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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분 후, 형사들과 사건관계자들이 모두 거실로 모였다.
“루 탐정! 우리 모두를 모이라고 했다면서? 범인을 밝혀낸 건가?” 김석철 형사가 물었다.
이어진과 구석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던 루시아가 사람들에게 합류하며 차분하게 답했다.
“네.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해볼 때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수찬이 다급하게 나섰다. “누굽니까? 누가 범인입니까? 어떻게 독을 사용한 거죠?”
“처음부터 설명을 드릴게요. 독살 사건은 독이 어떤 것인지, 범인이 독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범인이 어떤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투여했는지, 투여 이후 뒷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등을 알아내야 해요. 하지만 독살범을 잡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설령 부검을 통해 독의 성분을 확인했다 해도, 독살범이 남은 독을 처분해버린다면, 영상이나 음성, 목격자 등의 결정적인 증거가 없을 경우에 살인범이 직접적으로 피해자에게 독을 투여했다는 사실을 밝히기가 어려워요.”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독살범을 찾을 때는 그 살해동기와 정황증거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김석철 형사가 말했다.
“네. 먼저 독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죠. 사람들은 흔히 독은 복용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독들도 많아요. 예를 들어 피마자씨에 들어있는 리신이라는 물질은 복용 이후에는 큰 증상을 일으키지 않다가 2~5일 정도 후에 신경계, 부신, 콩팥, 간 등의 부전을 일으켜 결국 복용자가 사망하게 돼요. (미주 1) 또한 독의 발현시간을 늦추는 방법도 있어요. 해당 독의 상성인 물질을 동시에 소량 복용시킨다면, 상성인 물질의 효과가 끝날 시점에 실질적인 독의 효과가 시작되겠죠. 일본에서도 범인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독의 효과를 늦춘 실제 사건이 있었어요.”
루시아는 잠시 물을 마시고자 말을 멈췄다. 주혁은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어려운 말을 하는 루시아가, 자신이 평소에 보던 까불대고 덤벙거리는 루시아와 너무 달라서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이 있어요. 복어독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쉬우시겠죠. 이 독은 신경세포의 나트륨 통로를 차단해서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투구꽃에서 나오는 아코니틴은 이에 반대되는 효능을 갖고 있어요. 아코니틴은 그 자체로도 강알칼리성의 위험한 독이지만, 신경세포의 나트륨 통로를 확장시키는 역할도 하거든요. (미주 2) 그래서 테트로도톡신을 피해자에게 투여할 때 아코니틴을 소량 투여하면 테트로도톡신의 작용시간을 늦출 수 있죠.”
“루 탐정! 그 얘기는….?”
“네, 부검결과가 나오면 확실해지겠지만, 용의자의 범위를 단지 피해자가 죽기 직전인 아침식사에 참여한 사람들로 한정할 수는 없다는 얘기에요. 오히려 아침식사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모두의 시선이 재인에게 향했다. 재인은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떨리는 입술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재인에게 잠시 촉촉한 눈길을 준 루시아는 말을 이었다.
“다음은 독의 획득수단과 투여절차에요. 만약에 독을 섞어서 그 효과의 발현시간을 늦췄다라고 한다면, 독성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연루됐다고 봐야 해요. 독 자체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독의 발현시간을 통제할만큼의 지식이 있는 거니까요. 다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범인이 피해자에게 독을 투여했는지에요. 이 부분이 풀리지 않아서 용의자를 확정할 수 없었죠. 그러다 안방에서 이 팩을 발견했어요.”
루시아는 홍삼 액기스 팩을 들어보였다. 팩에는 큰 글씨로 ‘수’라고 쓰여져 있었다. 김석철 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가? 이게 독 투여방법과 관련된 증거가 되나?”
“증거라기 보다는 이 액기스 팩을 기반으로 추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안방 수납장 속 냉장고에서 이 엑기스 팩들을 발견했어요. 각 팩에는 여기 ‘수’처럼 복용요일과 날짜가 적혀져 있었어요. 월화수목금이 적힌 다른 엑기스도 많았어요. 우지훈씨가 홍삼 엑기스를 드셨다고 하더라구요. 이건 백재인씨께 확인받았습니다. 문제는 어제 저녁에 우지훈씨가 드셨을 엑기스에요. 그 빈 봉지가 없더라구요.”
“봉지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박건모가 물었다.
“우지훈씨가 엑기스를 드시고 난 다음에 봉지를 어딘가 버리셨을텐데, 그 봉지가 안방, 거실 쓰레기통에도 없더라구요. 혹시 가사도우미 선생님께서 버리셨나해서 여쭤봤죠. 평소에는 오후 2시쯤 퇴근하기 전에 쓰레기통을 비우고 가시는데 오늘은 사건이 터져서 쓰레기통을 못 비우셨대요. 그 얘기는 누군가 엑기스 봉지를 회수해서 집 밖으로 내갔다는 거에요.”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혹시나 해서 쓰레기통을 모두 조사해봤는데 저런 봉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그랬다고 쳐보죠. 왜 그랬을까요? 왜 단순한 빈 봉지를 쓰레기통에서 꺼내서 밖에다 버리는 수고를 한 걸까요? 어떤 가치가 있어서? 그 봉지가 집 안에 머무는 게 너무 싫어서 그랬던 걸까요?”
“범인이 그랬단 거네요.” 우수찬이 말했다.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요. 즉 범인은 그 엑기스 봉지를 통해 피해자에게 독을 투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에요. 이게 만약에 사실이라면, 범인은 피해자가 홍삼 엑기스를 복용한다는 사실과, 홍삼 엑기스에 날짜와 요일이 쓰여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이었겠죠. 또한 안방에 접근해서 홍삼 팩에 독을 주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거에요.” 루시아가 말했다.
“탐정이라는 분이 사실에 근거해서 추리를 하시기보다는 소설을 더 잘 쓰시네요?” 백재인이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빈 봉지 하나를 집에서 못 찾으신 걸 가지고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우리가 볼 수 없는 빈 봉지가 범인을 특정할 증거로 작용할 수 있나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빈 엑기스 봉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시내를 다 뒤져서 엑기스 봉지를 찾기도 불가능하구요. 그래서 최신기술의 힘을 빌렸어요. 여기 채주혁씨가 실력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라서요. 주혁씨한테 부탁해서, 용의자분들의 핸드폰 최근 검색기록을 살펴봤어요. 범인들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확신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죠. 독을 쓰는 사람이라면 관련단어를 검색해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혁씨가 흥미로운 검색기록을 발견했죠. 백재인씨 핸드폰에서요.”
놀라움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백재인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남의 핸드폰을 허락도 없이 뒤지는 법이 어디있어요!”
“독살 사건의 특성상 불가피한 일이었어요. 이런 정황증거라도 모으지 않으면 범인을 잡기 어렵고, 또한 시간이 소요되면 될수록 범인이 증거를 인멸하기도 쉬워지니까요. 이 과정에 대해서는 경찰 분들이 잘 조정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백재인씨는 3일 전에 테트로도톡신과 아코니틴에 대해서 검색을 했어요. 누군가가 검색기록을 확인할 줄 몰랐던 모양인지 기록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었죠. 부검결과가 나오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만약 피해자 몸에서 두 물질이 발견된다면,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죠.”
이어진은 충격을 받은 듯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로 털썩 주저앉았고, 우지훈은 백재인에게 달려들려다 주변 경찰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아니 아줌마가 어떻게 아버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아줌마를 챙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손을 부들부들 떨던 재인은 두 손을 꼭 맞잡아 떨림을 막고는 턱을 쳐들고 루시아를 노려보며 높은 톤으로 얘기했다.
“저도 독에 관심이 좀 있어서 찾아본 것 뿐이에요. 그 기록이 제가 남편한테 독을 썼다는 증거가 되나요?”
“이것도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겠죠. 다만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핸드폰 안에 다른 모든 문서는 비밀번호가 없었는데, ‘카페발전계획’이라는 문서 하나만은 비밀번호가 걸려있더라구요? 주혁씨를 통해서 파일을 열려면 열어볼 수 있어요. 아직은 열어보지 않았구요. 재인씨, 혹시 이 문서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저희가 알 수 있도록 문서를 열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백재인은 가벼운 코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루시아는 재차 물었다.
“답을 회피하시는 건가요? 경찰이 이 문서를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사생활 침해 아닌가요? 루시아 당신은 경찰도 아니잖아! 또 경찰이라고 모든 제 사생활을 들춰볼 권리가 있나요? 이건 불법이에요!”
“정황상 이게 중요한 문서일 거라고 생각돼서 여쭤본 거에요. 만약 이 자리에서 재인씨가 문서를 열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을 거라면 경찰서에서 말씀을 하셔야할 거에요. 김 형사님?”
김석철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경찰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백재인씨, 당신을 우지훈 살인사건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재판소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경찰이 재인의 손목을 잡아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재인은 이를 뿌리치며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마! …내 발로 걸어나갈 거니까.”
재인은 걸어나가며 루시아 앞에서 멈춰섰다. 재인은 고개를 루시아에게로 돌리고서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아 당신, 어쩐지 아까부터 부숴버리고 싶었어. 그 젊음, 반짝반짝함 말이에요. 기대해요. 내가 산산조각내버리는 모습을.”
루시아는 미녀의 미소가 이렇게 차갑고 소름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재인은 경찰과 함께 현관으로 걸어나가며 누군가와 통화했다.
“김건우 변호사님? 백재인이에요. 도와주셔야 될 일이 생겼네요. 제가 살인사건에 연루됐는데… 네. 살인사건이요…”
또각또각하는 재인의 하이힐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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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킬!”
“…너 또 배틀그라운드 하고 있었냐?”
“조용히 해! 총소리 안 들려! 나 지금 11위란 말이야. 이제 우승 한 번 할 때 됐거든요! 안그래도 지금 해우소 들어왔고요! 부동산도 좋고요! 붕대도 20개나 있고요!”
루시아 탐정 사무소는 딸깍딸깍하는 키보드 소리로 시끄러웠다. 루시아가 최근 재미를 붙인 배틀그라운드 플레이 소리였다.
“아! 아~ 죽었네. 이번 판은 진짜 1등할 수 있었는데. 아 에임 진짜… 에효 이 에임 언제 좋아지냐.”
“방금 김석철 형사님한테서 이메일 왔어. 백재인씨가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대. 검색기록이랑 ‘카페발전계획’ 문서가 강력한 정황증거가 되는 모양인데, 실제 백재인씨가 독을 투여한 건지에 대한 물증이 없다고 변호사가 주장하는 모양이더라고.” 주혁이 말했다.
“크흠… 맞아. ‘내가 피해자에게 독을 쓸 계획이 있었고 많이 찾아봤지만 실제 독을 쓰지는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계획을 갖고 있었고 독을 쓴 거 아니냐?’라고 백재인이 주장한다면 범죄를 입증하기 어려워. 백재인 주변에서 남은 독이 발견되거나 해야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국에서도 남편을 독살한 사람이 정황증거가 채택돼서 감옥에는 갔는데 계속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하니 모르는 일이지.” 루시아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카페발전계획 문서 궁금하지 않아?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주혁이 말했다.
“글쎄 뭐 범행계획같은 거 아니겠어? 여자들은 뭔가를 기록해놓는 경향이 있어서 가끔씩 범죄나 불륜을 들키곤 하니까.” 루시아가 말했다.
“근데 그 사람 집을 나가면서 너한테 한 말 말이야, 내가 듣기에도 섬뜩하더라. 무섭지 않아?” 주혁이 말했다.
“무섭긴 한데, 그런 거 다 신경쓰면 빅탐정할 수 있겠어? 그래도 죄지은 사람들은 벌을 줘야지. 나 배틀그라운드 한 판 더할 거야. 새 사건 아니면 방해하지마.”
테헤란로의 빵빵거리는 차량소리와 배틀그라운드 시작 배경음악이 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주혁이었다.
미주
1) 위키피디아 "Ricin"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Ricin)
2) 나무위키 "테트로도톡신" 참고 (https://namu.wiki/w/테트로도톡신)
<끝>
차기작 후보
빅탐정 루시아: 스텝 언더 더 문라이트
빅탐정 루시아: 루시아의 마지막 60초
빅탐정 루시아: 홍학 혐오자
빅탐정 루시아: 빼앗긴 밀리터리 베이스에도 봄은 오는가
빅탐정 루시아 비긴즈: 학교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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