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0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신약시대를 부르는 구약시대 》
말 2:10~12
<만유의 주재 하나님>
하나님을 수식하는 많은 말 중에서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 있습니다.
‘만유 萬有’ 만 가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딱, 만 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주재 主宰’ 주인 ‘주’ 자에 재상 ‘재’ 자입니다.
‘만유의 주재’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유의 주재’ 그분이 누구이겠습니까? ~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이렇게 불릴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헤아리십니다. “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면선 주관하십니다.
과연 만유의 주재이십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서 예배하고 계십니까?
제가 늘 강조하기를 ‘하나님’ 하면 3가지를 반드시 연상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공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셋을 뭉뚱그려 하나로 하자면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 되십니다.
☞ “만유의 주재 하나님”
창조하신 하나님, 사랑하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만유의 주재 하나님”
오늘 설교 제목이 “신약시대를 부르는 구약시대”입니다.
2천 년 전, 구약시대가 끝이 나고 신약시대가 열립니다.
저절로 열립니까? ~아닙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 통치하심으로써 신약시대가 옵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재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왜 구약시대를 마치시고 신약시대를 여시는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1. 하나님 사람의 불변성>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실은 ‘사람 창조’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시고, 하나님과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떠납니다. 선악과 사건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지금까지 진행형입니다. “아버지에게 등 돌리는 아들” 지금도 되풀이됩니다.
창조 이래 “아버지에게 등 돌리는 아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TV예능 프로입니다. 탤런트 백일섭이 출연하는데, 그가 한 말입니다.
“평생,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는 대화가 안 됩니다.
이게 왜 이렇습니까? 왜 이런 줄 아십니까?
모든 자녀가 첫 사람 아담 하와의 선악과 사건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그 중에서 특히 “아버지와 아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습니다.
아들과 진지한 대화를 해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그 아들!
이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 바로 이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단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아들과 아버지!
그렇다고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없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소통이 단절된 “아버지와 아들” 그 모습이 오늘날까지 “하나님과 인간”으로 이어집니다.
자식은 아버지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펄펄 끓습니다.
예수 안 믿는 이들에게 전도할 때 쓰는 말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 이 상황을 전하는 구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을 향한 사랑은 펄펄 끓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불변성”입니다.
<2.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
창조이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식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딨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면서 살지만 하나님은 변치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계보는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떠났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에 나가 살지만, 그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2세 중에서는 ‘셋’(창 4:25)
아담 하와의 7대손으로 ‘에녹’(창 5:24)이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아담 하와의 10대 손으로 ‘노아’가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계보가 이어지다가 하담 하와의 20대손 아브라함에 이릅니다.
☞ 하나님과 아브라함,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 사이, 본격적인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로 부르는 ‘구원받은 자들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을 통하여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야곱’을 건국의 아버지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람 사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신 이유는 사람 중에서 더 많은 이들을 구원받게 하시려 함입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은 하나님의 영의 드러남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 때에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솔로몬 때에 꽃을 피웁니다.
다윗-솔로몬, 두 왕의 시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최고로 번성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면,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손바닥 뒤집듯이 또 배신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잠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집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에게 손짓을 합니다.
☞ 인간은 하나님 손짓을 기를 쓰고 거부합니다. 아담 하와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입니다.
<3. 남은 자들의 역사성>
‘하나님 사랑의 연속성’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
이 두 속성은 창조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은 자들의 역사성’이 있습니다.
주전 586년, 유다가 망하고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남은 자들의 역사성’에서 클라이막스입니다.
자칫 ‘남은 자들의 역사’가 단절될 우려가 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포로귀환’이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집니다.
포로귀환 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사람들, 그들의 신앙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 바빌론에서 되돌아온 사람들, 그들은 거의가 바빌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다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였음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들에게 고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빌론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고, 소수 제사장으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70년 전 포로로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여간한 신앙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축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신앙이 점점 식어갑니다. 현실이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지은 솔로몬 성전에 이어 2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정치적 현실이 암울합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독립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국입니다.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주전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세계를 통일하고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속국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바빌론에게 멸망 당한 이후 자립 국가로 세워지지 못합니다.
그런대로 민족의 정체성은 유지되었지만, 연이어 제국의 통치아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아픔이 컸습니다. “왜 우리는 독립된 조국을 갖지 못하는가?”
정치적인 암울한 현실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속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데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역사에서 ‘남은 자들’이 끊어진 때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들의 역사성”입니다.
<4.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
“남은 자들의 역사성”은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남은 자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을 지킵니다.
세상의 종교학자들은 과학이 발달했으니, 종교는 소멸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종교학자들의 이러한 종교 소멸 예측은 번번히 빗나갔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과 “남은 자들의 역상”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닌 우상, 세상의 잡신을 숭배하는 사교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미신과 점쟁이와 푸닥거리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용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미신과 푸닥거리와 점괘를 용인하실 까요?
그것이 선악과나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입니다.
☞ 오늘 설교에서 제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강조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이 셋을 합치면 “만유의 주재 하나님”
만유의 주재 하나님께서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로서 다스리시는 데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1. 하나님 사람의 불변성>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등지는 일이 있지만,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이 속성을 “하나님의 불변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
두 번째,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을 말씀드렸습니다.
혹자는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신화’로 치부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은 결코 신화가 아닙니다. 선악과 사건은 창조이래 지금까지 지속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삼거리에 서 있습니다. 자기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한쪽 길은 선악과의 길이고, 한쪽 길은 생명과의 길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세 갈래 길 삼거리에서 늘 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칫 생명과의 길을 버리고 선악과 길에 발을 내딛습니다.
그래서 평생 한 교회에 속하여 예배하는 신앙을 지속해야 합니다.
<3. 남은 자들의 역사성>
세 번째, “남은 자들의 역사성”을 말씀드렸습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 중에서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을 두십니다.
기독교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미전도 종족 안에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간과하시지 않을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4.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
남은 자들의 역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을 말씀드렸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다녀가심으로써 이 땅에 기독교가 생겼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은 구약시대입니다.
이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도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면면히 이어져 오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이렇게 만유의 주재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입니다.
<신약 시대를 여시는 하나님>
만유의 주재 하나님은 창조이후, “하나님 사랑의 불변성” “선악과 사건의 현재성”
“남은 자들의 역사성” 그리고 “하나님 신앙의 연속성”으로 세상을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통치하시다가, 구약시대를 마감하시고 신약시대를 여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말라기를 통히셔 눈여겨 볼 것은 “남은 자들의 역사성”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남북왕조로 분열 –남북왕조 멸망 –포로귀환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남은 자들” 그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습니다. 남은 자들의 명맥이 위태롭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결단하셨습니다. “구약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시대를 열어야겠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래서 “신약시대를 부르는 구약시대”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