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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산책 앙코르와트 문명과 기후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앙코르와트의 정면 모습<출처: Bjørn Christian Tørrissen at Wikimedia.org>원본보기 목차
앙코르와트 문명의 역사동남아시아에 세워진 가장 찬란한 문명이 앙코르와트이다. 이 문명을 일으킨 앙코르 왕조는 자바로부터 주권을 회복한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시작되었다. 공식 명칭은 ‘캄부자(kambuja)’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앙코르 왕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앙코르 왕조는 자야바르만 2세 이전의 국가인 진랍(Khmer Empire, 眞臘)의 경제적 번영 위에 세워졌다. 진랍 지배층의 생활은 아주 화려했고 번영을 이루었다고 중국 ‘수서(隋書)’에 기록되어 있다. “수도인 이사나 성엔 2만 가구가 살았다. 30여 개의 커다란 성이 있었다. 왕은 3일에 한 번 알현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왕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천여 명이 되었다.” 기록에 나오는 왕은 이샤나브만(611~635년경)을 가리킨다. 802년부터 1431년까지 앙코르 왕조의 공식적인 왕들은 모두 37명이다.
앙코르 왕조가 세워진 곳은 앙코르 평야 북방 40km 부근에 위치한 ‘프놈 쿨렌’의 낮은 산(구릉지역)이다. 이 지역은 메콩 강과 인접해 있다. 아울러 톤레사프 호수와 맞닿아 있어 충분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이다. 톤레사프 호수는 건기에 약 3천km2, 우기에는 약 3배 이상 면적이 넓어지는 담수호다.
앙코르 왕조는 12세기 무렵에 가장 강력해졌다. 지금의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일부를 포함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뛰어난 도시계획과 건축, 조각, 미술과 회화를 남겼다. 왕도 앙코르는 ‘캄부자 왕조’에 의해 예술혼을 꽃피운 종교 도시의 중심지였다. 역대 왕들에 의해서 7개의 대도시와 약 1,200개의 사원이 들어선 이곳은 힌두교와 불교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지상에 구현된 천상의 세계앙코르 왕조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수리야바르만 2세 때였다. 1114년 왕위에 오른 수리야바르만 2세는 4년 후 앙코르와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31년 만에 앙코르와트 축조에 성공했다. 당시엔 기후조건이 적당하여 벼농사가 잘 되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는 수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해 궁전과 신전을 지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모든 부분은 천상의 세계를 지상에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중앙 한복판에 앙코르와트에서 가장 높은 탑인 우주의 산 ‘메루’가 솟아 있다. 낮은 탑 4개는 메루의 낮은 봉우리들을 나타낸다.
주변을 둘러싼 벽은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산을 묘사하며, 바깥에 있는 해자는 대양을 가리킨다. 길게 이어진 부조는 화려함 그 자체이다. 왕이 중무장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코끼리를 타고 숲을 행진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날씬하고 관능적인 무희들이 천국의 환희를 약속하는 춤을 춘다.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최고의 석조 건축물이자 크메르 제국의 찬란한 유산이다. 꿈의 만다라 앙코르와트는 중앙탑(수미산)을 중심으로 4개의 탑을 배치했다. 입구에는 250미터 길이의 다리가 있었다. 정면 850미터, 측면 1,050미터의 장방형 건물로 무려 27만 평의 거대한 넓이였다. 3개의 사원을 중심으로 100여 개의 작은 사원과 5천여 개의 석상 및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다라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바라보는 완전한 세계를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이런 만다라를 3차원 건축으로 입체화한 것이 앙코르와트다.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에는 “최고의 신 비슈누가 세 걸음을 내디딤으로 대지의 영역을 하늘로부터 가르고 그가 내딛는 세 발자국 속에 모든 존재들이 거하도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만다라가 완전한 세계임을 의미한다. 즉 3개의 영역으로 분할된 구조인데 이는 각각 지하계, 인간계, 천상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비슈누의 성스러운 거처였다. 힌두교 신화의 우주 창조관을 내포한다는 말이다. 비슈누와 자신을 일체화했던 수리야바르만 2세가 비슈누의 성스러운 거처를 만들려는 염원으로 지은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미의 절정은 수리야바르만 2세를 신성화한 부조물이 존재하는 입구에 있다. 창조의 신 브라마가 4면의 얼굴을 가진 것처럼 4개의 사각형 형태로 건축했다. 앙코르와트의 백미는 단연코 수미산 정상이다. 수미산 정상은 태양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마하바라타에 기록되어 있다. 힌두교 경전에 묘사된 것처럼 벽이 최상의 보석으로 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보석은 누군가가 훔쳐가서 지금은 없다. 앙코르톰과 바이온 사원앙코르와트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면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들어진 건축물은 불교의 영향을 받는다. 불교신자였던 두 왕비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자야바르만 7세는 대승불교의 이념을 토대로 사회사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국에 병원을 건축해 모든 계층에 개방했다. 그가 건축한 위대한 바이온 사원은 불교적인 자비로운 군주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앙코르 왕조는 이때부터 불교를 국교로 정한다. 자야바르만 7세는 국력이 회복되자 왕도 주변에 대규모 불교사원을 계속 건축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앙코르톰은 한쪽 면이 3킬로미터에 달하는 정방형 구조로, 둘레가 모두 12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도성이다. 바깥쪽에는 폭 130미터의 해자와 약 8미터 높이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성벽에는 서남북 방향으로 각기 한 개, 동쪽 방면으로 두 개 등 모두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높이는 23미터이며 폭은 4미터다.
성문 위에는 연꽃 관을 머리에 두른 4면 보살상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도시 중앙에는 붓다를 본존으로 하는 바이온 사원이 있다. 왕궁은 그 북서쪽 문에서 정면을 향해 서 있다. 앙코르톰에는 사원과 사당 등 80곳 이상의 유적이 남아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위대한 건축물이 바이온 사원이다. 대승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사원은 거대한 얼굴이 사면으로 조각되어 있는 돌 봉우리들의 어지러운 집합체이다. 돌 봉우리들은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두툼한 입술, 뭉뚝한 코, 추켜올린 눈매, 튀어나온 널찍한 이마, 이 모든 모습에 공통된 것은 미소와 명상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무인보다 자애로운 민중의 어버이,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로 기억되기를 원해 이런 건축물을 지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 조각은 이러한 그의 소망을 잘 담아내고 있다. 앙코르 왕국의 기후앙코르 왕국이 위치한 동남아시아는 몬순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는 5월부터 10월까지다. 열대수렴대(Intertropical Convergence Zone)가 북상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 11월부터 4월까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의 날씨를 보인다. 몬순은 계절풍이라고 부르는데 계절풍은 화려한 크메르 문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지구의 온난기는 9세기에 시작되었다. 온난기가 되자 크메르 지역의 정치 · 경제의 중심은 메콩 강 상류로 이동한다. 그곳은 캄보디아 중앙 분지인 톤레사프 호수 부근이었다. 톤레사프는 ‘큰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 만큼 넓다. 건기에는 면적이 약 3천km2, 길이가 66km에 달한다.
그러나 우기에 접어들면 메콩 강에 홍수가 발생한다. 강의 흐름이 역전되어 강물이 톤레사프로 흘러든다. 호수의 물은 급속히 불어나 주변의 밭과 숲으로 흘러넘친다. 가장 넓을 때의 면적이 1만 6천km2에 깊이가 9m인 대호수로 변한다. 톤레사프의 이런 풍요로운 환경은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낙원이었다. 풍성한 벼농사는 찬란하고 부유한 문명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제공했다. 그러다 보니 톤레사프는 고대부터 패권을 다투는 영주들의 싸움터이자 살벌한 전쟁이 벌어지는 무대였다. 그러나 802년 크메르의 자야바르만 2세가 주변의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력과 조공, 힌두 신앙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합했다. 자야바르만 2세는 45년간 통치했다. 이후 세 왕조가 크메르를 다스렸다. 이 전성기는 중세 온난기에 해당하는 900년에서 1200년까지의 긴 우기였다. 정교한 관개시설앙코르 왕국이 정교한 수리시설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들은 매년 우기에 빗물을 저장하고 산악에서 내려오는 물도 통제했다.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왕국을 지탱한 힘이 바로 이 수리시설이라고 말한다. 앙코르 왕국의 왕들은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거대한 신전과 사원을 만들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하려면 쌀 수확이 내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이 풍부해야 하고 대규모 관개시설도 필요하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수리시설을 사용한 것일까? 1994년 우주왕복선 엔데버 호에서 촬영한 레이더 사진이 비밀을 밝혀주었다. 북부 산악지대에서 두 개의 저수지로 물을 끌어들이는 대북부운하의 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앙코르와트 국제 조사단은 NASA 레이더 사진, 최첨단 GPS 기술, 초경량 항공기까지 동원했다. 그리고 과거에 거주지와 수조들이 작은 도로와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던 1천km2에 달하는 앙코르의 넓은 인공 풍경을 지도로 만들었다. 앙코르의 지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져 있다. 경사도는 수평거리 1km당 표고 차이가 1m 정도다. 이들은 표고 차이를 이용해 물을 평야지대에 공급했다. 앙코르 지역에 건설된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농지의 면적이 9,000만 평이었다. 이처럼 효율적인 수리체계를 확보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바라이’라고 불리는 3개의 큰 저수지에 세 강에서 흘러드는 물을 저장했다. 그리고 필요한 곳에 공급했다. 이 물은 사원의 제례용 웅덩이와 저장시설로 보내졌고, 운하를 통해 앙코르 남부의 논에도 공급되었다. 저수지는 홍수를 막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앙코르 왕국의 인구는 75만 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 가운데 10~20만 명이 저수지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초에 건설된 ‘서 바라이’는 톤레사프 호수에서 거슬러온 물고기로 가득했으며, 앙코르는 쌀과 풍부한 열대과일로 모자라는 것이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라이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었다. 지속된 건기와 문명의 붕괴앙코르 왕국은 15세기에 쇠퇴했고, 도시들은 16세기 말에 버려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역로가 앙코르에서 멀어진 걸까? 사원을 건축하느라 국고가 파탄 난 걸까? 기후학자들은 농업생산력의 쇠퇴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후분석에 의하면 기후온난기가 지나고 소빙하기가 닥치면서 건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건기에는 운하가 침니(沈泥)로 막혀 물 공급이 어려워지고, 대대적인 개간으로 토양이 훼손되었다. 토양침식을 막아주는 나무의 벌채도 심했다. 물이 공급되지 못한 논은 식량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기에 수리시설의 노후화가 농업생산력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앙코르와트 국제조사단은 앙코르 문명이 성장할수록 수리시설도 점점 복잡해졌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리시설은 갈수록 복잡하고 커졌다. 그러다 보니 계절풍 지역에 필요한, 홍수와 가뭄의 대비가 어려워졌다. 앙코르 왕국이 만든 수리시설은 정교했지만 철저하게 인공적이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소빙하기에 접어들어 발생한 엘니뇨나 라니냐는 앙코르 왕국의 멸망을 재촉했다. 한랭한 라니냐 상태가 우세하면 여름 우기에 많은 비가 내린다. 그러나 소빙하기와 함께 자주 발생한 엘니뇨는 가뭄을 몰고 왔다. 체계적인 수리와 보수를 하지 못했던 앙코르의 수리시설은 기능을 잃게 되었다.
앙코르와트 문명은 한꺼번에 붕괴하지 않고 천천히 무너졌다. 사람들은 점점 뿔뿔이 흩어졌다. 앙코르의 웅장한 건축물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가뭄이 들었을 때처럼 황폐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지금 앙코르와트에는 금을 입힌 탑도, 밝게 채색된 신전도 없다. 하지만 미로 같은 계단, 메아리가 울리는 긴 회랑, 왕의 행차와 군대의 행진, 기묘하게 춤을 추는 무희들을 조각한 부조들은 여전히 우리를 매혹한다. 이런 자랑스러운 유적을 가뭄이 사라지게 한 것이다. 열대우림에 파묻혔던 앙코르와트 문명은 1860년에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1861)가 발견했다. 그가 앙코르와트를 소개한 후 많은 사람들이 앙코르와트 연구를 시작했다. 앙코르와트 문명의 붕괴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어 팁으로 소개한다. 스펜서 웰스는 그의 책 ‘판도라의 씨앗’에서 앙코르와트 문명을 붕괴시킨 것은 모기였다고 말한다. 수심이 얕고 볕이 드는 논과 유속이 느린 수로는 말라리아 모기의 완벽한 서식처였다는 것이다. 모기가 늘면서 많은 수의 주민들이 감염됐고, 사람들이 죽거나 떠나면서 문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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