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밤하늘의 뜬 북극성을 보면서
방향을 잡는다.
깊은 산속에서 방향을 잃어서
갈 길을 모를 때
밤하늘에 뜬 북극성을 보면서
길을 찾는다.
왜냐하면 북극성은 글짜 그대로
항상 북극에 떠 있어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삶이 어지러울 때
우리는 하늘에 길을 묻는다.
참 진리 외에 아무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어젯밤 10시 27분
대통령께서 비상계엄을 선포하셨다.
여러 정치적 반대들에
견디다 못해 비상계엄까지 선포했지만
얼마 후에 비상계엄을 해지하고 말았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고 뉴스들은 전한다.
우리는 아무도 길도 아니고, 답도 아니다.
“내가 답이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정말 답답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어디에 길이 있고,
어디에 답이 있고,
어디에 숨통 트일 시원한 생수가 있나?
어떤 장소에서도 얻지 못할
어떤 주장에서도 얻지 못할
시원한 해결책과 방법이 예수께 있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담대히 주장하실 수 있으시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나는 문이다.(10:7,9)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나는 생명의 참 포도나무다(15:1.5)
길이신 그분의 길을 묵묵히 따라 걷을 때
진리이신 그분의 가르침 앞에 무릎 꿇고 들을 때
생명이신 그분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참으로 우리는 길과 진리, 생명을 경험한다.
참 안타까운 것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나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나
여전히 자신을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내 뜻에 맞지 않으면
나의 길을 간다.
성경의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내 사상에 맞지 않으면
나의 진리를 고집한다.
그것은 생명을 거부하고,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
바로 그 길을 간 첫 번째 사람이 가인이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제물을 드렸으나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사탄이 웃으면서
네가 드린 제물은 내가 받았다.
네가 드린 신앙은 내가 받았다.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기가 찰 일인가?
가인과 아벨의 예배의 차이는 무엇일까?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2-4)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농산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에 양을 드린 것 같은데,
하나님은 채식보다 육식을 좋아하시는 분이신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의 답은 성경 안에 있다.
히브리서는 11장에서 이렇게 답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 이유는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는 본질적으로 나의 죗됨을 고백하고, 구주의 은혜를 의지하는 행위이다. 나의 잘남을 내려놓고, 주님의 보혈의 속죄를 찬양하는 마음 깊은 감사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간에게 주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죄의 결과를 대신해 죽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계 13:8, 한글킹)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인간은 아무도 제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오직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의해 죄용서와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
가인의 제사에는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예배였기 때문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나님앞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드릴 뿐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운명을 거둔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그들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 제도에 대하여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제물로 그것들이 예표한 구주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동시에 용서를 위하여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들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그들이 순종한다는 증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부조, 71)
분명히 구주의 보혈이 필요함을 알고도
가인은 피흘림이 없는 제사를 드렸다.
두 번째 이유는 처음 것이냐 아니냐이다.
성경은 이런 차이를 기록해 준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 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첫”이라고 하는 단어가
그의 마음이 먼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알려준다.
가인의 제사에는 첫 것이 없었다.
자신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하나님이었다.
배가 부르니, 그 다음에 하는 여유, 나머지가 하나님 몫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첫 마음, 첫 시간을 요구하신다.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분께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모든 일에 처음과 나중과 최선으로 삼을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예배를 드리기 전의 삶이었다.
그 엄숙한 선포를 요한일서가 말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예배는 예배만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다.
참된 예배는 삶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
참된 예배는 마음의 변화, 말의 변화, 생활의 변화로 연결되어져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가치있는 예배가 된다.
예배는 삶이요, 삶은 예배이다.
가인은 그 마음이 그 애정이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어디에 속했느냐를 알려준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우리의 최대의 정력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요 그를 생각함이 우리의 가장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다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고 그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정로, 58)
하나님은 예배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도 함께 받으신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4)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는 것이며, 사탄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 길은 가인의 길이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가인과 예배의 차이는 피와 처음, 삶의 문제였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 어디에 있는가?
주님이 기뻐하실 예배를 드리는 자 어디에 있는가?
주님이 기뻐하실 삶의 예배를 드리는 자, 주님이 찾으신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https://youtu.be/jSizJxtDt7M
https://youtu.be/VbIcWNfptJI
https://youtu.be/aOpLr5Z03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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