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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Evangelization (복음화)
우리는 어린양과 송아지 고기로 배부르기보다 성찬과 말씀의 식탁에서 영혼을 살찌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잔치에 모여온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려고 하느님께 파견되어 세상에 나셨습니다. 파견은 mission,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을 선교사 missionary.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사명을 이어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합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선교라는 단어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시며 복음화(evangelization)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참된 의미의 선교와 다른 사람의 처지와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신념을 강요하는 개종 강요(proselytism)는 절대 헷갈리면 안 됩니다. 회개(conversion)는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변해가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복음으로 늘 새롭게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심하는 삶(on-going conversion), 성령께서 늘 새롭게 해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늘 생명을 주시길.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묵주 기도를 바치는 방법
10월은 묵주 기도 성월입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10월을 묵주 기도 성월로 선포하면서 이 한 달간 자주 공동체로 혹은 개인적으로 묵주 기도를 바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오늘은 묵주 기도를 바치는 방법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알아봅니다.
묵주 기도는 소리 기도와 묵상 기도로 이루어진 누구나 따라 하기 쉬운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위해 묵주를 사용합니다. 묵주는 반복되는 성모송을 세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여겨질 수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묵주 전체를 보았을 때 묵주알들이 십자고상으로 모여진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에게서 시작되어 그분을 지향하며 그분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로”(Ad Iesum per Mariam) 나아가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십자고상 예수님의 발 부분에 친구(親口)하고 성호경을 그으면서 시작합니다. 십자고상에 입을 맞추는 건 그분을 향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인데, 이는 루카 7,38에 나오는 여인의 행동입니다. 성호경에 이어서 사도신경을 바칩니다. 사도신경은 성자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부분에서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내용을 요약해 담고 있으며, 묵주기도의 영적 여정을 준비하게 합니다. 한편, 사도신경을 대신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나 시간 전례(성무일도)를 시작할 때의 기도,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2)를 바칠 수도 있습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7항). 그다음 주님의 기도 1번, 성모송 3번, 영광송 1번과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묵주기도의 시작 부분을 마무리합니다.
이어서 각 단의 신비를 밝히고 그 내용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기도 1번, 성모송 10번, 영광송 1번과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신비의 내용과 관련한 성화상 묵상, 성경 봉독, 침묵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면 더욱 깊이 신비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복하는 기도 중에는 신비와 무관한 지향이나 생각, 혹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문구 자체보다는 각 신비의 내용을 떠올리고 거기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옳습니다. 각 단 끝에 바치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님께서 세 어린이에게 알려주신 기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영광송 다음에 짧은 마침 기도”(「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5항)를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게 바칠 수 있다고 언급하였는데, 구원을 비는 기도가 “짧은 마침 기도”에 해당합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다섯 단 혹은 스무 단을 바치고 나면, 마무리 기도를 바칩니다. 마무리 기도로 성모 찬송(Salve Regina)을 많이 바치는데, 때로는 성모 호칭 기도나 교황님의 기도 지향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 때처럼 십자고상 발 부분에 친구하고 성호경을 그으며 전체 묵주기도를 마칩니다.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일생 예수님을 동반하고 그분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셨던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한 걸음 다가서는 10월을 보내도록 합시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32) 사도들을 계승한 주교들, 「교회헌장」 제20항
「교회헌장」 제20항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봉사 직무가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언명으로 시작합니다. 사도들이 봉사 직무를 통해 전하는 복음은 교회의 모든 시대에 모든 삶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복음의 전승을 위해서 위계적 조직인 교회 안에 그들의 후계자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처음부터 조직이나 제도의 형태가 필요했으며, 그리스도로부터 연유된 거룩한 권력이 이러한 교회의 제도 안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사도들이 봉사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협조자”(adiutor)들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사명이 이후에도 지속되도록 자신의 직접 “협력자”(cooperator)들에게 그 사명을 완성하고 견고하게 하는 일을 맡겼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봉사 직무의 후계자들을 세웠고, 그 계승을 통해서 직무가 이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교회의 여러 봉사 직무 가운데,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이 계승을 통해서 “주교직”이 세워졌으며, 이 봉사 직무는 어떤 직무보다 으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주교로 세운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해서 “사도 전승”이 온 세상에 전해지고 보존됩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앞에서 언급된 사도들과 협조자들의 관계와 연관하여, 주교들도 “협조자”인 신부들과 부제들과 함께 공동체의 봉사 직무를 받아들이고 수행한다고 언급합니다. 「교회헌장」 제3장의 첫 구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봉사 직무는 다양성을 띠고 있기에, 봉사 직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조직된 직무입니다. 따라서 주교들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양 떼를 다스리는 ‘목자’로서, 교리의 ‘스승’, 거룩한 예배의 ‘사제’, 통치의 ‘봉사자’라는 세 가지 중요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공의회는 이 항의 시작에서 언급된 봉사 직무의 영속성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맡기어 로마 주교에게 전수된 임무가 영속하듯이, 사도들의 “교회 사목 임무”도 주교들의 품계에서 영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주교들의 사목 임무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이 복음을 듣고, 미사를 봉헌하며, 교회에 봉사합니다.
결론적으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문장은 「교회헌장」 제3장의 첫 문장처럼 교의적 명제의 성격을 지닙니다. 이에 따라서 공의회는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루카 10,16)이라는 성경 말씀을 따라, 교회의 목자인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17세기 희년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605년)는, 1600년이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제정한 100년 주기의 희년이며 “그리스도의 탄생 1600주년”임을 강조하며 1599년 5월 19일 칙서 “Annus Domini placabilis”로 제12차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통풍과 전절통으로 인해 개막은 예정일보다 늦은 12월 30일에 열렸습니다. 그는 희년을 “참된 회개와 영적 기쁨의 해”로 선언하며, 1500년 희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 이후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간 국가들과 신자들을 ‘쓴 마음’과 ‘애통’으로 언급했습니다. 순례자 수는 매우 많아 반종교개혁 이후 교황권 회복을 보여주었습니다.
1625년 제13차 희년은 우르바노 대학의 설립자인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년)가 1624년 4월 29일 칙서 “모든 민족들이 손뼉을 쳐라(Omnes gentes plaudite manipus)”를 통해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티아 가도를 통해 흑사병이 유입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 가도에 위치한 성 바오로 성당 대신 테베레 강 건너편 트라스테베레의 성 마리아 성당에 가서 참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간의 종교전쟁이자, 유럽 강대국 간의 세력 다툼인 ‘30년 전쟁’(1618-1648년)의 한가운데 열린 이번 희년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으나, 그 가운데서도 5월 25일에는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1271-1336년) 여왕의 시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1648년, 30년 전쟁과 8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 직후, 아직 세상이 불안한 시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위 1644-1655년)는 1649년 5월 4일, 칙서 “Appropinquat dilectissimi filii”를 반포하여 1650년 제14차 희년을 열었습니다. 토스카나, 헝가리, 독일에서 온 대규모 순례단이 로마를 찾았으며, 특히 가톨릭세가 강한 바이에른에서 온 신심 깊은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요한 라이몬도 줄리아노는 160파운드(약 72.5kg) 무게의 나무 십자가를 지고 독일 뮌헨에서부터 로마까지 순례하기도 하였습니다.
1675년 제15차 gml년은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1676년)의 1674년 4월 16일 칙서 “Ad apostolicae vocis oraculum”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칙서는 단순한 희년 선포를 넘어, 당시 국제정세(오스만 전쟁, 가톨릭 군주 간 불화) 속에서 군주들에게 정치 · 군사 · 외교적 행동을 통해 가톨릭 세계의 일치를 촉구하는 성격을 띠었습니다. 로마 순례객은 약 150만 명에 달했고, ‘거룩한 문’ 개방 예식에는 20만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스웨덴의 전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부활절 세족례에서 열두 순례자의 발을 씻기고 식탁에서 봉사하여 큰 경탄을 받았으며, 교황 역시 평복으로 네 곳의 대성당을 순례하며 같은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 야다, 알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알다’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 아닌, 구체적으로 체험하여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의 실존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숙한 개별적 관계를 통해 점차적으로 가까워짐을 뜻합니다.
‘야다’의 다른 사용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야다’는 ‘마음을 기울여 보살핌’(창세 39,6; 시편 31,8; 나훔 1,7 등 참조), ‘가족적 유대’(신명 33,9)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사랑관계’(창세 4,1; 루카 1,34)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관계가 아닌 마음을 담아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당신 몸에 품으셨고, 평생을 주님의 뜻과 일치하며 사셨던 성모님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지내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문법(삼위일체론)
언어를 익힐 때 문법을 배우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문법은 단어를 가지런히 묶어 그 뜻을 더 분명하게 하고, 정확한 소통을 도와주니까요. 문법이란 말은 언어 공부에만 쓰이는 게 아닙니다. 흔히 비유적으로 시대에 따라 ‘사회의 문법’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공감이 중요해진 오늘날에는 ‘감정의 문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곤 합니다. 전문가들의 문법도 있습니다. 영화감독은 시점 · 편집 · 대사 · 촬영 기법을 엮어 영화의 문법을 만들고, 건축가는 생각과 공간 배치, 재료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문법으로 건물을 짓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일하는 모든 방식 속에는 문법처럼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문법은 무엇일까요? 신학자 칼 라너의 창조신학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창조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통해 그분의 문법을 읽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그 모든 순간에는 사랑의 방식이 함께했지요. 창조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언어의 ‘메시지’에 해당한다면, 사랑으로 일하신 규칙은 드러나지 않은 ‘문법’인 셈입니다. 창조는 사랑이라는 문법으로 쓰인 거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문법’은 삼위일체 안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성부 · 성자 ·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 위격을 이어주는 관계의 끈이 바로 사랑이지요. 성부께서는 사랑을 내어 주시고, 성자께서는 그 사랑을 받아 스스로를 내어 주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이를 잇고 그 사랑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서로에게 군림하거나 분쟁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연결되는 문법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문법은 우리 안에도 분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지으셨고,(창세 1,26 참조) 그 안에 삼위일체의 문법을 심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도 사랑이어야 하겠지요.
문법은 책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사랑의 문법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살아가도록 이끌며, 그 길을 가꾸고 실현하도록 안내합니다. 이 사랑의 언어는 공동체 안의 오해와 상처를 치유하고, 신뢰를 담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이미 새겨져 있던 문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드러난 하느님의 문법은 교회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더욱 또렷하게 복음의 문장으로 새겨지고, 그 문장은 다른 이들의 삶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이 문법이 단순한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가톨릭 신학] ‘임마누엘’ : 이사야의 신앙 고백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에는 ‘소명사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들이 어떻게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 1,4.7ㄴ)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소명사화들의 공통된 특징들 중의 하나는 대부분 예언서의 맨 앞부분에서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방금 살펴본 예레미야서에서는 1장에, 에제키엘서에서는 2장에, 그리고 호세아서에서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1장 2절부터 9절에 등장합니다. 특히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창녀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자신의 소명사화를 예언서 초반에 언급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권위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수사학에서 자신의 말에 신뢰감을 더하기 위해 ‘에토스’(ethos: 화자의 인격과 신뢰성)를 강조했던 것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소명사화는 여타 예언서들과 차이를 갖습니다. 우선, 예언서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예언들이 선포된 후 6장에 이르러서야 언급됩니다. 또한 예언자는 여기에서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거룩한 분으로 고백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이사 6,3.9) 이사야서는 소명사화를 왜 6장에서야 보여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이사야서가 지닌 이러한 차이점은 이사야서의 구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6장의 소명사화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한 이사야 예언자는 7장에서 다윗 메시아에 대해 예고합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ㄴ)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7장에서 선포하려고 하는 다윗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의 의미는, 6장에 있는 소명사화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 강조됩니다. 즉,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함 곁에 있을 때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선포하는 이사야의 신앙고백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태오복음을 통해 이사야의 이 신앙 고백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보게 됩니다.(마태 1,22-23 참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해 묵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믿음은 어떻게 갖게 될까요? 하느님께 직접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알려줘서 갖게 되는 것일까요?
1926년부터 교회는 10월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주일을 전교 주일로 지내는데 올해로 99번째입니다. 전교 주일이라 이 날은 연중 주일의 말씀이 아닌 이사야서 2장(수많은 백성들의 심판관이신 하느님),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0장, 마태오복음 28장(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을 읽으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립니다.
이 가운데 제2독서인 로마서 10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12-15절의 반복되는 단어들에 유의하며 읽으면 ‘파견 ⇨ 선포 ⇨ 들음 ⇨ 믿음 ⇨ 받들어 부름 ⇨ 구원’으로 이어지는 연결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선포’와 ‘믿음’ 사이에 ‘들음’이 있다는 것인데, 바오로 사도께서 16절에서는 이사야서 53장 1절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를 인용하고, 17절에 가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들음’을 특별히 더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믿기 위해서는 먼저 누군가에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될 때 하느님께서 직접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일까요?
13세기에 활동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저 《신학대전》 2-2부 6문 1절에서 믿음의 원인에 대해 논하며 믿기 위한 ‘들음’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믿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믿도록 제시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제시된 것을 믿는 사람의 동의입니다. 사람에게 믿도록 제시된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사도들과 예언자들처럼 하느님께 직접 받은 사람들도 있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설교자들을 통해 전달받은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사도나 예언자가 아니므로, 하느님께 직접 믿을 내용을 받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다른 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도록 제시된 내용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동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사람의 외부에서 동의를 끌어내는 것인데, 기적을 보거나 설교를 듣고 설득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기적을 보거나 같은 설교를 들었듣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사람을 움직여서 믿을 내용에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을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사람의 내면을 움직여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믿는 내용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으로,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설교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내용에 관해 동의할 때는 기적과 설교에 의해 설득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당신 은총을 통하여 움직여 주심으로써 믿게 됩니다.
따라서 ‘전교’, 곧 누군가가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은 단순히 믿을 내용을 알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은총으로 움직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