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회] 정론정신 회복, 반군정 투쟁 벌여
장준하 평전/[12장] 제2공화국 참여와 반군정투쟁 2008/12/28 10:41 김삼웅<사상계>의 일탈은 오래가지 않았다.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고 대 군정 포문을 열었다. 장준하의 본령으로 돌아온 셈이다. 권두논설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실었다. 함석헌은 모든 정치인ㆍ언론ㆍ지식인ㆍ종교인이 침묵하고 있을 때 5.16에 대놓고 할 말을 했다. 이 글은 많이 알려진 까닭에 여기서는 한 구절만 뽑는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 칼 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 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13)
장준하는 기명 권두언 '자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 재건의 엄숙한 공약을 내걸고 5.16혁명 정권이 이 나라의 국정을 담당한 지도 이제 만 2개월을 산하게 되었다. 혁명 정권은 초기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혁명과업 수행의 원칙과 구체적 대책을 수립함에 과감했으며, 목전의 부정과 부패, 사회악을 소탕하는 데도 또한 신속했다. …이제 혁명정책의 틀이 잡히고, 정부가 재조직되고 정권 자체가 공고화함으로써 과도기는 지나가고 혁명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 단계 역시 첫 단계와 마찬가지로 최단시일 내에 급속히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이다. … 이 단계를 원활하게 신속하게 통과함으로써,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인 민주주의 복귀의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5.16혁명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민족적 이상에서 볼 때 4.19 혁명의 과업을 군사정권이 과감하게 수행한다는 점에서 5.16혁명의 긍정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공산 제국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다.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공포 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선용에서 구해야 한다. (주석 14)
장준하는 초기에 5.16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 반대의 입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민족적 이상에서 볼 때 4.19혁명의 과업을 군사정권이 과감하게 수행한다는 점에 5.16혁명의 긍정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뒷날 ‘반민족, 반민주’로 규탄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의 인식변화가 5.16의 주체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라는 점을 알고 달라진 것인지, 처음부터 그랬는지의 여부는 입증할 자료를 찾기 어렵다.
장준하는 자신도 민주당 정부의 주요 포스트에 참여하고서도 민주당정부를 매섭게 비판했다. 민주당정부 9개월도 안돼 내분, 친일파관료 등용, 공산당의 위협에 대한 미온적 대처, 민생도탄 등으로 국민을 배신하여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고 9월호의 기명 '권두언'에서 썼다.
한편 4.19이후 90퍼센트 이상의 득표라는 국민의 절대 지지의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후계 정권담당자로 임하였던 민주당은 분열과 내분을 거듭함으로써 국민에게 배신하여 그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뿐 더러 일제 관료 출신들과 친일경향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 지도집단의 영도에 반발하는 세력을 억누를 만한 명분이 없어 이리 부닥기고 저리 이끌려 갈팡질팡 하는 동안 민생은 더욱 심한 도탄에 빠지고 백성의 불안은 날로 더하고 이에 틈을 탄 공산도당들의 마수는 나라 전역에 뻗쳐 국가를 위태롭게 할 제 5.16이라는 군사혁명을 다시 맞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잊을 수 없던 것은 이같은 모든 도덕적 근거와 명분을 잃은 민주당이니 그 허무한 몰락에 전 국민의 시선은 너무도 냉랭하였던 일이다. (주석 15)
주석
13) <사상계>, 1961년 7월호, 37쪽.
14) 앞의 책, 34~35쪽.
15) <사상계>, 1961년 9월호 권두언, '작금의 추세에 붙이는 몇마디', 34쪽.
7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회복하고 대 군정 포문을 열었다. 장준하의 본령으로 돌아온 셈이다. 권두논설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실었다. 함석헌은 모든 정치인ㆍ언론ㆍ지식인ㆍ종교인이 침묵하고 있을 때 5.16에 대놓고 할 말을 했다. 이 글은 많이 알려진 까닭에 여기서는 한 구절만 뽑는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인 아니다. 의사 온 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 칼 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 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주석 13)
장준하는 기명 권두언 '자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 재건의 엄숙한 공약을 내걸고 5.16혁명 정권이 이 나라의 국정을 담당한 지도 이제 만 2개월을 산하게 되었다. 혁명 정권은 초기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혁명과업 수행의 원칙과 구체적 대책을 수립함에 과감했으며, 목전의 부정과 부패, 사회악을 소탕하는 데도 또한 신속했다. …이제 혁명정책의 틀이 잡히고, 정부가 재조직되고 정권 자체가 공고화함으로써 과도기는 지나가고 혁명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 단계 역시 첫 단계와 마찬가지로 최단시일 내에 급속히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이다. … 이 단계를 원활하게 신속하게 통과함으로써,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인 민주주의 복귀의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5.16혁명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민족적 이상에서 볼 때 4.19 혁명의 과업을 군사정권이 과감하게 수행한다는 점에서 5.16혁명의 긍정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공산 제국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다.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공포 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선용에서 구해야 한다. (주석 14)
장준하는 초기에 5.16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 반대의 입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민족적 이상에서 볼 때 4.19혁명의 과업을 군사정권이 과감하게 수행한다는 점에 5.16혁명의 긍정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뒷날 ‘반민족, 반민주’로 규탄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의 인식변화가 5.16의 주체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라는 점을 알고 달라진 것인지, 처음부터 그랬는지의 여부는 입증할 자료를 찾기 어렵다.
장준하는 자신도 민주당 정부의 주요 포스트에 참여하고서도 민주당정부를 매섭게 비판했다. 민주당정부 9개월도 안돼 내분, 친일파관료 등용, 공산당의 위협에 대한 미온적 대처, 민생도탄 등으로 국민을 배신하여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고 9월호의 기명 '권두언'에서 썼다.
한편 4.19이후 90퍼센트 이상의 득표라는 국민의 절대 지지의 근거와 명분을 가지고 후계 정권담당자로 임하였던 민주당은 분열과 내분을 거듭함으로써 국민에게 배신하여 그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뿐 더러 일제 관료 출신들과 친일경향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 지도집단의 영도에 반발하는 세력을 억누를 만한 명분이 없어 이리 부닥기고 저리 이끌려 갈팡질팡 하는 동안 민생은 더욱 심한 도탄에 빠지고 백성의 불안은 날로 더하고 이에 틈을 탄 공산도당들의 마수는 나라 전역에 뻗쳐 국가를 위태롭게 할 제 5.16이라는 군사혁명을 다시 맞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잊을 수 없던 것은 이같은 모든 도덕적 근거와 명분을 잃은 민주당이니 그 허무한 몰락에 전 국민의 시선은 너무도 냉랭하였던 일이다. (주석 15)
주석
13) <사상계>, 1961년 7월호, 37쪽.
14) 앞의 책, 34~35쪽.
15) <사상계>, 1961년 9월호 권두언, '작금의 추세에 붙이는 몇마디',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