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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사진작가 카파가 찍은 공화국 병사의 저격당하는 장면
* 사진계의 전설, 카파...그는 위의 사진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오마하 해변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밖에 여러 전쟁터에서 뛰어난 작품
을 남겼습니다. 2차대전 당시 파리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염문을 뿌렸고 헤밍
웨이를 파파라고 따르면서 전쟁터에서 그와 함께 했습니다. 베트남전 초기 사진
촬영을 위하여 전쟁터를 누비다가 지뢰를 밟고 사망했습니다.
[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이 영화는 1943년 파라마운트픽처스가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하였습니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감독 샘 우드가 연출하였으며, 원작자인 헤밍웨이와 더들리 니콜스가 공동으로 각본을 썼습니다. 명우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을 맡았으며, 상영시간은 134분.
시대적 배경은 1936년 공화파가 집권하고 있는 스페인에 반발, 프랑코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전쟁으로 확대된, 1937년 스페인 내란에 얽힌 짧고 긴박한 3일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미국의 젊은 대학 조교수인 로버트 조던(게리 쿠퍼 분)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남의 나라 스페인 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페인 내란에서 조던은 반 프랑코파의 골즈장군 휘하의 게릴라 부대에 참가하여 일정한 임무를 맡아 세고비아 남쪽 과다라마 동굴지대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철교를 폭파하기까지의 3일 동안 조던을 비롯한 여러 주인공들의 행적을 밀도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에서의 정치성의 강조보다 전쟁이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싹튼 운명적 사랑을 감동있게 묘사하여 갈채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죠. 열렬한 공화정부 지지자인 게릴라 부대장 아내이며 여걸형 필라와 기타 개성이 강한 등장인물들이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미국인 로버트 조단과 스페인 처녀 마리아의 역경을 초월하는 격렬한 사랑의 장면이 감명 깊습니다. 그리고 작가 헤밍웨이가 이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인 개인과 인류와의 관계 그리고 자유의 위기와 개인의 무력함과 연대 책임의 중요성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이 원작은 미국 사실주의의 대표적 걸작으로 냉철한 시각, 박력 있는 표현으로 평가 받았고 62세의 나이에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의 굴절된 삶을 예측 가능케 하기도 합니다.
1943년 아카데미상에서 남녀 주연상 등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게릴라 대장 파블로의 여장부 아내 필라 역을 맡은 카티나 파크시누가 여우 조연상을 받음과 동시에 파크시누와 함께 파블로 역을 맡은 아킴 타미로프는 골든글로브상의 남녀 조연상을 함께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기억되는, 그리고 영화사상 가장 명 키스장면으로 손꼽히는 장면...푸른 달빛이 가득한 바위틈에서 조던과 첫 키스를 나누려는 순간, 수줍은 19세 처녀 마리아가 서로의 코가부딪치지 않게 코의 위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조던은 자기 코가 맞부딪히지 않게 얼굴을 엇갈리게 비스듬히 옆으로 돌려 "이렇게!"라며 입술을 포개는 장면이죠.
이 영화의 원작자인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특파원으로서 1937년 스페인으로 건너가 내전의 진상을 직접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스페인 정부군에 협력하여 영화 <스페인의 땅>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전미작가회의에서 파시즘의 타도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행동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인과 인류와의 관계, 자유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인류 전체에 대한 굳은 연대의식의 중요성 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몬태나 대학의 스페인어 강사로 근무하는 미국인 청년 로버트 조던(게리 쿠퍼 분)이 1년간의 휴가를 얻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스페인 내란에 뛰어든 로버트 조던에게 내려진 새로운 임무는 적군의 진격로에 해당하는 산중의 철교를 3일 후에 폭파 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던은 안세르모라는 늙은 집시의 안내를 받으며 목적하는 산지로 찾아 들어갑니다.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서는 이 산악지방 집시 게릴라들들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게릴라들의 두목은 술을 좋아하는 파블로였는데 그는 이 작전에 선뜻 협조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던은 파블로의 아내인 여장부 필라와 이 일을 협의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진하여 게릴라들을 지휘해서 이 계획을 원조할 것을 약속합니다. 파블로의 부하들은 모두 필라의 명령에 따라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합니다. 그 와중에 스페인 처녀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 분)는 첫눈에 조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시장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파시스트에게 총살을 당했으며 자신은 강간을 당한 뒤에 게릴라 부대 대장인 파블로에 의해 구출됐지만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조던과 산악지대 게릴라 부대의 일원인 순박한 처녀 대원인 마리아는 짧은 만남이지만 순식간에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한편으론 마리아도 정신적 충격에서 점차 안정감을 되찾고 전쟁터에서의 이들의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은 찰나적으로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작전 중에도 늘 조던 옆에 있고 싶어 하지만 그는 자기 임무에만 충실히 몰두합니다. 마리아는 함께 생활하는 무지한 동료 게릴라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달리 품위 있는 조던의 인격과 행동을 보고 주저 없이 그를 선택하고 만 것이죠. 그리고 고백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거예요. 의미있게 살아야 사는 것이지요.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당신에게 밥도 해주고 책도 읽어주고 커피도 끓여 주겠어요."
그러나 조던은 "나는 밥도, 책도, 커피도 혼자 다 할 수 있어요."로 답하자 "그럼 당신의 머리를 깎아 줄게요." 라고 응답합니다. 다시 로버트가 "나는 머리 깎는 걸 싫어합니다." 라고 하자, "저도 그래요. 그 점은 저와 같군요. 그럼 저는 할 게 없네요. 밤에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일 밖에?" 라고 웃자 조던은 그때서야 마리아를 힘껏 포옹합니다.
밤새 내리던 눈은 그치고 맑게 개인 다음날 아침, 적의 전차가 철교에 왔을 때 우렁찬 폭음이 들렸습니다. 철교는 두 토막으로 갈라지고, 적들의 전차는 골짜기에 처박혔습니다. 조던은 위험을 무릅쓰고 철교를 폭파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말을 몰고 철수하는 도중에 적의 공격을 받아 크게 부상을 당합니다. 마리아는 쓰러진 그의 몸에 매달려 울며 떠나려 하지 않지만 조던은 그녀에게 떠날 것을 설득하고 필라도 단호했습니다.
"마리아, 나는 미국에 갈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조던은 심한 부상을 입었기에 다른 일행이 탈출할 수 있도록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게릴라 대원들에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마리아를 강제로 끌고 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안전지대로 보내고 싶은 남아의 최후의 보호 본능이었습니다.
"안돼요, 안돼!" 마리아가 함께 남기를 고집하자 "마리아 당신이 떠나면 나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어서 떠나요. 항상 같이 있는 것으로 기억해 줘요. 작별 인사는 하지 말아요.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아니니 강해져야 해요. 생명은 고귀한 것이오." 조던은 부대원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고 혼자 남아서 추격군과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며 동료들의 탈출 시간을 벌어주려고 안간힘을 쏟습니다.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치다 드디어 부대원들이 마리아를 말에 태워 함께 떠나자 멀어져 가는마리아를 뒤로 하고 조던은 홀로 남아 기관총을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탄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을 맞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 울린 것입니다.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 스페인 내전 ]
‘인류는 정의도 패배당할 수 있음을, 그리고 용기가 그에 상응한 보담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에서 배웠다.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의 드라마를 자신의 비극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프랑스 작가)
스페인 내전, 그것은 선과 악의 직선적 대결이었습니다. 이 20세기의 참혹한 비극은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되어 있던 프랑코가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됩니다. 국민이 선택한 공화파 정부를 마땅찮아 하던 대지주, 자본가, 카톨릭 교회, 군부가 호응했습니다.
반란군은 쉽사리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은 거셌습니다. 대도시에서 반란군은 대패했습니다. 스페인 민중의 힘은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이상에 대한 정열과 행동에 대한 도취...스페인 내전은 예술인들의 행동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스페인으로 떼로 몰려들었습니다.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당시 세계에 회오리치던 보수와 진보, 파시즘과 자유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 이념적 긴장과 대립이 스페인 내전 한판에 응축되었습니다. 그것은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고 한편으로는 "펜(pen)"들의 전쟁이었습니다.
3년간을 끌어온 내전은 공화파의 완패로 끝났습니다. 파시스트들의 국제적 연대가 공화주의자들을 압도했던 것입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에 대규모 화력을 지원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어정쩡했습니다. 1938년 1월 바르셀로나 함락, 1939년 3월 마드리드 점령,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미국의 프랑코 정권 승인,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그것은 참으로 허망한 역사의 공전이었습니다. 역사의 냉소였습니다.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피의 밭’에서 정작 자라난 것은 프랑코의 36년간의 철권통치였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간 프랑코, 그가 죽기 전 "적을 용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겐 적이 없다. 모두 사살되었다."라고...
* 프랑코 총통
< 배경 >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1936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오랫동안 대립되어온 '두개의 스페인', 즉 두 개의 광신적이라 할 만한 정열과 이상이 파괴적인 형태로 맞부딪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두 스페인'이 공존의 길을 찾지 못해 마지막으로 도달한 유일한 출구였습니다.
두 스페인이란 하나는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급진적이고 범세계적인 지식인과 진보주의자들의 스페인이고, 다른 하나는 카톨릭적이고 맹목적이며 엄격하고 스스로 폐쇄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스페인이었습니다.
1936년 당시 군대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 내에서까지도 이러한 '두 스페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양 진영에는 각각 군인도 있고 사제도 있었습니다.
또 중산층과 지식인층, 카톨릭교도와 반교회주의자, 전통을 옹호하는 계층과 진보적인 그룹 사이에 갖가지 알력과 상극이 존재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스페인 사회는 가로와 세로로 분단되어 서로의 틈을 메우기에는 너무 넓고 깊었습니다.
< 내전 발발 >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다음날인 18일, 프랑코는 좌천당해서 근무하고 있던 카나리아 제도에 게엄령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세계를 뒤흔든 스페인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일, 이미 스페인령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군에게 본토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본토 상륙작전은 전투의 국면을 좌우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군은 우물쭈물하다가 프랑코의 본토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실패로 끝났을 쿠데타’가 스페인 전체의 내전이라는 비극적인 양상으로 번지게 됩니다. 즉, 반란군을 지지하는 한쪽의 스페인 국민과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또 다른 한쪽의 스페인 국민, 다시 말해 ‘두 스페인’이 서로를 증오하고 무차별로 죽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전은 공화국 정부군 쪽이 우세한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도시와 우수한 무기, 많은 자원, 공업지대, 풍요한 농업 지대, 와화 등이 모두 공화국 정부군의 손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한편 반란군은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군수물자마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양쪽 진영의 사기를 비교해보면 반란군 쪽이 더 높았습니다. 공화국 정부가 교회와 군대를 억눌러온 데 대한 반란군 진영의 복수심, 그것이 바로 반란군 쪽의 사기를 높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반란군 진영은 봉기한 곳이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횡적인 연락망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만큼은 프랑코라는 한 명의 군사령관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철저하게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진영은 공화국 정부와 혁명을 지향하는 여러 정파가 서로 옥신각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전이 ‘전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라는 쓸데없는 소모적인 논쟁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초기 단계부터 유럽과 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이 국제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공화국 정부군 측에서는 작가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이 참여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진 4만여 명의 국제여단이 활약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외국의 원조가 시작된 이후로 공화국 정부군 진영에 주어진 인적, 물적 원조가 반란군 진영에 주어진 것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투에서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반란군 쪽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가운데,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반란군이 승리했습니다.
2년 9개월 동안 스페인을 보수와 혁신으로 양문한 스페인 내전에서 약 3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25만 명에서 50만 명의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공화국 정부군의 패배 원인에 대해서 당시 공화국 정부군 편이었던 역사가 산체스 아르보르노스는 “공화국 정부를 넓게 뒤덮고 있던 ‘태만의 정신’,‘미래를 향한 비전의 결여’,‘충분하지 못한 조직화’ 등이 그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을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이렇게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스페인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 국제 여단 >
1936년 늦여름과 가을 무렵, 일단의 젊은이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잠입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위조한 여권을 들고 국경을 통과했습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젊은이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에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50여 개 나라에서 온 4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군부 쿠데타로 위기에 처한 스페인의 공화국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서 총을 들고 '국제여단'의 이름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입니다.이들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 왼쪽부터 헤밍웨이, 피카소, 앙드레 말로
그리고 공화국 정부의 승리는 곧 유럽의 반파시즘 전선의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파시즘을 막으면 당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선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국제여단원이 되어 스페인에서 벌이는 투쟁이 곧 자기 조국을 파시즘의 마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한 독일 출신의 공산주의자는 "이 내전은 스페인 사람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국제여단원들은 "마드리드를 거쳐 로마로 간다!"가 자신들의 구호였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국제여단의 이탈리아 연대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프랑코군의 편에 선 조국의 파시스트 부대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반란군은 프랑코 장군의 지휘 아래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본토에 상륙했습니다. 독일 또한 물자를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병력과 무기를 투입해 프랑코를 도왔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가 서로 협조하여 반란군을 지원하는 동안 위기감을 느낀 유럽의 좌익 세력은 어떻게든 스페인의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려 했습니다.
내전은 이렇게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마드리드를 점령하기 위해 반란군은 정예부대를 앞세워 파상공격을 가했으나 마드리드 시민들과 국제여단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국제여단원들의 구호는 "노 파사란(Nopasarán)", 즉 "그들은 통과하지 못한다!"였습니다.
만약 마드리드를 반란군에 빼앗긴다면 프랑코가 손쉽게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을 것이라고 국제여단원들은 생각했습니다. 국제여단의 활약으로 마드리드는 사수되었습니다. 이로써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적인 소모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여단원들은 늘 앞장서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감하게 싸웠던 국제여단원들은 처음에는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거의 훈련을 받지 않고 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많은 국제여단원들은 난생 처음 소총을 만져보았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또 벨기에 출신의 한 국제여단원은 "잿빛 바다와 구름 낀 하늘의 1936년 비오는 가을에 생긴 모험심과 권태감 때문에 스페인에 갔다"라고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이유를 지극히 낭만적인 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 헤밍웨이, 공화국 병사들과...
국제여단이 실제로 전투를 치르면서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했습니다. 전투에 투입된 지 석 달 만에 영국인 국제여단 600명 가운데 400명이 전사했습니다. 국제여단에 맞서 싸운 상대방은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정규군이었습니다. 한 미국인 연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다 단일 전투에서만 400명 가운데 298명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1월에 제11국제여단이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을 때 2천 명이던 여단 병력은 6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군사학에서 보통 전력의 30%가 사상해도 '괴멸'되었다고 본다는 것을 감안하면 국제여단이 당한 피해가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피해는 단지 국제여단원들의 훈련 부족이나 무기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혹독한 자연에서 오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공포심이나 물자 부족은 일상사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언어 장벽이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로 구성된 부대인 만큼 부대원 사이에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전투에서 치명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찬가>에서 "정의의 편에 섰다는 의식은 사기를 높일 수 있다. ······ 그러나 자연의 법칙이 반혁명군(프랑코 측)보다 혁명군(공화국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투철한 혁명 세력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아성이었던 바르셀로나가 중심지로 되어 있는 카탈루냐마저 프랑코 군에게 빼앗기면서 공화국 정부군의 패색은 짙어만 갔습니다. 내전 막바지에 공화국의 총리가 된 네그린은 1938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서 "스페인 정부는 정부 편에 서서 전투를 벌이는 비스페인인 전투 부대(국제여단)를 완전히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국제여단원들은 차례로 스페인을 떠났습니다. 그 이듬해인 1939년 2월 국제여단은 스페인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1939년 2월 말,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했고 3월에는 결국 마드리드가 프랑코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내전이 끝나고 스페인을 떠난 많은 국제여단원들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환영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여단원들은 여전히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배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국제여단에 참가한 미국인들을 공산주의자들의 '봉'이라고 멸시했습니다.
* <1984년>의 저자인 영국의 조지 오웰
프랑스로 간 국제여단원들은 곧바로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하지 못하고 비시 정권 하에서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추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소련인 군사 고문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숙청이었습니다.
숙청의 대상자 수가 할당되는 상황에서 외국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소련인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숙청 대상이었던 겁니다. 동구권 출신의 국제여단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독일군의 추격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소련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 게르니카의 비극 ]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1937년 4월 26일, 그날은 마침 게르니카의 장날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오후 4시경, 독일의 하인켈 111형 폭격기, 융카스 52형 폭격기, 하인켈 51형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편대(콘도르 부대라고도 불렀습니다)가 게르니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면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독일 공군의 참전은 프랑코의 지원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창설 중인 독일 공군의 신병기 실험장으로 이용하자는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의견을 받아들여 프랑코의 지원 요청에 응했습니다.
독일 공군 ‘콘도르 부대’는 편대의 구성, 폭격 및 기총소사의 방법, 각종 폭탄의 성능 등을 스페인에서 실험했습니다. 바로 이 ‘콘도르 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공군의 주력부대가 되었음은 물론이었습니다.
* 독일군 폭격기
독일 공군의 폭격 및 기총소사로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타버렸습니다. 눈에 띄는 건물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향하여 퍼붓는 기총소사가 오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활활 타올랐습니다.
집과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거리마다 잿더미가 쌓이는 바람에 도로의 대부분은 통행이 불가능했습니다. 생존자들은 불에 탄 시체들을 도로에서 치워냈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이웃의 시체를 치우면서 모두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게르니카 생존자들이 이웃의 시체를 챙기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폭격이 끝난 직후 프랑코를 지지하는 병사들이 나타나서 시체들을 모두 모아 소각해버렸던 것입니다. 독일 공군의 만행이 저질러진 뒤 게르니카의 끔찍한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지만, 프랑코 측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몇주일 뒤 영국의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왔으나 시체들은 이미 소각되고 없어졌습니다. 조사단은 무너져 내린 게르니카 시가지를 간단이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게르니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방화되었다.”
당시 파리에 있던 화가 피카소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는 폭격 소식을 듣고 ‘화가의 모델’이란 원래의 구상을 접고, 게르니카의 폭격을 주제로 하여 1개월 만에 작품을 완성시켰습니다.
가로 7.8m, 세로 3.5m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는 흑색과 회색이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핏빛인 붉은색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죽은 어린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도움을 구하는 남녀, 상처입고 울부짖는 말, 칼을 쥐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 찢어진 깃발과 부러진 칼, 무심한 눈빛의 소...등을 표현한 이 그림에는 전쟁과 파시스트에 대한 피카소의 증오와 분노가 짙게 드러나 있습니다.
게르니카의 폭격 소식의 충격과 맞물려 이 그림은 전시 직후부터 전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후 이 그림은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1973년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정치가 부활되는 날에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에야 비로서 <게르니카>는 뉴욕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이 그림은 국립 소피아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 독재자, 프랑코 총통 ]
프랑코는 1892년 갈리시아주 에페롤(스페인 북서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10년 소위로 임관하여 스페인군과 스페인 통치에 저항하는 모로코 민족주의 세력 간의 격렬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프랑코는 23세에는 이미 용맹한 자질과 지휘역량을 인정받아 대위로 진급합니다.
당시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에서 최연소 대위였습니다. 1920년에는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프랑코는 스페인을 이끌어야 할 사람은 국왕 알폰소 13세의 권한을 조금씩 잠식하고 있던 정치인들이 아니라 자신처럼 전투로 단련되고 군대 생활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강인하게 다져진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939년 프랑코군의 마드리드 점령을 끝으로 3년간의 내전이 종식되었습니다. 프랑코는 총통으로 취임하였고 이 후 36년간 스페인을 독재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잘한 일중의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편에 붙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스페인을 대전의 참화에 빠뜨리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히틀러 덕분에 스페인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독일과 한편이 되어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히틀러는 프랑코를 꼬드겨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프랑코는 요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의 요청을 회피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매번 뺀질뺀질하게 빠져나가는 프랑코가 얄밉기 한이 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식식대기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코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 영화에서...
프랑코는 기묘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처량하고 작은 목소리 때문에 인상적인 대중 연설가는 못됐습니다. 가끔씩 그는 공무를 뒤로 하고 며칠씩 낚시와 사냥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는 매우 가정적이며 전통적으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모든 사람이 그의 면전에서는 겁에 질려 발발 떨면서 양같이 온순하게 행동할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 죽은자들의 계곡의 기념관, 마드리드에서 약 50km 떨어진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죽은자들을
위한 기념관' 프랑코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했다고 합니다. 성당의 맨 안쪽에 프랑코의 무덤이 있
읍니다. 이곳에는 프랑코의 적군과 아군이 모두 묻혀있습니다. 이는 프랑코가 자신의 부정적 이미
지를 지우기 위하여 그의 포용력을 보이기 위한 조치였다고 전해집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독재자로서 평은 안좋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가 남겨 놓은 재산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프랑코는 프랑코파든 공화파든 간에 내전 중에 목숨을 잃은 60만 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드리드 근방 전사자 계곡에 거대한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내전 중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묻혔는데, 프랑코도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 이 기념관은 바위에 구멍을 뚫고 만든 일종의 거대한 성당으로, 정상에는 125m의 거대한
십자가가 설치되었습니다. 성당의 전체 길이는 300m이며, 암벽 속의 길이만 해도 260m에
달합니다. 로마의 바티칸 성당이 260m인데 그것보다 길어서는 안된다는 지침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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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층 업그레이된 누구를위해
종을 울리나?
명화중 명화
이틀에 나눠 음미하면서
읽고 행복하겠읍니다
감사
버그만 내 타입입니다
짝사랑 죤나게 했읍니다
딸도 배우인디
엄마못지않게 이쁘던데
청순한 미모로 세계의 남성들을 후끈 달게했던 영원한 디바,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는 스웨덴 치과의사와 살다가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한
이후 한번 더 결혼했지만 이것도...그녀는 위에서 소개했지만 세계적인 사진작
가 로버트 카파에 청혼한 적이 있었으나 카파는 자기는 항상 전쟁터를 찾아 다
니는 사람이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거절(그는 실제 전쟁터에서 죽지요)한기도
한 스토리가...끝까지 영화계에서 불멸을 족적을 남긴 버그만은 영원히 세계 영화
인들의 추억 속에...
로버트 카파! 멋진 사람
로버트 카파...
그의 카메라 속엔 너무나 많은 죽음과 공포가,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연민과 사랑이 들어있다.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1954년, 41세의 나이로 베트남의 전장에서 사망하기까지 사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가였습니다.
그는 화려한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헤밍웨이,스타인벡 등 세계적 문호들,헐리우드의 거장들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한 당대의 매혹적인 여신들을 매료시킴 무적의 여성 편력자이기도 했습니다. 라
이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체스터필드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던 이 천하의 보헤미안!!
사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가 로버트 카파 히 이즈 퍼스넬리티!
잘 알앗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