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하나면 옛날이면 上노인이다. 4시간 버스 타고 고향 가기 힘들다. 그러나 함양 서상 지나 우람한 지리산 준령 모습 보니 서울 근교 꾀쬐죄한 산들과 비교할 수 없어 반가웠다. 도착 하자말자 회원 차로 신안동 남강문학회 문학비 찾아갔다.
회원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허전했다. 2009년에 창간한 이후, 서울은 정태수(문교 차관), 이유식(前 문인협회 부이사장) 이영호(前 문인협회 부이사장) 정재훈(前 문화재 관리국장), 허유(前 증권회사 사장) , 박용수, 조진태, 정태범, 함순자, 박준영, 이진표 등 쟁쟁한 분들 모시고 내가 10년간 책임자로 일했다. 나는 창간호부터 10년간 진주고등학교 33회 친구들 도움으로 광고 협찬 100만원 씩 매년 했고, 진주 여고 출신 안병남 총무는 활달해서 남학생들에게 말만 걸면 남학생들이 회식비 30만 원쯤은 내놓았다. 그땐 모임 자리에 보통 스무 분 정도 나와 2차가 보통이었고, 2천 정도 자금 축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일푼 이다. 조직은 기분만 내고 펑펑 써버리면 이리된다. 젊고 유능한 회장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이튿날 새벽 6시에 초교 동기 오태식 교장과 중앙시장 둘러보았다. 얼굴 시커먼 달마대사처럼 생긴 오교장이 거기서 한 행동거지 보고 나는 깨달았다. '아! 이렇게 멋진 노후를 보내는 친구도 있구나' 그는 시장 노점상인 몇은 잘 아는 모양이다. 인삼 파는 아줌마 만나자 댓 자 곳자 인삼차 한 잔 쑥 뽑아서 나한테 건네준다. 서로 반가워하며 말을 건네는 모습 보고 어떤 감이 팍 왔다. 그래 두 사람을 모델로 사진 남겼다.
그다음 독산에 산다는 어떤 할머니와의 수작이 물건이었다. 파는 물건은 사지 않고 이야기만 건네다가 지갑을 꺼내어 만원 짜리 한 장 슬쩍 놓고 온다. 서울의 삭막한 인심 생각나서 거사는 쇼크 받았다. 말문이 딱 막혔다. 道를 깨친 원효스님이 서민 속에 들어가 불법을 가르쳤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친구처럼 돈을 줬단 말은 들은 적 없다. 내사 대학에서 철학 전공하고, 불교신문 기자 하면서 고승대덕 인터뷰 많이 했다. 그렇지만 오교장 모습 보고, '나도 언젠가 진주 내려와서 그를 따라 이런 布行을 하고 살아야 되겠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시장통 해장국집에서 시조창 김창선 명인이 합석했다. 오교장도 시조창 명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아침부터 막걸리 세 병 비웠다. 11시에 時祭 참석하고 내려와 진주고 33회 회관에 들러 열심히 난초와 매화 그림 손바닥에 펴고 공부하는 동기들 모습을 보았다. 어제 오후 한 시간 만나 대화한 후 저녁 사겠다고 그렇게 우기던 박원우, 작년에 남해 별장에서 갈치조림 먹여준 윤종철, 소싯적엔 한주먹 했지마는 지금은 인내심이 고래 심줄 된 장정식 친구 만났다. 모두 너무나 반가웠으나, 하이라이트는 천전 오태식 교장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4시 서울행 버스가 움직이자, 차창 밖에서 손 흔들어 준 그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첫댓글 너무나 생생합니다..꼭 옆에서 보고 있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