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숙 시인의 시집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책 소개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강정숙 시인의 시조집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이 가히 시인선 004로 출간되었다. 등단 22년 만에 두 번째 시조집을 선보이는 강정숙은 과작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과작이 결코 흠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시집 속에 담긴 언어의 숨결들이 한결같이 절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강정숙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함부로 언어를 남발하지 않고 함부로 토설하지 않는 시인의 덕목을 간직한 사람이다. 이 시집은 다정함의 독백이면서 쓸쓸함의 발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강정숙 시인만의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또한 반성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이 빚어나가는 자기 성립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강정숙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2002년《중앙일보》중앙신인문
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과 시조
집 『천 개의 귀』가 있다. 수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mail: tmxje5025@daum.net
시인의 말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일, 내 몫이 아니라며
실없이 능치면서 속엣말 밀어냈다.
하세월 흐른 후에야 고스란히 알게 된다.
너로 인해 슬펐고
너로 인해 아름다웠음을.
2024년 6월
강정숙
자작나무 숲에서
원대리 자작나무는 결마다 상처다
부대끼지 않으려고 제 가지 떨군 자리
흉터로 무늬를 새겨 한 풍경 이룬 숲
견디며 사는 게 어찌 그들뿐일까
부딪치고 멍들어도 서로를 에두르며
빛나는 생의 한때를 꿈꾸는 게 아닌가
들켜버린 마음인가, 잎잎 발그레하다
발등 부은 한나절이 바람 따라 쓸리고
미답의 우듬지 새로 축복 같은 볕이 든다
미안하다, 몸
깊이 없는 날들을 눌러주고 싶었나
대책 없이 허물어진 뼈를 받쳐 주려 했나
연붉은
내 늑골 속에
돌들이 살고 있다
무거움 가벼움에 떠밀리며 사느라
거둘 것 내보낼 것 균형을 잃고 만 죄
함부로 써버린 몸아
그러니 문득
미안하다
오리의 시간
살얼음낀 가장자리 오리 몇 어두워진다
저수지 깊은 안쪽 먹잇감이 풍성한데
거기에 닿기까지가 영원처럼 멀다
얼음강 건너서 온 탈북녀 분임 언니
24시간 해장국집 설거지통에 붙박여
검붉은 발가락 열개 오리처럼 뒤뚱댄다
낮게 엎드릴수록 된바람을 덜 타는 것
발목은 젖었으나 날갯짓은 팽팽하다
밀고 갈 얼음길 너머 중심부가 반짝인다
무릎 안부
한철 제 소임을 다한 밭둑 억새들과
그또한 일을 마친 쇠뜨기 마른 풀잎
한순간 바람이 일자
반 휘어 아찔하다
휘거나 접는 것은 무릎의 일이거늘
한평생 구부려 살아 연골 없는 하루가
꺾일 듯 꺾일 듯 다시,
일어서는 저물녘
오늘 아침
쪽 달이 새파랗게 얼어붙은 아침이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아침이다
들판의 무른 적막도 날이 서는 아침이다
바람 없는 서쪽으로 실금 가는 아침이다
출근길 구두 뒤축이 더 딱딱한 아침이다
어제가 오늘의 등을 가만 미는 아침이다
해설
시인의 눈에 비친 다정하고 쓸쓸한 세계
임지훈(문학평론가)
의미는 대상 자체에 있지 않다. 의미는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달려 있다. 한여름 나무의 짙은 푸르름도, 타오르는 저물녘의 붉은 노을도, 혹은 녹아 흐르는 초봄의 강물조차도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오직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에 의해서만 유의미한 사물로 거듭난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世界)’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던져진 존재의 무대에 불과할 따름이기에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며, 오직 세계-내-존재에 의해서만 유의미해질 수 있다”고.
그럼에도 세계는 우리의 눈에 의미로 가득 찬 충만한 세계인 것처럼 감각된다. 눈에 비친 무수한 아름다운 사물들이 본원적으로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어떠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세계는 우리를 향해 무수한 의미의 손짓을 보낸다. 사계절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역동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되며,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에 대한 의미를 포착한다. 정녕 세계 자체가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본원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자연의 역동 속에서 무수한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언어화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며 사물의 역동을 의미의 체계로 받아들인다는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 부여 행위는 의식적일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해서,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과 현상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고 의미를 포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사물을 통해, 세계를 통해, 자신을 반성적으로 발견한다. 매 순간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충만한 의미의 세계란 뒤집어 말해 내 안의 언어화되지 못한 의미들이 눈앞의 사물을 경유하여 의미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눈앞에 둔 강정숙 시인의 시집,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정련해 낸 수많은 시적 공간이 무수한 적층을 이루며 세계가 지닌 부단한 면모를 다채로운 모습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반 접혀 홀로 삭는 산모롱이 너와집”(「구절리 옛집」)을 바라보며 그 속에 뉘인 시간을 바라보고, 또 한편에서는 “달빛 아래 부석사”(「그 가을, 부석사」)를 바라보며 부석사 그늘에 맺힌 시간을 바라본다. 그뿐일까. 무수히 많은 공간이 강정숙이라는 시인의 눈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니, 그 모습이란 실제의 공간을 넘어 독특한 언어적 미감을 포괄한 고유한 시적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은 시인의 고유한 내면을 통과해 특수한 의미를 부여받으며, 무관계한 사물의 세계 또한 서로를 에두르는 특수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를 간추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물은 시인의 눈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무정한 세계에서 벗어나 고유한 의미망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고 말이다. 이처럼 시인의 독특한 시각이 있기에 자작나무 숲에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은 “미답의 우듬지 새로 축복 같은 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