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
선인들은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음소로 분절되는 국어를, 뜻글자인 한자를 이용하여 적었는데 여간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에 대한 고민의 길을 따라가 보자.
한자로써 우리말을 적기 위한 최초의 방법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방식이다. 이것은 어순이 국어와 다른 한문 즉 중국어를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적던 표기법이다.
임신서기석이란, 1934년 5월 경북 월성군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된 돌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쓰인 글은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식의 한문체로 되어 있다. 이 돌에 새겨진 내용은, 신라 때 두 사람이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맹세한 글이다. 이 돌은 임신년의 맹세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하여 통상 임신서기석이라 부른다. 그러면 그 내용의 일부를 잠깐 보자.
壬申年六月十六日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二人幷誓記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天前誓 하늘 앞에 맹세한다.
今自三年以後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忠道執持 충도忠道를 잡고 지녀
過失无誓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비록 글자는 한자를 썼지만, 그 문장은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 순서로 적었다는 것이다. 다음 문장을 자세히 보자.
二人幷誓記(이인병서기)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天前誓(천전서) 하늘 앞에 맹세한다
한문의 어순이 아니라 우리말의 순서대로 한자를 차례로 적었다. 이것을 오늘날 영어에 비유하면, ‘This is a book.’을 우리말 순으로 ‘This a book is.’와 같이 표기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씌어 있는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는 뜻인 ‘二人幷誓記(이인병서기)’는 한문 어순이라면 ‘二人幷記誓(이인병기서)’라야 한다. 또 하늘 앞에 맹세한다는 ‘天前誓(천전서)’는 ‘誓天前(서천전)’이어야 한다. 그 아래도 이와 같이 모두 한문 순서가 아닌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를 배열했다. 이처럼 임신서기석의 표현은 어려운 한문식 표기를 피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말 순으로 한자를 배열하여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보다 약간 발전한 방식의 표기법이 뒤이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신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나타나는 표기법이다. 여기에 쓰인 내용을 잘 뜯어보기로 하자.
南山新城作節(남산신성작절) 남산신성을 지을 때
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여법이작후삼년붕파) 만약 법으로 지은 뒤 3년에 붕괴되면
罪敎事爲(죄교사위) 죄 주실 일로 삼아
聞敎令誓事之 들으시게 하여 맹세시킬 일이니라
여기에 쓰인 진하게 쓰인 글자 즉 절(節) 자는 ‘때’를 나타내고, 이(以) 자는 ‘-으로’를 나타내며, 자(者) 자는 어미 ‘-면’을 나타내며, 교(敎) 자는 ‘-게 하다’의 뜻을 각각 나태내고 있다. 그러니 임신서기석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표기법으로 쓰인 것이 남산신성비다.
이 글은 임신서기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어순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윗글 중 짙은 표시로 되어 있는 글자들은 본디의 한자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뜻을 나타낸 글자다. 그 중에는 조사나 어미 같은 문법소까지 나타내는 것도 있다. 임신서기석에는 우리말의 순서대로 글자를 배치했을 뿐인데, 남산신성비에서는 이에서 나아가 문법의 기능을 나타내는 조사나 어미까지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영어에 비유하면 ‘This is a book.’을 ‘This는 a의 book is다.’와 같이 나타낸 것이다. 곧 조사 ‘-는’이나 ‘-의’, 어미 ‘-다’와 같은 어미, ‘-게 하다’란 사역과 같은 문법소들까지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이두가 들어간 표기법은 이전의 임신서기석의 방식보다는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임신서기석도 한자를 빌려 우리말 어순의 문장을 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우리말의 토(吐)를 표기하는 발전된 문법 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산신성비는 그러한 토를 표기하였다. 이와 같이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으려는 방식을 이두라고 한다.
이러한 이두식 표기는 세간에 널리 쓰였고, 특히 관리들의 문서 활동에 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두(吏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두(吏讀)를 이찰(吏札)이라 부르기도 한 것은 관리나 승려들이 주된 향유 계층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양반들은 한문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관리나 서리들은 그 실력이 선비만 못하였기 때문에 이두를 사용해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사소통도 하였다. 그래서 이두는 조선말까지 이어져 사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