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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묵상글 들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잘 속지 않으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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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잘 속지 않으려면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종말의 때 또는 혼란의 때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유혹을 하는 자와
유혹을 받는 자의 관계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혹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유혹을 받는 것 같지만
내가 유혹을 받을 상태에 있기에 유혹을 받는 것이듯
누가 나를 속이려 들어도 결코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면
속지 않을 텐데 내가 그런 내가 아니기에 속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것도 유혹이 못 되고,
술이 젼혀 당기지 않는 사람은 술을 아무리 먹자고 꼬드겨도
그것이 유혹이 되지 못할 것이고 아예 술친구도 없을 겁니다.
속는 것도 속이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을 사람이기 때문에 속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속을 사람이고 속지 않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뒤집으면 욕심 많은 사람이 잘 속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벌고 조금 쓰며 살겠다는 사람은
큰 돈이 된다는 속임수에 결코 넘어가지 않지요.
반대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은 사기꾼의 밥이지요.
둘째는 고통에 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시련과 환난에 마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그런 것이 닥칠 때 많이 속지요.
고통과 곤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늙고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뭐가 좋다는 말에 쉽게 넘어가고, 약장수에게 잘 속지요.
그러면 고통에 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시련을 통해 단련이 많이 된 사람과
무엇보다도 시련을 통해 사랑이 성장한 사람인데,
자기 사랑이나 하느님과 이웃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 Passion의 사람들입니다.
Passion은 우리말로 열정으로도 번역되고 수난으로도 번역되는데
열정/사랑과 수난이 함께 들어가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수난 곧 고통을 받아들이되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수난이며,
사랑하되 감성적인 사랑 그러니까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무릅쓰는 사랑이요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반대로 확신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넘어가지요.
그런데 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단련이 되고 강해지는 거지요.
우리는 보통 의심이 많은 사람이 잘 속지 않고
잘 믿는 사람이 잘 속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지요.
진정한 믿음과 확고한 믿음은 시련과 의심을 통과해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 확고해진 믿음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고한 믿음은 하느님을 믿기에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시련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고 구원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라는
체험을 시련을 통해서 강하게 한 사람은 환란이 닥쳐도 속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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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사실,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파괴에 대해서는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이미 예고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 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 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 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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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여기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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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하느님께서 세우실 나라는 영원하리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읽습니다.” 어느 교부가 남긴 이 격언의 뜻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여진 성경은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본 기록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 먼저 우리도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 다음 세상 현실도 하느님의 눈으로 관찰하게 되며, 나중에는 지나간 역사와 다가올 미래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를 알고 있던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바빌론 임금의 꿈을 풀이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주로, 바빌론 왕국 이후에 일어날 나라들의 운명과 궁극적인 전망에 대한 것이었는데,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리라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그 흥망성쇠의 역사란 지중해 세계의 국제 정세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하느님 나라는 온 누리에 세워지리라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에 오시어 로마 식민통치를 몸소 겪으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주류인 사두가이, 바리사이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군중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요한 1,10-11). 하지만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믿게 된 소수의 아나빔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맞아들였고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메시아 백성이 되어 교회를 이루었는데, 이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밀알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메시아 백성과 이들이 모인 교회는 악인과 죄인들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한 대가로 치루는 시련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운명이기는 했지만 이 시련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이스라엘을 벗어났고 로마를 거쳐 서양, 다시 아시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일러주는 대로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들의 영혼을 비추어주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살면서 그 정체성이 분명한 작은 공동체들을 세워나가게 되었고, 이러한 영혼과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온 누리에 세우실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그 나라가 나 자신의 영혼과 우리들의 관계로 이룩된 공동체를 통해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여기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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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 커다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 지지도 또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를 건네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속으로는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약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이 무뎌지고 힘차게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시간이 약일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단해진 상태의 나로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하니 슬픔을 너머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기억나게 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기억하면서 단단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고통과 시련으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었을까요? 수많은 아픔을 기억하면서 단단해졌기에 성공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을 동반하는 순간, 나의 단단해짐을 떠올려 보십시오.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단단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출신이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성전의 위상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서울에 가서 높은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이 다르긴 다르구나.’라면서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만 연연하면 할수록 고통과 시련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에서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삶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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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규칙은 일을 즐거움으로 만들고, 즐거움을 내 일로 만드는 것이다(에런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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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콜
새벽 다섯 시.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받으면,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축일 날, 가장 이른 축하의 인사를 늘 부모님께 이렇게 받았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님 걱정에 매일 부모님과 통화할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새벽에 잘 못 일어나요. 5시에 모닝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모닝콜을 해주셨고, 이를 무척이나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들 신부 도와주고 또 새벽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4시 전에 일어나기에 5시에 굳이 모닝콜을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계속하실 수 있도록 부탁을 했었습니다.
작년 4월 15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올해 8월 21일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새벽의 모닝콜 전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축일 때 괜히 서글퍼졌습니다.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부족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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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령대회를 다녀온 날입니다. 여느 때처럼 산보를 나섰습니다. 집에 거의 돌아올 무렵입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서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보지 못하고 다가왔습니다. 차를 보고 있으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어보았습니다. 약간의 타박상만 있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으면 될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혈압을 재 보았고,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동안 복용하지 않았던 혈압 약을 복용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성령대회를 다녀왔기에 천만다행으로 이 정도 사고로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사고의 순간에 저를 위해서 전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대회 때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에게는 거동이 불편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숨과 원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님은 기도 중에 반은 썩어 있는 사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생각하니 그 사과는 썩어가는 자신의 영혼이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교우들이 주었던 여호수아서의 말씀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여호수아 1, 9)” 그리고 20년 전 세례 받았을 때 한 자매님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도 생각났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는 세례를 받으면서 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니 모든 근심과 걱정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 앞으로도 있을 고통과 근심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돌아보니 그 아들은 한숨과 원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은총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아들이 있어서 가족이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하는 자매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를 꾸밈없이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견 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틀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바다 깊은 곳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은하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철학의 논리 속에, 수학의 규칙 속에, 과학의 심오함 속에만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에도, 작은 들꽃에도,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도 하느님의 암호는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암호를 우리들만 간직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그 암호를 나누어 주어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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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定住의 영성
-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다 -
지금은 연중 ‘끝’주간이고 다음 주는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주간답게 다니엘서나 루카 복음의 말씀 배치도 종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희망의 시작입니다. 마침 오랜만에 거름을 주고자 판, 배밭의 구덩이를 보는 순간 오래 전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수록 힘들다/하루하루 산다
다시 시작된 배농사/가지런히 파진 흙구덩이/든든하다
끝은 시작이다/삶은 엄숙하다
묵묵히 생명의 품되어/흙으로 산다/마지막이 고와야 한다
소나무를 줄기차게 타고 오르던
하늘 향한 담쟁이/장엄한 단풍 사랑으로/소나무를 장식하며
은혜 갚고 있다/이래야 끝은 아름다운 시작일 수 있다”-1998.11.
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 다니엘서나 묵시사상의 주제는 단 하나 ‘희망’입니다. 위협이나 공포가 아닌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의 영성입니다. 정주의 중심, 정주의 평화, 정주의 기쁨, 정주의 희망, 정주의 지혜 등 정주 영성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으뜸 서원이 바로 정주 서원입니다.
정주의 빛나는 표상이 수천년 전통의 수도원이나 성전들이고 여기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 성전, 그리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이 모든 정주의 현실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바 하느님 안에, 교회 안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삼종 기도후 세계 젊은이의 날에 젊은이들에게 하신 교황님 강론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집처럼 편히 머물며 주인공들이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고향의 가정집 같은 교회 안에서 정주하며 활력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비단 젊은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가정 상실의 시대, 교회가 만인의 치유와 위로, 환대의 가정집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이 편안한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 수도자들이 수도가정을 이뤄 사는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찾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정주할 때, 온갖 불안과 두려움, 환상은 말끔히 걷힙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세상 우상들이나 사탄에 속지 않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아무것도 너를’ 이란 기도시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엇이뇨/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무얼 더 원하리오
사랑하고 사랑하여/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정주 영성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정주의 영성가입니다. 알고 보니 아빌라의 데레사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이란 성가를 제 장례미사 퇴장성가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 역시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꿈과 환시의 해몽을 청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바빌론 대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빌론에 유배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주의 예언자, 다니엘은 희망과 구원의 표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꿈의 해몽에 앞서 다니엘의 하느님 찬미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한 정주 영성의 대가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지혜와 힘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은/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시간과 절기를 바꾸시는 분
임금들을 내치기도 하시고/임금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현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예지를 아는 이들에게 지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심오한 것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고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빛이 함께 머무르시는 분이시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다니2,20-23)
정주 영성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정주 영성이요 그 빛나는 모범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꿈 해몽은 세상 제국들이 덧없이 무너져 내림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해몽의 결정적 풀이입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하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통쾌, 상쾌, 유쾌한 삼쾌의 꿈해몽입니다. 바로 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나라는 자랑스럽게도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제국들이 수없이 명멸明滅했지잔 가톨릭 교회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제1대 베드로 사도 교황으로 시작되어 현재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정주영성의 대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깊고 풍부한 지혜와 지식, 해몽과 예언을 통해 정주 영성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 깨닫습니다. 다니엘을 능가하는 정주영성의 대가, 바로 우리 구원자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어제 월요일 9시경 찬미가 1절의 고백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성인들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구원의 주님이신/성자 그리스도님
당신은 정의 평화 베푸시오니/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나이다.”
우리의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이신 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시는 바 역시 정주영성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영적 사기꾼에 속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 흔들리지 말고, 뿌리 없이 표류하며 방황하지말고, 하느님 중심에 깊이 정주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요지부동 내 삶의 제자리에서 깨어 맑은 제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어둡고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부단히 내 삶의 자리 초월적 거점에서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넓고 깊게 살게 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깊은 정주 영성을 살게 해 주십니다. 다시 늘 고백해도 새롭고 좋은, 정주의 중심인 파스카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 예수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은 생명과 빛, 진리와 사랑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의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희망, 저희 평화,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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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다니 2,31)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 불려나와 꿈을 풀이합니다. 임금의 꿈 속에 등장한 순금, 은, 청동, 쇠, 진흙으로 된 거대한 상은 앞으로 올 나라들을 상징하지요. 바빌론에 이어 세상의 패권은 페르시아, 그리스를 비롯한 헬레니즘 세계,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에 극심한 도전을 받으며 식민지의 현실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이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다니 2,34-35)
그런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서 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거듭 출현한 악의 세력들이 잠시 세상을 뒤흔들며 한분이신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대적하더라도 결국 그들에게 남김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다니 2,44)
인간적 감각으로는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모든 악의 세력을 부수고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웁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세운 권력은 힘없이 무너져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침략자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불타고 허물어졌지요.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을 모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습니다. 아무리 외형을 아름답게 꾸민들 성전을 지탱하는 백성의 신앙의 뿌리가 부실해지면 언제든 하느님 현존을 잃기 마련이지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반란은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무너뜨리고 빼앗고 짓밟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간담을 더 서늘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한 무엇이 온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지진이나 기근,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일들, 큰 표징 등은 인간이 벌일 수 있는 비극의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일단 벌어지만 강자든 약자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통제 영역 밖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영원히 서 있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고에서처럼 한치 앞도 모르고 오만하게 구는 각종 악의 각축장이었던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어떤 힘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날이지요.
그날이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다려온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날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두려워 피하고픈 세상 종말의 날이 될 겁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선물로 주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모습이 쌓여 그 날을 맞이하는 준비가 될 겁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복음 환호송)
이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종종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장 눈앞에 악이 득세하고 어둠이 장악한 듯 보여도, 우리는 그 모두를 부수시고 당신 나라를 건설하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충실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며 영원을 희망합시다. 그때가 언제 어떻게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니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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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21,9)
'종말과 종말의 지연!'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종말에 관한 말씀'인데,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과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2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21,8)
그리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끝, 곧 종말'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 올 종말과 종말의 지연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종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는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성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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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텔레비전에서 강의하는 아들 신부의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지인이 연락을 해 왔다며 부모님께서 웃으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속 썩이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행복마저도 포기하게 만들었기에,
부모님께는 그 아들이 십자가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때문에 부모님께서 오늘은 행복해하십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무겁고 힘겨운 십자가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십자가 때문에 행복해하고 삶의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가 그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기에
성전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성전을 지었고,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성전을 민족의 자긍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진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고 자랑이며 자부심인
그 성전이 무너지면서 재난이 시작되고,
또한 그 재난에서 구하여 줄 그리스도,
구원자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전쟁과 반란, 큰 지진과 전염병의 표징 또한 종말의 징조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싸우며,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하고 또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를 외면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잃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 우리의 어깨를 끊임없이 짓누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두려움보다는
그 삶에서 움트는 또 다른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의 가치로,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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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 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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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 8)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어지는
나눔의 나라이며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삶을 향한
여정에는 언제나
식별이 필요합니다.
식별은 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정의 마무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식별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식별은 자아가
무너지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속고 속이는
자아가 드디어
회심하는 마무리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에도 소신이
필요한 우리의 여정임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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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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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의 밑바닥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기원전 19년 헤로데 대왕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의 증개축은 서기 46년에 완공됩니다. 이 성전은 서원 이행의 표시로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에 바쳐진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자(21,5),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시며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전 건물의 파괴뿐 아니라 유다인의 희생제사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70년 8월 29일 로마군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고 일부 벽만 남긴 채 불타버렸습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는 남은 벽마저 허물어버립니다. 또한 포위 공격에 의해 110만 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은 완전 폐허가 되었습니다(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신앙의 본거지이자 존재의 구심점이었기에 그 파멸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경에 복음서를 집필하였기에 이 충격적인 사건은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으로 봅니다(21,20-24).
우리는 주님의 성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 또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주님의 거룩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파괴는 역사의 비극이요 인간과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단절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의 영혼도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도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자초하는 이런 파멸 상황에서도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사랑과 정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더라도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위협과 멸망을 본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도 사실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요, 죄에 넘어지고 시련을 겪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 순간마다 거기에는 주님의 생명과 의미가 담겨있음을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행복을 바라거든 살아가며 다가오고 겪게 되는 모든 것을 희망 가운데 받아들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세상에 불의와 불평등과 부조리와 부패가 넘친다 하여도, 불안과 혼란에 빠뜨리는 자연 현상이나 전쟁과 기근, 생각을 뒤흔드는 거짓 사상에 휘말려 비극을 자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거짓과 부패로 얼룩진 뻔뻔스런 최고 권력자를 포함한 정치가들과 탐욕스런 자본가들의 모든 것을 다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지 말고 깨어 기도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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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그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한 대성전이 어느 날 돌 하나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 가지 않아 이방인들의 침략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자신들 최후의 보루요 목숨 같던 성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유린됨으로 인해 유다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파괴된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아버지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아름다운 성전을 재건축하시려는 큰 의도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만 종종 파괴도 필요합니다. 그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 존재 자체를 통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참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 세상 육화강생,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십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가 거행되는 모든 곳을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아니라 매일 그분의 몸과 피를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또한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성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옛날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가끔씩 배은망덕하고 불충실한 우리를 향해서도 파괴의 망치를 손에 드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 당신 마음에 드는 새 성전을 반드시 재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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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만이 지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오늘 복음은 심판의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이 일어나도, 또 전염병이 돌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가 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의 표징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왜 죽음의 때를 알려고 하느냐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마지막 때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나 죽음이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은총으로
여기길 바라십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죽음은 정말 잘만 사용하면 진정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은총입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죽음 때문에 지금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응하고 죽습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가 되었는데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동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수많은 삶의 태도들을 취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결과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
죽음은 분명 지금 삶의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올드’(2021)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한 해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혼을 결심한 프리스카는 남편 가이와 어린 자녀 둘과 함께 3일간 외딴섬 휴양지로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여기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30분이 마치 1년처럼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휴양지 리조트를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중 중 일부는 간질이나 암, 정신병 등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약회사에서 희귀한 광물로 둘러싸인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곳에 그들을 넣어놓고 자신들의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임상시험이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그래서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입니다.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벽을 통과하려고도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냥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가 더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여기고 정신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불만인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려는 부모에 의해 그도 죽습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뱁니다.
아기가 아이를 배고 뭔가 자신들도 큰일을 이뤄낸 것처럼 당당해 합니다.
하지만 아기는 시간의 빠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프리스카와 남편 가이와 두 성장한 아이들만 남은 상황에서 부부는 해변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지난날을 화해하고 죽어갑니다. 프리스카가 노래합니다.
“사랑의 큐피드가 쏜….”
남편 가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지? 다 잊어버렸네. 이유가 뭐였든 나 당신에게 화 풀렸어.
우리 왜 이 해변을 떠나려고 했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짧은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데 썼습니다.
남은 자녀들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는 그곳을 탈출하여 제약회사를 신고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죽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차피 끝나는 삶,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죽음을 현재에 두지 않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왜 자꾸 죽음을 미래로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있습니다.
난파된 오래된 배에서 떠내려온 청나라 자기들인데
그것들의 가치는 하나당 수억 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처음 어부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영혼이 있고 또 그 안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하느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생존만 생각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못한 상류층 유대인 부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 프랭클이 물었습니다.
“고생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납니까?”
“저는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밥 먹고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고통이 올 때 수용소에서 여러 자세를 보입니다. 탈출하려고 하고 절망하고 미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자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이 없는데 더 배고픈 이에게 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음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는데 나의 가치를 생존만이 아닌 더 고귀하게 만들어 보자는 결단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인간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죽음을 기억함’입니다.
이 죽음을 미래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썩히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면, 하느님께서 죽음이란 것으로 인간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그냥 흘려버리지 맙시다.
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면 저절로 자신의 존엄성을 높여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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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 (다니2,31-45)
"이것이 그 꿈입니다. 이제 그 뜻을 저희가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 (36)
다니엘서 2장 31-35절은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밝히지 않았던 꿈의 내용을 정확하게 진술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니엘서 2장 36-45절은 임금의 기이한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설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꿈의 내용에 대해 다 말한 다음에 그 해석을 진술하는 단락의 서두에서 '이것이 그 꿈입니다' 라는 표현을 통해, 앞의 진술한 내용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네부카드네자르는 다니엘의 말이 진실임을 인정했을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다니엘이 결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꿈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그 해석 역시 정확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저희가 ~아뢰겠습니다'에 해당하는 '네마르'(nemar)는 '말하다', '진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마르'(amar)의 1인칭 복수 미완료 시제이다.
새 성경은 '저희가'로 번역했는데, 본문의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우리'(we)이다.
혹사는 이 1인칭 복수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당시 그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집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1인칭 복수 주어는 다니엘과 그에게 꿈을 알게 하신 주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그 꿈의 내용을 계시하신 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이미 확실히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다니2,28), 꿈의 해석 역시 자기 혼자만의 통찰력으로 제시할 수 없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기위해 1인칭 복수 주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은 여전히 겸손한 태도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11월 24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21,5- 9)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 예수님께서 성전이심을(요한2,19), 그리고 그분의 영을 믿는 이들이 또한 그분의 성전임을(1코린6,19), 그리고 그 성전의 의미는 모르고 보이는 성전, 그 성전을 아름답다 기념하고 축제를 벌이는 그 사람의 관습의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이고,
또한 돌, 무너져야할 돌, 곧 죽으셔야할 당신을 말씀하신다(요한2,19) 그러면, 성전, 돌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전과 돌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다.(예제47,1~ 탈출17,6)
성전이, 돌이 부서져서 나오는 물이다. 곧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흘리신 물과 피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죽으시고 흘리신 물과 피다. 그 물(말씀)을 먹고 그 피(새 계약)로 죄가 씻겨 받는 구원이다. 그 십자가의 말씀, 새 계약으로 받는 구원이다.
그런데 그 물과 피, 그 말씀을 무시하면, 버리면 심판인 것이다. 앞19장에서 말씀하셨듯이 그 물과 피로 얻는 평화를 몰라 부서지는 것, 죽는 것이다.
(로마9,31-33)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보라,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 생명수, 곧 생명의 말씀이신 성전과 돌, 그 예수님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지만~ 그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로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가 되신다.(루가12,34~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의 심판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많은 사람이다. 혹 신천지의 이만희씨, 통일교의 문선명씨 같은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않된다. 그런 사람은 몇 안된다. 많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다’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잘 분별해 보라-많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셔서 사람의 영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는 능력과 기적의 예수님으로, 그래서 사람들의 뜻을 들어 주시는 그 그리스도로 말한다면~ 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그들의 말과 행위를 듣지도 따라가지도 말라는 것이다.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 전쟁, 반란이 왜 반드시 있어야 하나~ 시련과 환난을 통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 새로운 삶, 하늘을 살아갈 그 남은 자를 위한 것이다.
(히브12,25-28) 25 말씀하시는 분을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땅에서 지시하시는 분을 거부할 때에 저들이 벌을 피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지시하시는 분께 등을 돌릴 때에야 우리는 더더욱 그 벌을 피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26 그때에는 그분의 소리가 땅을 흔들었지만,이제는 “내가 *한 번 더 땅만이 아니라 하늘까지 뒤흔들리라.”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27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이 치워져 흔들리지 않는 것들만 남는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28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려 하고 있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와 함께 존경과 경외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를 드립시다.
=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예배로 끝까지 남을 수 있다.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듯이 제사의 예배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성전, 돌)을 제물로 십자가에서 구원의 제사를 완성하셨고, 즉 죽으시고 부서지셔서 구원의 진리, 그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그리고 그분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그분의 성전이 되었으니 그 모든 것, 그 진리 안에서 나의 열심, 그 *예물로가 아닌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하느님께 존경과 경외의 진실된 마음으로 나를 드리는(버리는, 죽이는) 그 *헌금의 진실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요한4,23)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아멘!!!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복음(루카21,5~11)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들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곳이다." (5~6)
루가 복음 21장 5~19절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여러 징조들, 그리고 대박해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이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을 하신 후, 그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그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시고, 대신에 전쟁, 반란,
민족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천체의 큰 표징 등의 종말론적인 징조들 (Eschatological Signs)을 언급하신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대박해를 겪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신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예언 성취의 시기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이 성취될 때에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로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의 징조들이 복합적으로 예언됨으로써, 대박해를 겪어야 할 자세에 대한 교훈은 당시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시기를 살아갈 성도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루가 복음 21장 5절~19절까지는 성주간의 올리브산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태오 복음 24장과 25장 및 마르코 복음 13장과 병행을 이루며,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및 종말과 그리스도 재림에 관계된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소묵시록'(Little Apocalypse)이라는 별명이 불려지기도 한다.
그중에 21장 5절과 6절은 올리브산 설교가 주어진 동기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일차적으로 A.D.70년에 발생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예언을 성전 안에 계시다가 성전 밖으로 나오실 때 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태 24,1; 마르 13,1),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계속적으로 머무르시면서 주신 것처럼 묘사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성전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또한 몇몇 사람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질문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은 성전 내부에서 자세하게 볼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다르게 기록한 것은, 지금까지 성전 안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들과 치열한 논쟁의 절정으로써 성전 멸망을 다룸으로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맞이할 최후의 심판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대교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붕괴된다는 것은 동물의 희생을 통한 구약의 제사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단 한 번 흘리신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과 더불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에 대한 심판적인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루카 복음 사가는 장소적 이동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 시킴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성전의 화려한 외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두 렙톤과 같은 경건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진실된 신앙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루카복음 21장 5절의 '아름다운 돌'로 변역된 '리토이스 칼로이스'(lithois kalois;
beautiful stones)는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된 희고 큰 대리석을 말한다.
이 돌은 주로 성전의 기초와 기둥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자원 예물'로 번역된 '아나테마신'(anathemasin; gifts dedicated to God)의 원형 '아나테마'(anathema)는 '아나티테미'(anatithemi)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성전에 바쳐진 물건', 즉 '봉헌된 제물'을 가리킨다.
이 자원 예물들은 임금이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성전에 바친 물건으로서 성전을 장식하고 전시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이 아니라 영과 진리안에서 영이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다(요한 4, 20~24).
루카 복음 21장 6절의 '때가 올 것이다'에 해당하는 '엘류손타이 헤메라이'(eleusontai hemerai; the days will come)에서 '때', '날'로 번역된 '헤메라이'(hemerai; the days; the time)는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예비된 날로서 바로 하느님의 진노가 현실 가운데 드러나는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A.D. 70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토(Titus)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성전이 화염에 휩싸여 전소될 때를, 40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예지 능력으로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표현은 철저한 파괴와 멸망에 대한 예언인데, 루가 복음 사가는 마태오나 마르코 복음 사가에 비해서 성전 파괴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오해를 막기위해서 성전 파괴를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많은 종말적인 사건들 중 하나로만 기록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바로 이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것을 기다렸다.
루카 복음 사가는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상황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도래를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재림의 자연이 예수님의 예언과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밝히며, 또한 인내심으로 기다리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루카21,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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