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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터 → 서소문밖네거리순교성지 → 중림동약현성당 → 노고산성지→중식(홍대)→ 김포공항
1Km 0.4Km 3.6Km 2.2Km 18.8Km
57. 서소문밖네거리순교성지
◆서소문 밖 -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했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1984년 이 땅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순교자들의 피로 세운 신앙의 터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살아 있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 성녀와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바로 이곳에서
"월락재천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한 바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지금은 서소문 시민 공원으로 단장돼 있는 이 순교의 현장에는
103위 성인의 탄생을 본 1984년,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 세운
순교자 현양탑이 하늘로 치솟아 건립돼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서소문 공원 재개발과 함께 철거되자
서울대교구에서는 199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새로운 현재의 순교자 현양탑을 공원 내에 건립하였다.
또한 1891년 서울의 두 번째 본당으로 인근에 설립된
중림동 약현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中林洞)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 태어나 이미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患難)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 · 약전 · 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주자학이 공리공론에 치우치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이라고 판단한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주교요지(主敎要旨)"와 "성교 전서(聖敎全書)"는
그가 저술한 두 가지의 교리서이다.
"성교전서"는 방대한내용의 교리를 종합, 해설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주교요지"는 순수한 한글로 쓰여진 저술로 10장 43개 항목에 걸쳐
배움이 없는 이들도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졌다.
특히 이 책은 양반 계층의 학자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평등사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같은 때 강완숙을 비롯한 여교우들도 한꺼번에 참수된다.
최초의 여신도 회장이자 주문모 신부를 숨겨 준 죄목으로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된 강완숙은
몇 번이나 주리를 틀리면서도 주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다가
다른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이승훈등이 처형된 그 자리로 끌려나간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때 처형된 이들 중에서 41명이 성인품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그의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 차례 다녀온 유진길과
불과 13세의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소년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 선교사들이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 전장운의 목이 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행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현재까지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도 100명이 넘는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지만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곳이다.
2014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곳을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건축 디자인 면에서도 특별해 2019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건물 내부는 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외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에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매주 목요일에 서소문 역사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어
서소문 성지와 천주교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독특하게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 2층에서는 상설 전시를 만나 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오면 하늘광장을 만나게 된다.
하늘광장은 경건함을 가득 담은 공간으로 절제된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빛, 직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천주교 박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에서는 처형 장소였던 지상을
그대로 올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존재하여
추모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58. 중림동약현성당(藥峴聖堂)
약현이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옛날에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고
이를 줄여 '약현'이라 하였는데 점차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서울에서 두 번째 본당인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이는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 첫 번째 본당)보다 6년 앞선 것으로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통해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한 취객의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복식을 가졌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당으로서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2009년 9월 13일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3월 27일)]
59. 노고산성지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
이곳에는 해발고도 10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노고산이 있다.
바로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는
교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양성해온 터전이다.
서강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60년.
제법 오랜 기간 교회의 정신을 퍼뜨려온 땅이다.
서강대학교 입구에서 왼쪽 길을 들어서니 등하교하는 학생들 왼편으로
서강대 가브리엘관 앞의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 서 있는
3개의 조각에는 성직자 3명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서강대가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니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이 3명의 성직자들은
예수회와도, 서강대와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다.
바로 170여년 전 우리나라 땅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신자들을 돌보고자 찾아온 선교사들이다.
■ 신자들을 사랑한 세 명의 선교사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기 120여 년 전,
노고산에 이 성인들이 묻혔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서
우리 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박해 중인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우리가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 범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전구를 청하는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자들을 돌보고
조선 땅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 위해
세례를 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런 성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박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9000명을 넘어섰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도 이 성인들이다.
신자들을 향한 성인들의 사랑은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자
성인들은 더 열성적으로 신자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했다.
박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더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줘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해자들에게 성인들의 활동이 알려지자,
신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세 성인은 함께 관청을 찾아가 자수했다.
결국 온갖 신문과 고문 끝에 앵베르 주교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리라 여긴
관헌들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찾으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마침내 20여 일이 흘러서야
신자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안장한 곳이 바로 이 노고산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는 4년 동안 노고산에 묻혀있다
성인들의 유해를 수습한 신자 중 한 명인
박 바오로가 자기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에 이장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절두산순교성지 지하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서울대교구 노고산성지에 있는
성 앵베르 주교(맨 왼쪽)와 성 모방 신부(가운데), 성 샤스탕 신부의 현양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대학교 캠퍼스 내 자리잡은 성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성인의 유해가 4년 동안 안장됐으며,
이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성 이냐시오 관
로욜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예수회의 창설자로 서강대학교는 예수회에서 설립하였다.
노고산성지를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 지으면서 점심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제주에 한 달 살이하러 오셨던 황모니카 부부와 좋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도 방문하고 함께 식사도 했는데,
서울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자고 하셔서 오늘 일정을 빨리 마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위해서다.
홍대근처 일식점인데 손님으로 가득차 있었다.
회사근무 중이신데도 안토니오 형제님은 시간을 내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순례가 끝나 홀가분하게 마시고 싶었던 마음을 아시고
술 한잔 같이 하는 배려도 해 주셨다.
두 분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로써 국내성지 순례도 끝이났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작년 대림시기, 그리고 사순시기동안 은총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특히 그립고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이제 차분히 남은 사순시기 잘 보내고 기쁜 부활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 2023년 6월 23일 목포성지 산정동 성당에서
성지순례 축복장 수여식이 있었다.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러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본당으로 전달된 주교님 축복장을 받았다.
아내 바울리나가 아주 기뻐했다.
첫댓글 축하축하드립니다.
많이 부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저희는 가까운 성지도 다 돌지를 못했는데
참으로 수고 많으셨고 또한 무한한 은총 받으셨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