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Ⅳ. 결 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지금까지 여성작가들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언술적 특징들은 어떠한 여성 현실과 내면을 재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떠한 여성적 가치나 이상들을 제시하는가 라는 물음과, 여성 의식을 중심으로 현대여성작가들의 여성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위해서 여성성, 남성성은 성과 관련되어 있지 않고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검토하고, 여성성을 고유한 속성으로 보면서 모성을 여성 정체성의 핵심으로 보는 논의와 여성성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여성 정체성 또한 단일한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페미니즘적 논의를 전제하였다.
남성문화가 획일성과 위계성에 집착한다면 여성문화는 다양성과 평등성을 우선으로 한다. 여성문화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본 논문은 남성중심 문화의 논리로부터 시작해서 억제되어 온 여성문화의 발견과 정당한 평가가 여성문화의 복권을 넘어서 문화사 전체의 총체성 확보를 위한 필수항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간 한국문학사 기술에서 주변 텍스트로 밀려나 있던 여성작가들의 수필작품을 여성문학론적 관점에서 재평가하였다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
본고에서 여성작가의 작품을 언술 특성과 의식의 두 층위에서 고찰한 이유는 언어와 사고 작용의 두 층위 간에는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두 층위가 별도로 기능한다면 굳이 두 층위로 나누어서 고찰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언술 특성과 의식 특성이라는 두 층위로 나누어 살피되, 전혀 다른 두 영역이 상호교차하면서 여성 작가의 다양한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이 논문의 의의를 두었다.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에서 침묵을 특성으로 하는 내적 분열의 언술은 여성 정체성을 소극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고, 서간체의 고백성과 풍자적인 특성을 보여준 통합지향의 언술은 여성 정체성 인식의 정도가 중도적이며, 대화와 구술의 특성을 지닌 열림 지향의 언술은 적극적인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언술 특성에 나타난 여성 정체성 인식의 정도가 의식 측면의 관계에서 그대로 일대일 식 대응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언술 특성에서 정체성 인식 정도가 적극적이었던 정영자는 의식의 층위에서도 적극성을 드러내었지만, 유안진의 경우는 언술 특성에서는 중도성을 드러내고, 의식의 구조 측면에서는 적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의식의 층위에서 여성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었던 작가들이 언술적 특성면에서는 여성 정체성 인식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특성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두 층위의 관련 양상이 좀더 복잡한 형태를 지닌 경우도 발견했다. 침묵의 언술구조를 보이는 작품에서 그 침묵이 소극적 의식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었지만, 때로는 적극적 의미로 침묵을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여성들의 언어가 여성들이 처한 딜레마와 그것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순이 내재한 이유라고 하겠다. 특정 사건에 드러난 일반인들의 시각에 대해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침묵'을 선택한 경우에는, 여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소극적이라기보다 적극적인 경우다. 천양희의 경우는 언술 특성에서 소극성과 중도성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성 정체성은 논자나 관점에 따라 더욱 세밀하게 분화시킬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그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크게 세 양상으로 대별하였다. 1980년대 여성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여성 정체성의 그 한쪽 끝에 시련을 적극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자아를 정립하고 성장을 이루려는 여성작가가 자리해 있었다면, 중간에는 여성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변화가 두려워 움츠리는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여성작가가 있었다. 다른 한 쪽 끝에는 남성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활동 영역을 넓히며 주체적이면서 동시에 전통적 가치관을 존중하는 인물이 존재하였다. 언술적인 특성도 의식의 층위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차원으로 대별할 수 있었다. 사회, 자연, 신화와 같은 외부적 현실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려는 통합 지향의 언술 전략과 욕망, 무의식, 공포 등으로 가득 찬 여성의 내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해 내려는 내적 분열의 언술 전략 그리고 여성이 얼마나 억눌려 왔는지를 역으로 보여주는 열림 지향의 언술 전략 등으로 그 성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일과 자아 그리고 사랑의 역학 관계에 대한 의식의 측면에서도 세 가지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성 정체성에 대해서 적극적인 인식을 하는 경우는 작가의 주체적인 각성이 뒷받침되고 있었고, 중도적 인식의 경우는 자아와 일에 대한 모순적 병존을 지향하는 역할 갈등성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소극적인 인식의 측면에서는 일과 자아 그리고 사랑을 환상적으로 통합하는 의식을 특징으로 갖는 현실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이 놓인 현실을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 동일시를 지향하는 언술 전략이 의미를 고정시키면서 여성 주체의 동일성을 회복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내면을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 내적 분열을 보이는 전략은 가능한 의미를 비고정화시키고 지연시키면서 분열된 주체의 다중성과 복잡성과 인접성을 실험적으로 고무시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열림 지향의 언술은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언술 양상이 비단 여성작가에게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쩌면 남성작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표현하거나, ‘전혀 다른 상상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근 중심적 언술을 대체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언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타자화된 이러한 언술들을 여성작가들이 즐겨 구사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언술적 전략은 남성 수필가들의 언술적 전략과는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전략들은 대체로 비결정성, 변동성, 가장과 모방의 유희를 주된 무기로, 남성중심의 지배적인 질서를 교란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여러 가지 병폐 현상이 대두되자, 그것을 글로 표현하여 대상의 공감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현실비판과 사회 참여로 나타났다. 또한 80년대 후반에 활성화된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여성문제를 고발하고 여권을 신장시키는 내용을 주제로 한 여성수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 여성수필들은 논리적이고 설명적 어조를 띠는 중수필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여 기술 사회로 변환하면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측면을 제어해 보려는 여성작가들의 노력은 인생론적 책무의식에서 나온 주제라고도 볼 수 있겠고, 서정 일변도의 경수필에 대한 남성비평가들의 지적에 응답 차원의 표시로서 사회수필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80년대의 고도성장에 따른 일자리의 확대와 페미니즘 의식의 확산으로 인해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늘어나면서 일과 자아 문제를 다룬 글들이 전문직 여성들의 수필집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 부류의 글들은 모순된 사랑과 자아를 화해시키거나, 가정과 일을 환상적으로 통합시키는 두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수필집의 독자층이 남성보다 여성에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자아 문제에 갈등을 겪는 주부들의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논리 개발과 그 해결책의 제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수필가들의 수필에서 자아와 가정 그리고 사랑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통합적인 대안으로서 한국적인 현실을 고려한 ‘수퍼우먼’ 추구의 한 경향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여성 운동이 생활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여성수필가의 의식에서 체제 지향의 보수성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본 연구를 통하여 얻은 성과는 여성적 글쓰기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성적 질서를 분열시키고 수정하는 작업으로서의 여성적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여성들이 스스로를 재현할 수 있는 여성수필의 언술전략을 모색하는 이러한 작업은,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눈으로 복권시키면서 여성의 창조적인 상상력과 전복적인 에너지의 근원들을 드러내 언어, 성, 정체성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여성의 정체성이나 여성적 글쓰기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를 향해 움직이는 ‘탈주 중’인 과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고에서 살펴본 다양한 언술들이야말로 남근 중심적인 상징계에 해체적인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여성적 글쓰기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다양한 언술 전략을 고안해내기 위한 현대 여성수필가들의 노력의 소산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성수필가들의 남녀동등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함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팽배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겨냥하는 수필이 전문 수필가들의 수필에서 눈에 띠게 보이지 않는 것은 여성의 인간화에 앞장서고자 노력하는 의식 있는 여성문학 연구자들로부터 비판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 여성수필이 나아가야 할 지향성과 그 좌표를 설정하는 데 반드시 참고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살펴 본 여성의 수필에 나타난 여성 정체성의 다양한 양상은 여성소설과 차별성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겠다. 80년대 후반의 여성문제 소설에서 나타나 보이는 여성 정체성 양상은 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외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물질적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가정을 떠나는 가출이나 여행이 자아 발견의 중요한 동기로 설정되며 자신의 존재를 구속하는 세력에 대한 여주인공의 투쟁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많은 위반을 범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파멸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가상적 인물인 여주인공과 수필이라는 작품 속의 실제 인물인 여성이 겪는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들의 여성 정체성 발현 양상은 다르게 나타나며 정체성 양상에 대한 모범적인 해답이나 해결방안도 물론 다르게 제시되는 것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 여성 수필에서 우려할 만한 것은 억압이라는 반여성적 사회 기제에 대해 투쟁과 갈등을 겪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여성의 문제도 역사 발전의 원리에 따라 투쟁과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칠 때,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성적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한 여성 정체성을 여성수필가들이 경험적으로 서술할 때, 여성적 삶의 발전적 모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성문학하면 여성시나 여성소설을 떠올렸고 여성문학의 연구는 지금까지 여성시나 여성소설에 국한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80년대 여성수필가들의 정체성 발견을 위한 치열한 노력과 수필쓰기의 전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논문의 발표를 계기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현대 여성수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며 여성문학사 복원 작업과 새로운 한국문학사 내지는 여성문학사의 정립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