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귀국 즉시 모스크바 공항에서 체포된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푸틴 대통령을 향해 '반격(?)'을 가했다. 그가 유튜브를 통해 푸틴 대통령의 '흑해 궁전'을 폭로한 걸 보면, 귀국을 앞두고 단단히 준비한 게 분명하다. 나레이션으로 직접 화면에 나와 '푸틴 궁전'의 실체와 '검은 돈의 흐름'을 폭로하고 비판했다.
그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보면, 독극물 중독 이전인지, 이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19일 공개된 이 영상은 사흘만에 5천500만 클릭을 기록했으니, '대박 사건'이다.
나발니가 유튜브에 올린 '푸틴을 위한 궁전'
푸틴의 '숨겨진 딸'에 대한 영국 타블로이드 '더 선' 보도. 특종이라고 쓰여 있다./캡처
이틀 뒤에 나발니로부터 또다른 폭로가 나왔다고 국내 언론들이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의 '숨겨진 딸' 이야기다. 하지만, 나발니가 새롭게 폭로한 건 아니다. 센세이셔널한(선정적인) 기사를 좋아하는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푸틴 궁전' 영상에 나오는 (나발니의) 검은 돈 사용처 발언에 걸어 기존의 기사를 짜집기한 것에 불과하다.
다른 점은 '숨겨진 딸'로 알려진 엘리자베타의 인스타그램 계정과 그 속에 담긴 사진들이 공개됐다는 것. 이 계정과 사진 역시, 러시아의 탐사보도매체 '프로젝트'(러시아어로는 проект)가 "10대 소녀의 얼굴과 신분은 공개할 수 없다"며 보도를 자제했던 내용이다.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쉽게 알 수 있다. 탐사보도 매체와 타블로이드 매체의 차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푸틴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엘리자베타의 인스타그램 사진들/캡처
당연히 러시아 언론에는 '숨겨진 딸'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매체 '프로젝트'가 지난해 11월 말 '푸틴 대통령의 새로운 여자와 딸'을 처음 공개했을 때, 왁자지끌했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크렘린도 그때와 달리, 논평 한줄 내놓지 않았고, 현지 언론도 대변인에게 묻지도 않았던 것 같다. 기껏해야 두달 전에 나온 이야기 아닌가?
국내 언론이나 타블로이드 신문의 짜집기 내용을 받아쓰며 난리를 쳤다. 바이러시아는 당시 프로젝트의 보도를 자세히 다룬 바 있다. ♤♤프로젝트 기사 '(집중탐구) 푸틴 대통령의 여자' 보기
'더 선' 등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나발니가 폭로한 '푸틴 궁전'이 엄청난 클릭을 기록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선정적인 읽을 거리를 또 한건 올린 것이다. 그것도 '특종'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여가며..
러시아 탐사보도 매체 프로젝트에 따르면, 엘리자베타(17, 해를 넘겼으니 18세 아닌가?)는 푸틴 대통령과 그의 고향 여자 친구(나이로 보면 애인)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푸틴 대통령이 전처인 루드밀라와 이혼하기 전인 2003년이다. 어머니는 45세(역시 46세로 해야 하지 않나?)의 스베틀라나 크리보노기크. 한때 청소부로 일했으나, 지금은 '방크러시아(은행)' 주주 회사의 지분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키장 등을 보유한 자산가라고 한다.
프로젝트가 엘라자베타를 푸틴 대통령의 딸로 추측한 근거는 두가지다. 200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멘느이 오스트로프' Каменный остров (바위섬이라는 뜻)에 조성된 부촌에 그녀의 어머니가 푸틴 대통령의 측근들과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과, 외모가 푸틴 대통령을 거의 빼닮았다는 것.
러시아 탐사보도매체 프로젝트가 올린 '엘리자베타' 사진. 이 매체는 10대 소녀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SNS 계정이나 사진을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프로젝트 캡처
당시 현지 타블로이드 신문은 크리보노기크의 과거 발언도 빼놓지 않고 덧붙이면서 '푸틴의 숨겨진 딸'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녀가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된 이유를 묻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1990년대에 부자가 한명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정부의 관리였다"고 답변했고,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1990년대 말 모스크바로 오기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서 일했다.
엘리자베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어떤 10대 소녀가 자신의 명품을 자랑하는 듯하다. 구찌 마스크에 입생로랑(YSL), 보테가 베네타, 톰포드, 샤넬, 돌체앤가바나(D&G), 발렌티노, 알렉산더왕 등. 칵테일 사진에 친구와 춤을 추는 동영상도 들어 있다. 이 계정이 언론에 알려진 뒤 팔로워가 8만7,000여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이 계정의 주인은 자신의 실체(?)가 폭로된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점이다. 지난 15일 따뜻한 스웨터의 사진을 포스팅한 뒤 타블로이드 신문의 폭로에 의해 계정이 알려졌는데, 23일 또 운동화를 신은 '발목 사진'을 올렸다. 운동화 사진에만 좋아요가 1만3900개, 댓글이 1,650개가 붙었다.
"(운동화를 신은 김에) 같이 산책하자" "내일도 (산책) 나갈 거냐?" "('푸틴의 궁전'에 있는) 아쿠아디스코테크에 들어가게 해달라"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 "물담배도 있다는데.." 등의 댓글이 상위에 올라 있다.
흑해 연안의 '푸틴 궁전' 모습/유튜브 동영상 캡처
나발니가 반격하는 심정으로 폭로한 영상의 핵심은 바로 호화로운 '푸틴 궁전'이다. ‘푸틴을 위한 궁전, 거대한 뇌물의 이야기’라는 2시간 분량의 유튜브 영상에서 그는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궁전의 모습”이라며 “(푸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나라가 파산할 때까지 계속 훔치고 또 훔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푸틴 궁전'은 러시아 남부 흑해 연안의 크라스노다르주 겔렌쥐크 Геленджик 에 숨어 있다. 크기만 모나코 왕국의 39배(7,800헥타르, 2,359만평)로, 11억 유로(1조4000억원)대의 호화 리조트(저택)다. 내부에는 아이스링크와 원형 극장, 와이너리, 헬기 착륙장 등이 갖춰져 있다. "러시아 올리가르히(재벌)들이 상납한 '검은 돈'으로 올린 성채'라는 게 나발니의 주장이다.
나발니는 “이건 단순한 별장, 휴양지, 거주지라고 할 수 없다. 하나의 거대한 도시, 왕국이다. 그리고 여기엔 단 한 명의 차르(황제)가 산다”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리조트를 찍은 항공사진과 건물의 주요 시설 등을 도면과 함께 상세히 소개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연계됐다는 근거로 △국영기업은 물론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올리가르히들이 건설비를 대고 △국가 보안기관원들이 시설을 경비하고 있으며 △리조트 인근 해안을 지나가려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등을 들었다.
크렘린, '푸틴 궁전'에 대한 보도를 '품질 좋은 크린베리'라 불렀다/얀덱스 캡처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0, 22일 두번이나 "이 리조트는 푸틴 대통령과 관계없는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는 "(나발니의 폭로 영상은) 사람의 눈길을 잡는 고급 '체리'와 같은 것"이라며 "몇 해 전에도 겔렌쥐크에 어떤 '궁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설명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소유가 아니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동영상에 첨부된 기부금 계좌를 겨냥해 "좀도둑들이 국민의 돈을 뜯어내는 방법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송금 전에) 10번을 생각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겔렌쥐크 리조트와 관련된 의혹은 10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방크러시아'(банк Россия, 은행) 간부 출신인 세르게이 콜레스니코프가 지난 2011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제기한 '폭로성 발언'이 시작이라고 한다. 당시 콜레스니코프는 “푸틴 대통령의 친구로 이뤄진 '러시아 은행'의 대주주들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흑해 연안의 리조트 단지 건설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이곳을 사실상 ‘푸틴 궁전’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0년 12월 23일에 올라온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글
앞서 미 워싱턴 포스트는 2010년 12월 23일자에 외부 칼럼리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David Ignatius)의 글을 실었다. 제목은 '러시아 스타일로 분해된 궁전에 관한 콜레스니코프의 이야기'다. 그의 기고문은 러시아어로도 남아 있다.
'러시아 은행'의 소유주는 푸틴 대통령의 고향 친구인 유리 코발추크(Юрий Ковальчук)다. 두 사람은 지난 1996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다차 협동조합(별장 공동단지) '오제로'(Озеро 호수라는 뜻)를 짓기도 뜻을 모았다. '오제로' 회원들이 여전히 '권력의 이너 서클'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코발추크는 '러시아 은행'을 발판으로 성장한 올리가르히로, 푸틴 대통령의 여자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끼어 있는 인물이다. '숨겨진 딸'의 배후에도, 푸틴 대통령의 또다른 애인인 리듬체조 선수의 뒷배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또 미국 등 서방진영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대한 보복으로 단행한 대러 제재 조치의 개인 명단에도 올라 있다.
그는 200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조성된 부촌 '카멘느이 오스트로프' 스캔들의 핵심 인물이다. 미국 LA의 '비버리 힐스'와 같은 급으로 불리는 이 부촌은 푸틴 대통령의 고향 친구 등 소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단'에게만 불하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은행'의 급속한 성장을 직접 지켜본 은행 간부(콜레스니코프)의 폭로이니, 친 푸틴 올리가르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비버리 힐스' 조성에 이어 남쪽 흑해 연안에 겨울용 리조트를 또 하나 지은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리조트의 소유주는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기업 '비놈'이라고 한다.
푸틴 전기작가, "겔렌쥐크 리조트는 대통령에게 준 올리가르히들의 선물"/얀덱스 캡처
이 리조트의 존재는 푸틴 대통령의 전기 작가인 알렉산드르 코롭코(Александр Коробко)도 인정했다. 코롭코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흑해 연안의 궁전은 올리가르히들이 선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푸틴 대통령이나 측근들이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지금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은 그 궁전 이야기를 들었을때 눈살을 찌푸렸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수락 여부) 결정은 뒤로 미뤄졌으며, 소유는 그의 스타일에 안맞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인터넷 매체 '스바보드나야 프레사' 메인 페이지. 나발니 집회 참여자들의 진압 사진이 실려 있다/캡처
현지 인터넷 매체 '스바보드나야 프레사'(Свободная пресса) 의 자하르 프릴레핀 주필 (Шеф-редактор)은 이미 10년 전에 '푸틴(당시 총리)의 궁전'에 대한 기사를 썼다며 "당시에는 그 기사를 천명 정도 읽었는데, 10년 후에는 수천만명이 클릭하다니, 놀랍다"고 했다.
원래 니콜라이 샤말로프가 건설하던 이 리조트는 보도가 나가고 얼마 뒤에 금융부동산 올리가르히 알렉산드르 포노마렌코에게 넘어갔다고 프릴레핀 주필은 기억한다. 포로마렌코는 2011년 완공이 덜 된 이 리조트를 3억5천만 달러(약 3천850억원)에 구입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기업 '비놈'으로 넘어가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요지경인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