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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추석 특강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말씀 / 시편 65:1-13
요절 / 시편 65: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메리 추석! 행복한 추석 연휴 되십시오. 추석 연휴를 맞은 이 시점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나라 전통 명절인 추석은 ‘한가위’로도 불립니다. 추석은 농경 사회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념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풍농제(농사에서 풍년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제)’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독교 절기상 일종의 ‘추수감사절’과도 같습니다.
장로교 교회는 1904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우선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914년 각 교단 선교부 회의를 통해 미국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날을 기념해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했습니다. 이후, 수요일을 주일로 변경해 매년 11월 셋째 주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로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기독교 절기는 ‘추석’이라는 민족 전통의 추수감사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만약에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족 전통의 추수감사절인 추석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바로 이날을 추수감사절로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몰랐기에 추석에 천지신명께 감사제를 드렸고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기에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추석에 담긴 추수 감사의 의미를 알고 추석을 맞아 우리를 윤택하게 하시고 풍요로운 삶을 주시고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기는 이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추석 명절은 결실의 때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실의 계절, 가을의 한가운데 시점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지난 시간이 어떠했는지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한 해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지나온 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대입 수험생들에게는 힘들고 고달픈 시간이었고 결실의 시점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도 초조와 긴장 가운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능을 마치고 더 나아가 대학에 입학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 할 일 많은 대학생들은 전공과 자격증 취득과 영어 공부, 알바 등으로 한 해를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목자님들, 사모님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매일의 삶을 충실히 감당해 왔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시간이 어떤 분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겠지만 어떤 분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많이 수확했지만 어떤 분은 농사를 망쳤을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복잡한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을 정리해 보고 해석해 보는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은 시편 65편 말씀으로 다가와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뭐죠?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오늘 시편을 기록한 시인의 고백은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지내온 시간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참 고생을 많이 함을 보게 됩니다. 먼저 죄 짐에 짓눌려 신음합니다. 또 바닷물이 요동치는 것 같은 마음고생도 많이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양 치고 농사짓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든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택(좋은 것)으로 관 씌워졌음을 알 때, 우리는 다시금 찬송하고 기도하고 만족하고 감사하고 즐거이 외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나온 시간이 최악의 시간처럼 보일지라도 다시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픔과 고통 사이 사이에 아름다운 주님의 은택의 보석들이 박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당신의 은택, 곧 당신의 선함, 당신의 좋은 것들로 우리의 삶을 관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시편 속에서 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시인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시편 65편은 찬송이 시온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시온, 곧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모여 있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기만 하면, 소리 높여 찬양하려고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 기다림은 고요한 기다림입니다. ‘기다리오며’의 원어적 의미는 ‘고요함 속의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옷깃을 여미고 조용하게,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서원을 이행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기다림은 고요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원통함, 죄로 인한 내면의 고통, 원수로 인한 괴로움, 결핍과 궁핍에 대한 염려, 요동하는 세상사로 인한 두려움 등 갖가지 문제를 가지고 탄원하는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서원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지만, 때로는 잠잠하고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22:2에서 시인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또 시28:1에서 시인은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시인(다윗)은 기도했고 기다렸습니다. 시62:1에서 동일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그리고 드디어 시40:1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이처럼 시편의 여러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때로는 잠잠하실 때 우리가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드디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둘째, 시인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죄악이 시인을 이길 때가 있었습니다. 시인 다윗은 음욕을 이기지 못해 간음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의 날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충신이었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하여 임신시키고 이 악함을 숨기려고 자기의 충신이었던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의 강한 대적은 이겼지만 자기 내면의 죄와의 싸움에서는 패배했습니다. 죄악에 패배한 다윗 왕국은 이후, 분열과 혼란으로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그때 깊이 회개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이때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다윗은 죄악에 압도당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악에 번번이 제압당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새 인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셋째,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시편 기자는 세 가지 표현을 씁니다.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 이곳으로 택하신 백성을 가까이 이끌어 오십니다. 시인은 우리를 택하여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으로 이끌어 그 주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죄악에 압도당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악과 허물을 용서받고 주님의 집에 가까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주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여기 주님의 집은 외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주님의 집이 주는 신령한 아름다움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 앉아 기도하고 찬송할 때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기쁨과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은혜가 있고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날 주님의 뜰이요,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성전인 교회 공동체(성도들의 모임)는 아름다움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좋은 것들, 은혜들, 마음의 평강과 행복이 있습니다. 또 우리 성도들은 교회에서 찬양이나 말씀이나 기도나 예배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신령한 아름다움들, 주님 주시는 하늘나라 기쁨과 평강과 안식과 생명을 누리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곳이 주님의 뜰, 주님의 집,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에게는 넓은 집과 좋은 차와 안정된 직장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뜰인 교회 공동체와 그곳에서 얻어지는 신령한 아름다움들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양식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적인 양식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뜰, 주님의 집, 주님의 성전은 우리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예배처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곳은 교회 공동체로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의 아름다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믿음의 삶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입니다. 시27:4에서 동일한 시인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 속에서 알고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드립니다.
넷째, 시인은 든든히 의지할 구원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산을 세우시고 거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는 전능한 창조주, 세상의 소란스러운 문제들까지도 잠재우시고 주관하시는 권능의 하나님,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대상이 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바다는 거대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닷물이 휘몰아치고 그 물결이 사납게 일어날 때 배의 선원들은 의지할 데를 잃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세상에는 다툼과 전쟁 등으로 끊임없는 소란이 생겨나지만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이 또한 진정시키시고 해결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든든히 영원히 의지할 구원자이십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인간 사회에 매우 유익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지진이나 태풍, 홍수, 가뭄과 같은 자연 재앙과 민족 간의 전쟁과 충돌 앞에 무력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자연재해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 등으로 늘 소란과 문제가 생겨납니다. 또 질병이나 사고나 죽음으로 인해 고통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만이 이런 인생들의 소란과 문제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창조주이시기에 권능으로 산을 세우고 요동치는 바닷물과 요동하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잠잠하게 진정시키십니다. 주님이, 주님의 때에, 주님의 권능으로 이루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음 가지고 의지해야 합니다. 현대의 최첨단 세상에서도 여전히 우리 주님은 우리가 변함없이 의지해야 할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다섯째, 시인은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셔서 곡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물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인간은 땀 흘려 일함으로써 곡식을 수확하여 먹고 삽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할 터전인 땅과 물은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이 땅을 돌보셔서 물을 대어 그 땅을 윤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윤택한 땅에서 곡식이 자라게 하십니다.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고 그 이랑을 단비로 부드럽게 하셔서 자라나는 싹들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윤택하고 부드럽게 하시며 물을 넉넉히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이로써 곡식을 추수하여 사람이 먹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9,10절에 보면 윤택하게, 가득하게, 넉넉히, 부드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물을 공급하시고 일할 터전 가운데서 이루어가시는 일입니다.
이는 농사에서 추수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터인 직장을 주시고 업무를 감당할 지혜와 기술과 지식을 주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 복음 역사의 사역지를 허락해 주시고 주님이 말씀의 생명수를 공급해 주시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할 터전을 주시고 윤택하고, 가득하게, 넉넉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시고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섯째, 시인은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강물과 하늘의 단비로 인해 물이 넉넉해져 주님이 가시는 길마다 기름방울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들의 초장과 언덕들과 골짜기가 기름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름진 땅에서 돋아난 풀을 뜯고 양들이 자라나 초장은 양 떼로 뒤덮였습니다. 언덕과 골짜기에는 곡식들로 뒤덮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며 외치고 박수하며 노래합니다. 들녘에 추수하는 기쁨의 노랫소리가 가득합니다. 보기만 해도 풍요로워 보이는 광경 아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보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의인화시켜서 지난 시간에 영광스러운 관이 씌워졌는데 무슨 관이냐 하면 ‘주의 은택의 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택으로 지난 시간들에 복이 내려져 영광스럽게 꾸며졌습니다. ‘지난 시간들의 모든 복이 주님의 은혜 때문이요 주님의 덕택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은택의 원어적 의미는 ‘좋은 것, Good’을 의미합니다. 이 ‘좋은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죄 용서와 구원과 성공적인 추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영적, 육적, 사회적인 복에 담긴 것, 곧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호의, 인내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토브)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주님의 은택으로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또 지난 시간들이 모인 우리의 전 일생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좋은 것들, 선한 것들로 우리에게 주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 전통의 감사제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이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삶에 관 씌우신 은택(좋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우리가 365일 매일 매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좋겠지만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추석 연휴를 맞은 지금이라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감사하는 심정이 없는 성도는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밀러는 “감사의 크기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수필가 아이작 월튼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소는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하늘나라에, 또 한 곳은 감사하는 성도들의 마음에 있다.”
저는 지난 시간들 속에서, 우리 주님이 어떻게 은택, 좋은 것들로 관 씌워주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동역자가 사고로 10개월 가까이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둘째 딸은 시력이 안 좋아 흐리게 보고 답답해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좀 있어 집을 이사해야 했습니다. 교회에도 양 떼들로 옷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띄엄띄엄 보였습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해 보면 주님이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시고 주의 좋은 것들로 관 씌워주신 지난 시간이었다고 고백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 속에서 우리 주님은 저를 빚어가시고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게 하셨습니다. 아내의 사고를 통해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의 시력 문제를 통해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의지하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선하신 주님이 주님의 때에 시력이 점차 회복되게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이사하는 과정 속에서 섬세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면서 내 삶이 주님께 붙들림바 된 삶이고 우리 가정을 섬세하게 돌보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안 된다는 생각과 실패의식이 팽배해 있던 저였는데 드보라 목자님과의 동역 가운데서 캠퍼스를 거니는 것이 좋고, 캠퍼스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고, 그 가운데서 성현, 정훈 형제들을 교회로 인도해 주신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아직은 교회 초장이 민둥산처럼 보일지라도 오늘 말씀처럼 교회 초장에 기름이 뚝뚝 떨어지고 양 떼로 옷 입혀주실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내 삶의 주관자가 주님이심을 다시금 발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소중한 자녀들, 하윤이, 하늘이, 소중한 교회 가족들, 성경공부 강의안과 주일 메시지 등을 감당하면서 주시는 말씀의 은혜들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제 삶의 얕은 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점차 깨달아가고 깊어지게 하는 그 은혜가 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저의 모든 삶의 상황과 형편을 넘어서게 하는 그런 감사 제목입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 다 마친 후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석 연휴 기간, 지난 시간들의 내 인생에 대한 해석 작업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삶이 무엇으로 관 씌워져 있는지. 만약 우리가 상황과 형편을 있는 그대로만 본다면, 혹은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본다면, 지난 시간, 지난 한 해는 아픔과 고난의 한 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은택을 주시는 하나님, 선한 것, 좋은 것들로 관 씌워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지난 시간, 지난 한 해는 현실 상황 판단을 뛰어넘어 최상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좋은 것들로 관 씌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즐거이 노래하며 감사하는 우리네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메리 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