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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나도, 믿음으로
예레미야서 1장 4-10절, 누가복음서 4장 21-30절
육성한 목사
[거친 길에서 피어나는 생명]
긴 설 명절 연휴를 보내고 왔습니다. 저도 양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귀여운 조카도 보고, 오랜만에 할머니, 할아버지께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서 인사도 드렸습니다. 명절 연휴라고 해서 쉼을 마음껏 누리진 못합니다. 직장 일을 조금 덜 할 뿐이지 음식과 선물 준비, 먼 거리를 오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니 명절은 늘 분주합니다. 자식, 손주를 맞이하는 어른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 손주가 오면 반가운데, 가면 더 반가운 것은 결코 농담은 아니실 것입니다.
그래도 휴일이라고 하니 짬짬이 시간을 내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거나 모처럼 여유를 즐길 계획을 세웁니다. 저도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골라잡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죠. 심사숙고해서 잡은 책은 어려웠고 눈에도 들어오지 않아 결국 드라마 한편을 완주했습니다.
연휴 동안 본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입니다. 전쟁 지역을 누비던 천재 외상 외과 전문의 백강혁이라는 인물이 국내 대학병원의 중증외상팀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는 유명무실했던 중증외상팀을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중증외상센터로 탈바꿈하고 놀라운 수술 실력으로 환자들을 기적적으로 살려냅니다. 아시다시피 외상 외과는 병원 수익도 별로 나지 않고, 업무의 강도도 매우 높아서 의사들에게 전공 기피 순위 0순위로 뽑힙니다. 그럼에도 외상 외과, 그중에서도 중증외상센터를 선택해서 고군분투하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아주 감동적이고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저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쪽잠을 자며 죽어라 애쓰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의사 재원은 깊은 낙담에 빠집니다. 그때, 중증외상센터에서 유일하게 5년을 버틴 간호사 장미가 그를 위로합니다.
“저 봐요. 내가 뭐 슈퍼히어로라서 증증외상 5년차 시니어 간호사일까? 해야 되니까! 누군가는 해야 되는데 그게 하필 나 인거고, 또 재수없게 하필이면 재원 샘인거고 그런거죠 뭐. 응?”
우리는 편하고, 예쁜 꽃길을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넘어지고 찔리고 까지기 일쑤인 거친 길은 되도록 피하고 싶죠. 그러나 누군가는 힘들고 버거운 자리에 서야만 하며, 거친 길을 묵묵히 걸어야만 합니다. 부담스러운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다가도 이내 자신의 소명을 찾고 고된 길을 버텨내는 이들로 인해 정의와 사랑은 꽃을 피우고 그 길은 생명의 길이 되어 세상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나의 말을 네 입에 맡긴다]
오늘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에는 버겁고, 고된 길로 부름을 받은 한 사람이 등장하죠.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당신의 뜻을 전할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에 닥칠 일을 점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지금 애타는 마음을 세상을 향해, 주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한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며 거절합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렘 1:6)
실제로 나이가 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자신의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느끼는 당혹스러움, 두려움, 불안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정념을 느끼고, 어두운 현실에 주목하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아주 씁쓸한 것이었습니다. 희망찬 내일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평온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했지만, 자신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에도 그들은 여전히 안도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안도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예레미야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의 모습은 평화가 아닌 축복이 아닌,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예레미야서 5장에는 하나님이 보신 유다의 죄악 가득한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5:7),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착취하며, 가난한 자의 권리를 짓밟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공정한 판결을 외면했고,(5:28-29) 예언자들은 거짓을 말하며, 제사장들은 권력을 좇아 불의를 묵인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히려 이러한 타락을 보지 못하고 평화의 소식에 기뻐하며 현실을 외면합니다.(5:31) 예레미야는 바로 이렇게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지금 깨닫지 못하고, 바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현실을 보여주고 깨우치게 하는 소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고된 길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짊어져야 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외침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무시와 핍박을 견디는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느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거절은 버거운 부르심 앞에 연약한 인간이 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설득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늘 너와 함께 있으며 보호해 주시겠다며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맡기십니다. 예레미야는 두렵고 떨리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용기를 내서 불편하고, 힘든 선택을 한 것입니다.
[불편한 선택]
지난 1월 21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행사 중에 열린 ‘국가 기도회’에서 매리언 에드거 버드 주교(Mariann Edgar Budde)가 한 설교가 SNS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 다음 날,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취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래서 이날 예배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15분 남짓한 설교 말미에 버드 주교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서 “성소수자와 이민자, 난민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호소를 합니다. 이 호소에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성소수자와 이민자 같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 조치를 해제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취임 연설 직후에는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들을 단속하고 추방하는 행정명령들에 잇따라 서명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버드 주교는 대통령 면전에서 강하게 우려를 표하며, 성소수자, 그리고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정책에 반대하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예배 후에 버드 주교의 설교가 매우 불쾌하다고 말하며 사과하라고 했지만, 버드 주교는 타인을 위해 자비를 베풀라고 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버드 주교의 설교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 지금 이 나라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민주당 가정에도, 공화당 가정에도, 무당파 가정에도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아이들이 존재합니다. 그 아이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의 농작물을 수확하고, 사무실을 청소하며, 가금류 농장과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 우리가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서는 이들 중에는 시민권자가 아니거나 합법적인 서류가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민자들은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세금을 내고, 우리의 선량한 이웃입니다. 대통령님, 부디 간청합니다. 부모가 추방될까 두려워하는 아이들과 본국에서 전쟁과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자비와 환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낯선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도 이 땅에서 한때 낯선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개신교 예배 형태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있습니다. 이 기도회는 1966년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 시작되었으며, 정교 유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고초를 당한 국민과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당시 기도회 설교를 맡았던 한 목사는 “하나님이 군사혁명을 성공시켰다”는 망언을 하곤 했습니다. 이후에도 국가조찬기도회는 이름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를 선포하고 지도자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버드 주교처럼 불편한 진실을 외치는 예언자의 자리에 서는 대신, 우리 개신교 역사는 안전한 권력의 옆자리를 선택했습니다.
[굳이 불편한 고향으로]
오늘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고향은 우리에게 어떤 곳입니까? 익숙함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곳이지만, 때로는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툭툭 던지는 잔소리, 과거를 놀림거리 삼는 말들,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하는 분위기 등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신앙생활을 했던 모교회를 방문하면 다시 어린 아이가 되는 기분입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성도님들이 저를 이렇게 부릅니다. "야, 성한아!" 따뜻한 부름이죠. 곧이어 이런 말도 따라옵니다. "아, 이제 목사님인데, 성한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데..." 과거의 기억과 익숙함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신 후 곧바로 이어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듣는 이들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 가난한 이들의 회복, 병자의 치유, 평등 정신의 실현! 예수님이 앞으로 펼치실 사역과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었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난다고 하니 감탄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예수님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 말 속에는 과거의 기억에 기반한 평가절하와 우월감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과거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에게서 성령으로 나셨다고 고백하지만, 당시 나사렛 예수는 손가락질받는 사생아의 아들일 뿐입니다. 목수,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사를 지어 먹고 살고,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겨우 풀칠하며 살던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반응에 발끈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날선 반응은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익숙함 속에서 오는 배척,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편견, 그리고 변화무쌍한 태도에서 드러나는 불신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선 예수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 익숙함, 과거의 기억은 진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전해질 놀라운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월의식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들에게만 국한된 것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태도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시대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방인 사렙다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 장군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격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내쫓고 절벽으로 밀어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듣는 것은 좋지만, 그 은혜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닐 때 우리는 격렬히 거부하곤 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은혜의 소식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 포로 된 자, 병든 자를 위한 것이었고, 그 안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들의 자존심과 특권 의식을 건드리는 순간, 그들은 예수를 무참히 밀어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이들이 특별히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사실 그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법과 윤리, 전통과 신념에 따라 반응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따르면 이방인을 멀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신앙은 일시적인 보편과 윤리를 넘어서는 믿음의 도전, 불편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겁이 나지만, 믿음으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주어진 본질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매순간 내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형성해 나가고 창조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선택은 수많은 외부 요인에 의해 제한됩니다. 가족, 문화, 사회적 배경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형성하며,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타인의 기대와 평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타인과의 관계가 힘들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서 얼마나 제한되는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고, 사회적 틀 안에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 평가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이들은 스스로 예수를 거부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자유로운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익숙함과 편견, 사회적 기대 속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기대와 선입견, 편견과 우월의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오랜 신념과 전통, 보편과 윤리를 흔드는 존재였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편함을 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에서 참된 선택은 익숙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상식과 윤리를 뛰어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세상의 논리에 맞지 않는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나사렛 회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과거의 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하게 다가온 예수를 맞아들였더라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체험하고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익숙함이 아니라, 불편함, 낯섦, 새로운 선택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에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책 『두려움과 떨림』에서 바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선택이란 때로 상식과 윤리를 초월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도덕적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 앞에 섰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희생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결코 옳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잘못된 일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판단을 넘어,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신앙의 도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신앙은 맹목적인 복종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이성과 논리가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에서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차원의 신비 속에서 이루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신앙은 확신의 영역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신앙은 불확실성을 향한 모험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순간까지,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깊은 어둠과 침묵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예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붙들고 걸어갑니다. 결국,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르심 속으로 뛰어드는 그 결단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이성과 윤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신앙의 도약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이삭 대신 번제를 위한 숫양을 예비하셔서, 죽음이 아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길, 거칠고 험난한 길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예레미야에게 그 길은 예언자로의 부르심이었고, 예수에게는 십자가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여정에서도, 우리 생명사랑교회에도 망설이고 머뭇거리게 되는 그 길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불확실성과 모순을 견디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불편한 선택,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신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매순간 어떤 선택을 하며 스스로를 빚어나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편하고 안락한 꽃길을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반짝이는 존재로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앞에는 불확실하고, 불편하고, 낯설고, 두려운 선택들도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미련하다고, 너에게 이롭지 않다고, 혹은 이 세상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외면하는 선택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택들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편안한 길과 어려운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르는 믿음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작은 선택에서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해 보십시오. 그렇게 쌓이고, 또 쌓인 작은 믿음 선택과 결단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주님, 우리는 꽃길을 꿈꾸지만, 거친 길 위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운 자리, 불편한 선택 앞에서도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하소서. 예레미야의 떨림을 아시던 주님, 우리의 망설임 속에도 함께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걷게 하소서. 익숙함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낯선 은혜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역설을 믿으며 겁이 나지만, 믿음으로. 주저하지만, 순종으로. 주님의 손 붙들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편한 길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찾으십시오.
익숙함과 안주함을 넘어, 새로운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불확실한 내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걸어가십시오.
겁이 나지만,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은 길을 예비하십니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두려움을 딛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24:1) 1장 찬송 부르며 주님께 봉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깨어 있는 눈동자로 저희 삶을 지키셨으며,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로 저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때로는 역경과 환난의 자리로 이끄시어 우리를 단련하셨습니다. 시험이 찾아왔을 때는, 늘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마다, 고비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이 시간 주님께 감사하며 저희를 드립니다. 주님 받아주소서. 저희가 주님만을 항상 경외하며, 주님의 인도를 받게 하소서. 주님만의 우리의 복의 근원이시니, 이것을 기억하고, 늘 주님의 날개 밑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