콩에서 만난 '토라스 레코드(トーラスレコード)'의 사장 후나키 미노루(舟木稔)를 만나 일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 활동
1974년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취입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곧 엔카 계열로 전환하여 '공항(空港くうこう)'을 취입했고 대히트하여 당시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으며 일본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더 드리프터즈의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도 이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 추방당했는데 급히 일본에 가야 해서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가 만들어 준 여권을 사용했다고 한다.
1984년까지 미국,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시장에 재입성했는데 '속죄(償還つぐない)', '애인(愛人あいじん)'이 각각 150여만 매, 1986년에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가 200여만 매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해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 최초의 동서(東西) 유선 대상 3해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85년 12월에는 생전 마지막이 되는 솔로 콘서트를 NHK홀에서 진행하였으며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 이후 일본의 음악방송에서 조용필과도 합동무대를 펼친 적도 있었다.
1987년 이후 일본에서 그다지 활동하지 않다가 1994년 11월 NHK '가요 자선콘서트(歌謡チャリティーコンサート)'에 출연하였다.
1995년 취입할 예정이던 '잊지마(忘れないで, Time to Say Goodbye)'는 그녀의 사망으로 취입되지 않았다가 2001년 일본 가수 幸治에 의해 추도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활동
대만 출신이라서 대만 및 홍콩, 마카오 등 중화권 지역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화교가 많은 동남아시아에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1979년 위조 여권 사용으로 일본에서 추방된 후 대만 여권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녀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만주국에서 활동한 야마구치 요시코(이향란)의 노래들을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렇게 유명해진 곡들로는 '夜來香(야래향/예라이샹)', '三年(삼년/싼녠)' 등이 있다.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 여권 사건으로 대만 내부에서 호된 비난을 받은 후 1980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중화민국 국군 위문공연에 출연했다. 당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침체된 국내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기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간단히 말해 '대만판 군통령' 역할을 했던 셈. 덕분에 대만 내부 인기도 회복하고 정부 표창도 받았다. 1980년대에는 중국과 인접한 진먼다오를 방문하여 중국 본토를 향해 심리전 방송을 하기도 했다.
놀랍진 않지만 중국은 1983년까지 등려군의 곡을 청년들의 사상을 오염시키는 불온 음악, 30년대 퇴폐 데카당스풍에 찌든 정신적인 공해라는 명목으로 금지했다. 명목상으로는 양안관계가 해소된 1987년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금지했는데 형식적인 금지였을 뿐이다. 다들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다녔고 심지어 단속하는 공안원들도 등려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등려군 노래의 열렬한 팬 가운데는 나중에 중국의 주석이 된 인물도 있었다. 불법복제한 녹음테이프가 다 늘어져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었다고 했다. 참고로 시진핑과 등려군은 똑같이 1953년생으로, 동갑이다. 다만 조치가 좀 왔다갔다 했는데 1986년의 대규모 학생시위 이후 후야오방이 실각하면서 등려군 음악에 단속이 강화되기도 했다.
그만큼 등려군의 인기는 엄청났고 그녀의 노래들을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오히려 그녀의 곡들을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등려군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낮은 덩샤오핑이 지배하고, 밤은 등려군이 지배한다" 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여기에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좌파왕'이라고 불리면서 개혁개방에 반대하던 보수주의자 덩리췬을 합쳐서 세 명의 덩씨가 중국인들의 사상을 지배한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금지조치가 철회되면서 중국 측은 1984년 하반기부터 등려군의 본토 방문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5년 1월에는 싱가포르를 방문한 등려군을 관영매체인 공청단 기관지 중국청년보 기자들이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 등려군이 본토에서도 공연하고 싶다고 한마디 했다가 대만인의 방중이 허용되지 않던 시기상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등려군의 가족들은 등려군이 싱가포르가 아니라 도쿄에 있었으며 이는 공산당의 날조라고 반박했다.
등려군의 인기가 통제 불가능인 걸 인식한 덩샤오핑은 아예 등려군을 포섭하여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등려군을 중국 본토에 불러들여 살게 하려고 했는데, 등려군은 공산주의 체제를 싫어하여 거부하면서 결렬되었다고 한다. 등려군은 본토 방중 콘서트도 거절했다. 어쨌거나 1987년에는 등려군의 방중이 법적으로 허용되었고 중국에서 등려군 가곡집도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금지곡이었던 등려군의 노래였지만 상기했듯 현실은 높은 인기를 얻어 금지곡이었음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듣고 있었다. 다만 중국 공연을 추진할 때쯤 터진 천안문 6.4 항쟁 때문에 더 이상 추진이 어려워졌다. 1989년 천안문의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열린 홍콩의 콘서트였던 민주가성헌중화(民主歌聲獻中華)에도 전격적으로 참석했다.
당시 매염방, 장학우, 성룡 등 내로라는 중화권 연예인들이 참여하고 홍콩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호왈 백만의 군중이 몰린 이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였는데 대만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최 측에 전화하여 왜 자신은 초대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주최 측에 참여를 요청하여 급히 홍콩으로 와서 63번째 공연자로 참석해 우리의 집은 산 너머에 있다(我的家在山的那一邊/워더지아짜이샨더나이볜)를 불렀다.
아래는 당시 콘서트 영상이다. 등려군의 광동어식 발음인 탕라이콴(Tang Lai Kwan)시우제(小姐)라고 소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해당 영상인데 머리띠를 한 젊은 여성이 등려군이다. 광동어를 쓰는 홍콩인들 사이에서 혼자 표준 중국어로 연설해서 금방 눈에 띈다. 단아한 평소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투사같은 모습인데 등려군은 생전 반공 성향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1987년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이후로는 홍콩 및 대만에서 간간이 활동하다가 이후 약혼자가 거주하던 프랑스의 파리로 거주지를 옮겨 동거했다.
등려군 노래는 이때쯤 중화권을 이미 넘어서 동남아시아를 주축으로 화교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및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자주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