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술왕기 (武戌王記)
무술왕이 언제적 군주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설화,민담등이 있어 이중 믿을만한 것을 중심으로 기록해둔다. 원래 앞서 정태왕(鄭泰王)이라고 있었다. 주변국가 10여부족을 복속시킨 정복군주였는데 태왕에게 복속된 부족들은 대개 공녀를 바치며 항복을 청하였다. 나중에 승미족(承美族)이란 소수부족이 있었는데 역시 부족장이 딸을 바치며 복속을 청하려 하였다. 원래 부족장에게 여식이 없었는데 자체적으로 ‘최고 미인대회’를 열어 일등미인을 선발한뒤 부족장의 양녀로 하여 바친 것이다.
처음에 우리 태왕이 당황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후궁이 둘이 있는데 더 이상의 여인이 필요치 않으며 자칫 훗날 후계문제로 인한 분란이 걱정되도다. 또한 내가 정복전쟁을 벌인 것은 국경을 침탈하는 오랑캐를 정벌하여 우리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여색을 탐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 이런식으로 가면 내가 마치 여색을 탐하기 위해 그 많은 전쟁을 벌인 것으로 후대가 알게될까 두렵도다’ 하며 받지 않으려 했다. 이에 승미족의 부족장과 사신들이 눈물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찌 대국(大國)의 황제께서 저희의 충심(忠心)을 몰라주시나이까. 저희가 비록 천출(賤出)이라 하나 어찌 천지근본의 도리를 모르겠으며 천하대세가 대국에 있음을 모르지 않으리이까. 다만 바라옵기는 스스로 대국의 백성되기를 청하며 그 충의(忠義)의 뜻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것이니 부디 대국의 황제께서 저희 성심(誠心)을 다한 도리(道理)를 저버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황제가 난감하여 고민하다가 적당한 답례를 주어 사신단을 돌려보낸뒤 여인을 받았다. 허나 끝내 후궁으로 받아들이기가 적절치 않다하여 당분간 궁녀들의 처소에 머물게 하다 ‘아무리 소국(小國)의 여인이라 하나 성의를 저버릴수는 없으니 태자(太子)에게 주도록 하라’ 하여 여인을 태자의 처소로 보냈다.
이때 태자 나이가 19세였는데 처음 여인을 부왕으로부터 받고는 황망해했다. ‘내가 아직 정식 혼인을 올려 부인을 얻은 사실이 없는데 후궁부터 먼저 들이라니 이런 도리가 동서고금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또한 나의 학업이 부족하여 아직 부왕의 대업을 제대로 계승할지 그 일만 생각해도 막막하고 송구하기 그지없는데 이런때 여인을 맞이함은 적절치 못하도다. 듣자하니 승미국에서 부왕께 바친 여인이라 하니 부왕께 돌려드리도록 하라’ 하여 다시 황제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때 여인의 이름은 정현(定賢)이라 하였고 나이 17세였는데 태자가 다시 부왕에게 돌려보내자 왕이 점잖게 나무라며 말했다. ‘이미 내가 태자에게 주었거늘 다시 애비에게 돌려보내는 법도가 어디있단 말이냐. 또한 태자가 아직 정식 혼사를 치르지 못한 몸으로 후궁을 받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 하였으니 소국의 공물또한 소홀히함은 국가간 예의가 아니로다. 태자는 잔말말고 아비의 성의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정현이 다시 태자의 처소로 돌아왔는데 태자가 처소의 빈방에 정현을 잠시 머물게 하며 며칠을 고민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가 낭자를 받아들임은 적절치 않은 것 같소. 낭자 또한 본래 부왕의 후궁으로 바쳐지고자 이 먼길을 왔을터이니 다른 이론(異論)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소이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이와같이 설득하여 다시 부왕의 처소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이 국사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오니 정현이 이미 의관을 정제하고 침소에서 기다리고 있음에 놀라 ‘태자가 어찌 부왕께 불효하고 능멸함이 이와같이 있을수 있느냐 ? 내 이미 태자에게 주겠다는 뜻을 두차례나 밝혔거늘 거듭 돌려보냄이 무슨 까닭이며 이런 법도는 세상에 없도다’ 하며 또한 정현에게도 스스로 곤장을 친뒤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태자의 여인으로 바쳐진 몸으로 허락도 없이 밤늦은 시간에 짐의 침소에 들어왔으니 무엄하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법도대로 다스려야하나 아직 황궁 법도를 모르는 여인이니 한번만 눈감아 주도록 하겠도다. 어서 태자에게 돌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정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울면서 태자에게 돌아갔다.
태자가 고민하다 하는수없이 정현을 처소의 빈방에서 지내도록 했다. 원래 이 방은 태자가 나중에 혼사를 치를시 태자비와 함께 지내도록 배려해서 만든 여분의 방이다. 태자가 정현을 그곳에서 혼자 지내게 한뒤 100일동안 들르지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소량의 술과 음식을 손수 준비해 방에 들어서는 여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낭자를 사사로이 미워할 까닭이 있겠소. 다만 첫째로 본래 부왕의 후궁으로 바쳐진이를 내가 취하는 것이 아무래도 고민되었고 둘째로 내가 학업이 부족하고 부왕의 대를 이을만한 왕재가 되지 못한데 여인부터 취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적절치 못하다 생각했으며 셋째 멀리 타국에서 온 이국의 여인을 취하는것도 내키지 않았을 따름이오. 허나 이제 이렇게 낭자를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으로 계속 놓아두는것도 예가 아닌듯하여 이리 찾아온것이오’ 하고 비로소 정현을 품에 안았다. 정현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소첩은 다만 이곳에서 독수공방의 과부아닌 과부로 살다 죽게되는줄만 알았습니다’ 하였다.
태자가 뒤늦게나마 정현을 가까이함에 생각보다 뜻이 맞고 성품을 마음에 들어하여 이후엔 정현이 없이는 함께 식사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고 손수 양말을 기워 매일같이 신겨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이민족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태자비로 책봉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때 연흥군(延興君) 성주 여진식은 선대시절 농무대형으로 있으면서 3년에 걸쳐 풍년이 들게한 공으로 정풍공신(政豊功臣)에 책봉된 이였는데 나이 40을 넘겨 본 늦둥이 딸이 있어 태자비로 바치고자 하였다. 왕이 흔쾌히 혼사를 허락하였다. 본래 구려(句麗)의 법도에 신랑,신부가 혼사전 서로의 얼굴을 봐선 안된다는 법도가 있진 않았으나 태자가 본래 여색을 탐하는 성질이 아니라 혼사전까지 여씨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고민 끝에 마침내 혼사날 여씨의 얼굴을 보니 스스로 그 외모를 ‘멧돼지와 같다’ 폄하하고 기겁하여 바로 신방에서 달아나 정현의 침소에 들렀다. 정현은 태자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여씨가 본래 사가에 있을 때 정현의 일을 이야기듣지 못한바가 아니라 갈수록 신경이 쓰였다. 혼사를 치르고도 한참동안 태자가 오직 정현만을 총애할뿐 여씨의 침소에는 들지 않자 질투가 극에 달했다. 때로는 술에취해 ‘내 손수 정현이란 계집의 머리를 부셔버리고 불에캐워 죽여도 이 분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소리칠 정도였고 때론 홧김에 처소의 기물이며 집기를 함부로 내던져 파손하거나 아무런 이유없이 죄없는 궁녀를 마구 때리고 인두를 불에 달궈 눈과 귀를 지질 정도였다. 한번은 궁녀 여럿을 꽁꽁묶어 바닥을 기게하며 개와 돼지 울음소리를 내게하니 궁녀들이 울면서도 마지못해 시키는대로 따르니 여씨가 변태처럼 깔깔때며 웃었다.
정태왕이 재위 34년만에 63세로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28세 나이로 즉위하니 그가 무술왕(武戌王)이다. 정현과의 사이에 아들을 둘 낳았는데 이때 장남 경(景)이 8세, 차남 윤(胤)이 6세였다. 허나 정현이 아들 둘을 낳았음에도 이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황후로 책봉이 되지 못해 장남 경도 차남 윤도 태자도 황자도 되지 못했다.
무술왕 2년에 나라가 북국(北國)의 침략을 당해 일시적으로 패퇴했는데 많은 부상병이 생겼다. 이에 정현이 몸소 전장에서 부상입은 병사들을 발을 씻겨주며 위로해주었으나 병사들이 이민족의 여인이라 더럽다 하며 받지 않으려 했다. 또 정현이 종종 부모잃은 고아들을 황궁에 불러들여 귀한 음식과 좋은 연극을 보여주며 후히 대접해 주었는데 이때도 정통파 관료들은 정현이 황궁 법도를 어지럽힌다며 탄핵하려 하였다. 이에 태왕이 탄식하여 말했다. ‘옛부터 국모(國母)의 자질은 왕이 국정에 바빠 미처 돌보지 못하는 그늘진곳을 보살피며 나라에 소외받고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혹시 없는지 손수 돌아다녀 살피며 때로는 맹인이나 고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크게 잔치를 벌여 그야말로 나라의 큰 어미처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을 ’국모(國母)‘된 자질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몸소 국모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황비(皇妃)를 단지 이민족 출신이라 무조건 핍박하며 업신여기니 이것이 어찌된일인가’ 탄식하였다.
왕이 여황후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기어이 장남 경을 태자로 책봉하려 들었다. 이에 충신 ‘을지창덕(乙支昌德)’이 몸소 궁밖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와 피눈물로 간하기를 ‘구려의 황실이 오직 삼족오의 피를 이어받아 그 천년 순결을 지금껏 지켜온바 이제 금상께선 천한피가 섞인 여인의 자손으로 후계를 삼으려하니 이로서 천년질서가 어지럽혀질까 심히 걱정되옵니다. 구려가 천년세월을 내려오면서 비록 여러차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으나 오직 삼족오의 순혈(純血)은 어지럽혀진일이 없사온데 어찌 작금의 폐하께선 태평성대에 스스로 구려의 순결들 더럽히려 하시나이까. 자고로 구려 황실의 피는 삼족오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은 집안의 자손만이 이어갈수 있으니 원컨대 금상께선 지금이라도 동명천제(東明天帝)의 대명(大命)을 생각하시어 부디 구려황실의 순결을 지켜주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태왕이 되려 격노하며 말하기를 ‘선대(先代)에 정비도 들이기전에 먼저 후실을 들이는 해괴한일이 있어 내가 거절하다 되려 부황께 꾸지람을 듣는 해괴함이 있었음에도 경들은 그때에도 반대하지 않다가 이제와 단지 이민족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엄연한 장자승계(長子承繼)의 법칙을 반대하고 있으니 이것은 해괴한일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리 충신가라도 때론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때가 있다더니 바로 지금이 그와같은가보도다’ 하며 창덕을 천리밖으로 귀양보내려 하였다. 신료들이 백인소,만인소를 올려 반대하니 결국 뜻을 거두고 다만 벼슬만 삭탈하였다.
왕이 결국 정현의 황후책봉을 포기하고 다만 언제까지 애매한 신분으로 방기할수만은 없어 결국 후궁을 부르는 칭호중 하나인 ‘귀인(貴人)’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장남 경을 ‘평양왕(平壤王)’에 차남 윤은 ‘요동왕(遼東王 )’에 봉하였다. 하루는 황궁 인근 가까운곳에서 수상한 첩자가 붙잡혔는데 놀랍게도 어린 여자였다. 조사해보니 밀서(密書)를 간직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스스로를 옛 ‘승미족(承美族)’ 출신이라 밝혔다. 밀서에는 ‘옛 승미족이 간악한 구려에 짖밟힌 한을 간직한채 살고있는 여인 20여인이 모여 원한을 갚을일을 도모하고 있다.’며 ‘저희가 군사를 일으켜 구려를 칠 때 공주(公主)께서 안에서 내응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들 놀라고 바로 허귀인을 의심하게 되었다. 허귀인이 태왕앞에 슬피울며 억을함을 전하기를 ‘승미족이 이미 대국에 복속한지 십수년이 지났거늘 어찌 이제와 다른뜻을 품는이가 있으리이까. 또한 승미족의 문자는 일천하여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쉽게 접할수 없는 것이었는데 어찌 승미족의 평범한 소녀들이 이제와서 그 문자로 소통하며 제게 밀서까지 보낼수 있겠으며 또한 승미족이 일국(一國)을 이루지 못해 오랫동은 스스로를 그저 ’부족‘이라 부르며 부족장의 일을 돕는 이들을 ‘대원(大願)’이라 부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공주’같은 호칭은 애초부터 승미족이 쓴일도 없고 저는 애초에 승미족에서도 다만 천한신분으로 오직 구려에 바쳐지기 위해 뽑힌 ‘일등미인(一等美人)’이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승미족의 일과 맞지 않는 내용일뿐이니 부디 믿지 말아주소서‘ 하였다. 귀인이 피눈물로 억울함을 청하니 태왕이 안타까이 여기며 귀인을 품에 안고는 ’내가 그대를 믿으니 걱정하지 말라. 또한 내 그대를 사실상의 부인으로 맞은지 이미 10여년이 흘렀거늘 이제와 어찌 다른뜻이 있을수 있으리‘ 하며 거듭 귀인을 위로하였다. 태왕은 애초에 모해(謀害)의 배후로 여황후를 의심하였으나 마땅한 증좌가 없어 더는 조사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귀인에 왕에게 이와같이 간하였다. ’승미족이 오래전부터 요서(遼西)와 진평땅에 터전으 잡고 수백년을 살았는데 오늘날 구려에 복속되어 더 이상 다른뜻이 없나이다. 다만 요서,진평은 땅은 좁았으나 예전부터 진귀한 풀이 많이나서 승미의 옛 선현(先賢)들은 이를 사람을 살릴수 있는 약초(藥草) 10여종, 사람을 죽일수 있는 위험한 독초(毒草) 10여종 그리고 사람의 정신을 혼돈시키는 위험한 혼초(昏草) 10여종을 구분하여 후대를 가르쳤나이다. 허나 이제 승미족은 복속되어 옛 법도와 제도가 모두 끊기고 요서,진평의 진귀한 풀들도 제대로 고찰할길이 없나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요서의 혼초가 지금 구려에 무분별하게 퍼져 혹 나이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처자들이 함부로 혼초를 복용하다 중독되는 일이 있을까 우려되옵니다. 혼초는 예부터 승미족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혼(魂)을 썩게한다 경계하는것이었나이다. 이제 원컨대 태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요서,진평당의 약초와 독초 그리고 혼초를 구분하는 법을 가르쳐 특히 구려의 어린 소년들이나 아녀자들이 혼초에 중독되는일이 없도록 돕겠나이다‘ 하였다. 태왕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여 서책을 반포케 하였으나 오히려 중신들이 반발하여 ’어찌 더러운 이민족의 글로 숭고(崇古)한 고려백성들을 현혹시키려 하는가‘ 하며 거부하여 받지않고 허귀인이 지은 서책은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러한 곡절로 아쉽게도 귀인이 쓴 서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순애(順愛)라는 여인이 있었다. 황도 남서쪽 150여리 떨어진 용현(龍現) 고을에 살았는데 부친 차영부(車永副)는 본래 지역 역참일을 보는 관원이었다. 딸을 많이 두었는데 순애는 여덟명중 일곱째였다. 평상시 고을에서 종애(宗愛),희수(姬秀),귀주(歸朱),유연(裕演),소영(素英),주연(珠演),아영(娥永),지화(智花),추을(秋乙),보영(普永)등 10여인의 또래친구들과 어울려 살았다. 하루는 무리를 소집하여 은밀한곳에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껏 스무살이 되도록 두 번 손에 피를 묻혔도다. 그 첫 번째는 지역 동북방에 있는 망태산(望泰山)의 산적 부괴수인 진아(眞阿)를 목벤일이요 두 번째는 내 열 살많은 이복누이를 없앤일이다. 첫 번째는 마을의 어린아이와 계집아리를 훔쳐가는 악당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얼마 되지않는 집안의 재산으로 야료를 부리려는자를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이제 부득이하게 세 번째 손을 써야할때가 왔다‘ 하였다. 종애,귀주등이 의아하여 묻기를 ’대형(大兄)께서 새로 또 무슨 사업을 벌이고자 하시나이까 ?‘ 하니 순애가 답하기를 ’황궁에 또아리를 틀고 나라를 어지럽히며 백의구려(白衣句麗)의 순결을 어지렵히는 요사스러운 악녀를 응징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니라‘ 하였다. 엄청난일이라 처음 무리가 놀라 뭐라 말을 못하였는데 순애가 거듭 눈물과 진정으로 호소하자 대다수는 설득하였고 다만 한두명만 끝내 겁을먹고 따를수 없다하여 이탈하였다.
처음 순애가 계책을 짜니 ’요사스러운 계집이 종종 문둥병 환자를 돌본다는 핑계로 황궁을 나온다하니 그때를 거사일로 하자‘ 하여 모두 그간 사사로이 훈련한 활과 화살로 단단히 무장하고 정현이 황궁을 나올때만을 기다렸다. 먼저 무리중 무예가 가장 뛰어난 귀주와 아영이 정현을 노렸으나 호위무사들의 무력이 강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쨰로 달려들던 보희(普姬)마저 붙잡히고 말았다. 순애가 애석해하며 다만 이러다 전부 붙잡히겠다며 긴급히 후퇴명령을 내려 돌아가고 말았다. 첫 번째 거사를 실패한 순애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무리를 모아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활을 쏘아 북적(北狄)계집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으니 다른 방도를 쓰는방법밖에 없다. 원래 용현땅은 예부터 오리와 칡 그리고 잣이 많이 나서 황도에 진상을 바치곤 하였다. 이제 곧 또 철이와서 황도에 진상품을 바침과 함께 숙수와 의녀가 함께 들어가게 되어있으니 그때를 노리도록 하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진상품이 바쳐지는날 무리중 몇몇을 요리를 담당할 숙수(熟手)와 의녀(醫女)로 분장시켜 황궁안으로 들여보냈다. 헌데 이때 황궁에 용현출신 궁녀가 있어 이때 들어온 숙수와 의녀가 가짜임을 알아챘다. 바로 수하 궁녀들을 시켜 강제로 숙수의 옷을 벗기고 수염을 떼내게하니 바로 정체가 발각났다. 무리는 노한 황제에 의해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
두 번의 거사에 모두 실패한 순애의 무리가 이번엔 다른 무리를 시켜 아예 잣죽을 황궁으로 들여보내 귀인을 독살하려 들었으나 기미상궁에 의해 모두 적발되었다. 한편 이때 여황후는 혼인한지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술왕에게 외면받는 상태였는데 뒤늦게 외부에서 귀인을 도모하려는 무리가 있음을 알았다. 은밀히 밀서를 보내 손잡을 것을 제안한뒤 ’이 거사가 성공하면 무리중 똑똑한 아이를 특별히 내 대전상궁에 명할것이며, 순애에겐 우국부인(憂國婦人)의 칭호를 하사하여 제후(諸侯)의 부인(婦人)에 준하는 녹봉을 하사할 것이다‘ 하였다. 헌데 이때 여황후의 질투로 인두에 지져 입이나 눈등이 지져진 궁녀가 너무많아 대개는 귀인에게 가서 고통을 호소할 정도라 대다수의 궁녀들이 황후의 곁을 떠난 상태다. 이에 귀인을 걱정하는 궁녀중 한 무리가 황후가 외부와 주고받는 밀서를 적발해내었다. 놀란 태왕이 마침내 신료들과 황후의 폐위를 논하니 여황후가 말하기를 ’내 오직 구려의 순혈을 지키고자 하는 일념(一念)뿐이었거늘 이제와 일이 이렇게 되니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허나 내가 구려에게 폐위를 당하느니 내가 먼저 구려를 버리리라‘ 하고는 스스로 온몸에 기름을 끼얹은뒤 불을질러 생을 마감하였다.
하루는 귀인이 총애하던 한 궁녀를 옥상으로 올라오게 한뒤 칼을 뽑아 목을 조이며 이렇게 외쳤다. ’내 비록 정비((正妃)가 아니고 천한 이민족 출신이라 하나 이미 태황의 승은을 입은지 오래되어 자손 둘을 보았고, 또 부족하나마 몸소 국모의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헌데 구려가 나를 핍박하고 업신여기기를 어찌 이렇게까지 할수 있느냐 ? 내 지금이라도 나에대한 처우를 수정하지 않을 경우 이 자리에서 뛰어내릴것이니라‘ 하였다. 병사들이 달려와서 가까스로 귀인을 설득하여 겨우 반나절만에 귀인을 내려보낼수 있었다. 다만 애초의 요구사항인 처우개선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술왕때의 일이 전해지는게 여기까지라 이후의 일이 어찌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후계승계와 관련 앞뒤 정황이 서로다른 이야기 전해지는게 몇가지 있어 기록해둔다. 어떤이가 이런말을 했다. 무술왕이 결국 정현을 정비(正妃)에 봉하고 장남 경은 태자에 차남 준은 ’삼성(三省 : 요령,길림,흑룡) 행정(行政) 통제지사(統制知事)‘에 임명했고 이후 태왕이 떠나 경이 황위에 올랐으나 지지하는 세력이 없어 오래 버티지 못하다가 무술왕의 사촌 지현(志賢)이 경과준을 모두 척살하고 결국 태왕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술왕이 나이 60에 갓 스물이 넘은 어린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그가 왕자를 낳았다. 궁녀가 구려출신이니 몇몇 원로중신이 은밀히 후궁과 논의하기를 ’이 아이를 황위에 올리고자 하니 협조해주기 바란다. 구려의 황통은 오직 구려의 순혈로서만 이어가야 한다. 그대가 구려출신이니 이 아이가 황위에 오르면 그대가 태후가 되어 섭정을 할수 있도록 돕겠다‘ 하여 머지않아 무술왕이 세상을 떠나니 후궁의 아이를 결국 태왕에 올렸고 이에 정현은 혼자 탄식하며 이와같이 말했다. ’사내들의 성욕은 아무래도 신(神)도 구원못할 구제못할 존재같도다. 젊은시절엔 나를 그리 총애하시던 태왕께서도 다 늙어서는 구려의 어린 후궁을 들인단 말인가‘ 혼자 눈물을 흘리며 자결하였다’ 전해진다. 또 어떤 기록에는 이런말도 있다. 무술왕의 후계문제가 난감하게 되니 구려황통의 순혈을 지키고자 하는 충신열사들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정현과 그 두 아들을 척살하고 옛 보명왕의 정비(正妃)셨고 구려의 충신 백찬승의 차녀였던 은진태후(恩眞太后)의 5대손 상영군(相永君)을 태왕에 올렸노라‘고 다만 그러면서도 태왕의 명은 전해지지 않으니 과연 어떤 기록이나 주장이 정확한지는 지금으로선 증명(證明)하거나 고찰(考察)할 방법이 없다.
사론(史論) : 구려가 추모성제 이래로 동서사방 3천수백여리에 세력을 뻗치면서 십국(十國)을
멸(滅)하고 백여부족을 복속시켰다. 허나 구려 황실의 법통과 혈맥은 오직 구려황
족(皇族)과 삼족오 정기를 받은 12성씨, 백두혈기를 받은 9성씨, 황매(黃梅) 향기
향기(香氣)를 받은 7성씨의 혼인으로 이어진 혈통만이 황통(皇統)을 승계할수 있
노라 태초에 이미 성제(聖帝)께서 천명하셨다. 구려의 법통과 혈맥이 2천년을 이
어갔으나 간간이 간악한 찬역의 무리가 있어 혼돈의 시기가 몇차례 있었으나 구
려의 혈통만은 무난히 지킬수 있었다. 다만 가끔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
으니 무술왕때가 그러하였다.
만약 이족(異族)의 여인이 낳은 혈손이 있는데 순혈의 혈통이 없다면 어찌되는가
? 예부터 구려에 많은 부족들이 공녀를 바치며 복속을 청해왔음에도 구려의 혈통
만은 지켜져야 하는 이치와 법도가 여기있는데 이 흔들림은 어찌하면 좋은가. 이
족(異族)과 이국(異國)의 혈손이라도 모두 천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 만약 이국(異
國)의 귀족과 구려의 평민이 혼인하면 어찌되는가 ? 구려의 황족이 이족(異族)의
천녀(賤女)와 혼인하면 그 반열은 어찌되는가. 아아 !!! 혼란스럽도다. 정녕 천지정
의(天地正意)를 어찌 내려야할지 몰라 어지롭도다. 무술왕의 기록이 세세하치 못
하고 그 말미마저 분명치 않게 전해지는 곡절도 혹 이와 무관치 않은 것 아닌가
의심되어 사론으로 남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