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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 2장 -아니무스, 아니마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1.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
**“과거의 근원이 결합되어 있는 심연보다 더 깊은 심원한 여인이여. 왜 그대는 나하고만 함께 있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대는 전생의 존재들의 골짜기로 소멸하는구나“ –이반 골, [다양한 모습의 여자]
“내 영혼은 목신의 영혼이자 쳐녀의 영혼이다.” -프랑시스 잠, [토끼 소설]
**꿈과 몽상의 대립 속에서—말로 하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부재하는 연인에게 하게 될 말을 준비하는 몽상에서 낱말들, 아름다운 낱말들은 충만한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또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낱말들이 몽상의 언어에 속하느냐, 명료한 삶의 언어에 속하느냐 (휴식의 언어에 속하느냐, 감시받는 언어에 속하느냐) 자연스러운 시의 언어에 속하느냐, 권위적인 운율법에 단련된 언어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신적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다. 밤의 꿈은 검열에 대한 격렬한 혹은 교활한 투쟁일 수 있다.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열 없는 언어를 알게 해준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진정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료한 의식을 아직은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시에 경험한다고 해서 놀랄 게 아무것도 없다. 어떤 정념의 미래를 체험하는 몽상은 자신의 정념의 대상을 이상화한다. 이상적인 여성적 존재는 정념에 사로잡힌 몽상가에 귀를 기울인다. 몽상은 이상화된 남자의 고백을 야기한다.
**우리 자신을 현실적 존재와 이상화하는 존재로 이중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몽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몽상이 ‘심층심리학’의 가장 좋은 학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층심리학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가르침을 우리는 몽상의 실존주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적용할 것이다. 인간 정신 현상의 그 어떠한 요소에도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완전한 심리학 같으면 가장 극단적인 이상화, 즉 우리가 앞서 출간한 한 책에서 절대적인 승화라고 지칭했던 지대에 도달하는 이상화를 통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심리학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인간에 결부시켜야 하고, 몽상의 시학을 삶의 단조로움과 결합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가 볼 때 분명한 것은 말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충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멀고 지극히 모호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의식은 중얼거리며 우리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듣는다. 자유로운 몽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잘 화합된 고요한 이중적 본성 속에서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모든 학파 가운데, 인간 정신 현상이 그 원초성에서 양성적이라는 점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것은 C.G.융의 학파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된 추억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성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자기 무의식의 심층을 이중의 안테나를 갖고 가볍게 건드린다.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의 심리학이 될 정도로 흥미롭다. 예컨대 왜 니체는 “엠페도클레스가 자신이 사내와 계집이었음을 (...) 기억했다”고 이야기하는가? 니체의 여성성읜 보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심원하다.
**우리의 검토를 몽상의 세계로 한정하는 우리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경우에도 조화로운 양성성은 마음을 평온케 하는 작용 속에 몽상을 유지시켜 주는 그 나름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원초적인 양성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것들 사이의 경쟁을 표시한다. 양성성은 자신의 거처 —심층적 몽상의 거처 같은 곳—를 떠나자마자,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흔들림에 빠진다. 심리학자가 비정상 상태라고 표시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흔들림이다. 그러나 몽상이 깊어지면 이런 흔들림은 잦아들고, 정신 현상은 성의 평화, 즉 말의 몽상가가 경험하는 그 평화를 되찾는다.
**심리학자 뵈이텐디예크는 [여자]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정상적 남자는 남성성이 51퍼센트이고 정상적 여자는 여성성이 51퍼센트라는 점을 참조하고 있다. .....완전한 남성성과 완전한 여성이라는 두 평행적인 단일주의에 대한 조용한 확신을 깨트리는 것, 그러나 시간은 모든 균형에 영향을 미친다. 낮과 밤, 계절과 나이는 우리의 균형 잡힌 양성성을 고요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각각의 인간 존재 안에서 남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와 여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수치와 측정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여성의 시계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간다. 남성의 시계는 급격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몽상과 인식노력을 솔직하게 변증법적으로 대비시켜 보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을 따라 전개된다. 그것은 보다 덜 깊은 것, 언제나 덜 깊은 것(남성)으로부터 언제나 깊은 것, 언제나 더 깊은 것(여성)으로 간다. 단순한 고요함의 휴식 속에서 포괄적으로 펼쳐지는 여성성을 우리가 만나는 곳은 몽상 속에서이고, 앙리 보스코가 언급하듯이 ‘잠재적 삶의 무궁한 저장고’에서이다. 정염의 삶에서조차 남자와 여자는 각기 자신의 이중적인 힘을 이용할 줄 안다. 따라서 두 파트너의 각자 안에 그들이 지닌 이중적 성의 조화를 가져오거나 유지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 어려운 문제가 된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8.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성격학적 분류를 결정하기 위해 열거하는 여성성의 징후들은 정상적인 아니마, 다시 말해 정상적인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살아가는 아니마와의 진정한 접촉을 제시하지 못 한다. 그건 심리학자의 방식이며 동요된 아니마, 그러니까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니마의 거품만을 주목한다. 마치 여성적인 휴식의 안전을 경험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리적인 성적 구분의 두 기호로 인간은 너무 급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부드러움, 이중적 부드러움, 아니무스의 부드러움과 아니마의 부드러움을 다루는 심리학이 가동될 수가 없다. 새로운 낱말들을 가지고 오래된 언어를 말한다는 건 나름의 모순에 빠질 수가 있다는 뜻.
**일상 속의 남자와 여자는 드레스와 바지로 이해되듯이 두 개의 반대 개념으로 규정된다. 아니무스는 정신적 성장 속에서 밝혀지고 지배하는 반면, 아니마는 존재의 지하실을 향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몽상적 차원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다르다. 그것은 몽상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마라는 점이다. 아니마는 고독이다. 몽상은 모든 아니마의 자유로운 확장이다. 시인이 아니무스적인 관념들에 노래의 구조, 노래의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아니마의 몽상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아니마의 몽상이 없다면, 시인이 아니마의 몽상으로 쓴 것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은 몽상을 하면서만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아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직무에서는 권위적인 사람들, 빳빳한 군모를 쓴 어떤 군인이, 저녁이면 부인이나 노모의 권위에 움츠린 채 매우 겸손해진다. --이러한 성격상의 모순들이 소설적 진실 속에 깃든 심리적 정확성이다.
**심층적 인간, 곧 고독 속에 있는 인간을 다루는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명백한 결정이 정교한 존재론의 연구를 멈추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비스마르크의 눈물(융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눈물에서 돌연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무스의 그와 같은 무너짐이 아니마의 긍정적 나타남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아니마는 허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가사 상태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힘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휴식의 내적 원리이다. ‘눈물’이 아니마의 기호는 아니다. 슬픔, 회한, 피로의 길 끝에서 오는 게 아니다. 심리학적 관찰은 서로 분리되는 시점이 아니라,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 의해 관찰된다. 그것은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의해서만 관찰되지는 않는다.
**아니마는 우발적인 일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실체이고, 자신의 화합된 존재를 부드럽고 천천히 즐기고자 하는 화합된 실체이다. 우리는 몽상을 심화시킬 때, 몽상, 특히 잔잔한 물의 대단한 휴식 속에서 물의 몽상을 사랑할 때 보다 확실하게 아니마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 이상화하는 몽상 속에서 아니마의 순수성을 새롭게 해 주는 죄 없는 물이여! 휴식 상태에 있는 물에 의해 이처럼 단순화된 세계 앞에서 몽상하는 영혼의 자각은 단순하다. 단순하고 순수한 몽상의 현상학은 우리를 우발사(遇發事) 없는 정신 현상으로, 휴식의 정신 현상을 향해 인도하는 길을 열어준다. 잔잔한 물 앞에서의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니마의 선(善)인 항구적인 정신적 일관성을 경험하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고요함의 가르침이로, 우리의 본성이 지닌 고요함, 우리의 아니마가 지닌 실체적인 고요함을 자각하라는 간청이다.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스스로 자족하는 본성이고, 고요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심층적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잔잔한 물의 존재이다.
**연금술사의 애니미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찬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실험하고 수많은 실험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것의 애니미즘이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몽상을 실험한다. 이때부터 연금술의 언어는 몽상의 언어이고, 우주적 몽상의 모어이다. 이 언어는 몽상되었던 바대로 고독 속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연금술의 책을 읽을 때 가장 혼자가 된다. 우리는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바로 우리는 세계를 몽상하며 태초의 언어를 말한다. 그런 몽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의 용어들을 주의 깊게 탈사회화(脫社會化)해야 한다. 그러니까 은유에 완전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전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낱말의 몽상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인가!
**이때 은유는 기원, 다시 말해 직접적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이미지의 기원이다. 연금술사의 몽상에서 왕과 왕비가 어떤 실체를 만드는 데 참석하러 온다며 그들은 요소들의 결합을 주재하기 위해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의 위대함의 상징인 것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들은 우주적 창조를 위해 작업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위엄을 나타낸다. 단번에 우리는 분화된 애니미즘의 정점으로 이동해 있다. 살아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위대한 활동 속에서 왕과 왕비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분리시킨다면 현실이 없는 결합된 두 힘이다. 연금술사의 왕과 왕비는 세계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이며, 이것들은 몽상하는 연금술사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확대된 모습들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내부에서 가까이 있듯이 세상에서도 아주 가까이 있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5.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3)
**연금술사의 언어는 정열적인 언어이고, 몽상가의 영혼 속에 결합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대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연금술은 왜 서로 통합된 언어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대화에서 어떤 보석으로 제련시킬 것인가? 연금술사의 사유를 펼쳐보자.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그 나름의 어휘를 지니고 있고, 그 어휘를 따라갈 때 모든 것은 이 두 어휘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난다. 사물, 물질, 별....그것들의 이름이 지닌 위엄에 복종해야 한다.
**이 이름들은 찬양이나 멸시를 나타내지만, 거의 언제나 찬양을 나타낸다. 어쨌거나 저주의 어휘는 보다 간단하다. 저주는 몽상을 깬다. 연금술에서 그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물질의 힘을 일깨워야 할 때 찬양은 절대적이다. 찬양은 마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찬양과 찬탄의 언어, 몽상적 연금술로 연습하기)
예;
1.찔레꽃 그대는 ***이다!
2.고양이 너는 ***하다!
3.돌멩이는 ***을 위하여 **한다!
4.바다는 ***하다!
5.( )은 나의 ( )처럼 아름답다.
6.나의 ( )을 위하여 오늘 지금 ( ) 할 것이다.
“그처럼 찬양에 뒤덮이자 인드라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뒤메질’-
**반죽의 아니마—우리가 작업을 할 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몽상은 손으로부터 사물로 이어지며 몽상적 상태를 체험한다. 영혼과 사물에게 신비는 내부에 있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몽상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열린다. 우리는 관념과 몽상의 복합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실체에 대한 몽상, 말로 표현된 몽상은 물질이 탄생, 생명, 정신성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문학은 여기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 없다면 모든 것은 소멸하고, 현상들은 가치의 광채를 상실하고 만다.
**투사: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의 교감에 관한 심리학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변증법은 ‘심리적인 투사’의 현상처럼 나타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의 아니마에서 자기가 경배하는 모든 가치를 이 여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자는 자신의 아니무스가 정복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를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투사한다. ---이 두 교차된 투사가 균형이 잘 잡혀 있을 때, 그것들은 강력하게 결합한다. 이 ‘투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현실에 실망을 한다면 실패한 삶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러나 몽상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삶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몽상의 진정한 본능은 우리의 아니마 속에서 활동적이며 정신에 연속적인 휴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실패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비현실적인 기능이 지닌 구체적인 용도는 매우 정연한 이상화(理想化) 속에 있다. 여자의 아니무스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남자와 남자의 아니마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여자는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결합적인 힘들이다.
**고독한 몽상의 비밀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암영들이 아니라 사랑의 새벽을 밝히는 미광들이다. (아니무스의 잠재성과 아니마의 잠재성을 포함하는 두 개의 정신 현상 사이에 4극적인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상화와 현실 그 어느 쪽도 망각하지 않는 것! (교재 97페이지 도표 참조)
**어떤 책들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태들은 독서의 시기들 그때마다 동일한 풍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위대한 책은 특히 심리적으로 살아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고 또 읽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예를 들어)
**연금술에서 우리는 지적인 인내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의식의 불순물들을 뒤지는 심적 인내의 작용 자체 속에 있다. 연금술사는 물질을 가르치는 자이다. 지상의 모든 실체에게 그것의 젊은 활력을 다시 주겠다는 꿈은 근본적인 덕성이 얼마나 대단한 꿈인가! 그 덕성의 기나긴 작업을 한 후 자웅 양성 속에 결합된 원리들은 성스러운 결혼이라 마땅할 정도로 ‘순화’된다. 양성에서 성혼(聖婚)으로까지 이것이 연금술의 명상이 가는 심리적 거리이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힘에 의지한 복잡한 확신을 통해 연금술사는 세계의 영혼을 포착하고 이 영혼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연금술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가는(물질로부터 언어적 몽상으로 투사되는) 영혼의 문제가 된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사랑받으며 미덕으로 치장된 존재의 모든 이상화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또 삶을 몽상하면서 표명된 이상적인 것들에 심리적인 현실을 부여하는 그 모든 치환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가 만나는 전이와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복잡한 전이를 생각해야 한다. ‘전이’(몽상적인 의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주적인 상황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상적인 세부적 관계를 넘어서며. 사회적 상황을 넘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그가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세계를 가공하는 그의 이상화 충동을 따라서 이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것은 자웅양성적 특성인데, 그 특성의 이중적 고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자웅양성적 특성은 생명의 모호한 기원에, 어떤 불분명한 동물성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점(頂點)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부터 오면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고양을 보여준다. 그것은 초(超)남성성과 초(超)여성성이 결합된 몽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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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적 아니마와 결합적 자웅양성과 정점의 변증법을 위하여!
창작의 언어를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투사와 복잡한 전이의 다양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할 것이다. 빗살의 눈빛들이여 몸과 영혼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총체적 시간들이여 함께 가자 이상화의 세계를 향해! 현실의 몽상적 길을 밟으며....한 발 한 발, 매순간 아름다운 시어를 만나보자!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12.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4)
**몽상은 몽상가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음으로써 몽상가를 그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다른 존재는 여전히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복제 분신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를 반영하는 존재인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을 회의(懷疑) 속에서 강화할 것이다. 사실 몽상은 존재를 보다 부드럽게, 보다 자연스럽게 양분한다. 그것도 참으로 대단한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내가 나보다 덜한 존재가 되는 몽상이 있다. 그때 그림자는 풍부한 존재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의 심리학자보다 더 예리한 심리학자이다. 우리 존재의 분신인 그림자는 우리의 몽상 안에서 ‘심층심리학’을 경험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이중적이듯이 이중적 분신인 그림자를 통해, 역설들의 핵심에 다다른다. ‘분신은 이중적 존재의 분신이다.’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되는 현상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공상의 심리학이 없다면 진짜 심리학도 없으며, 완전한 심리학도 없다. 자신의 몽상 속에서 인간은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몽상을 하는 고독한 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심리적인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명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혼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넷이다. 고독한 몽상가는 4극(책 97쪽, 표 참조)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우리는 한 여자 옆에 우리의 영혼을 부분부분 놓아둠으로써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양분하고 예전에 우리에게 중성적이었고 무심했던 사랑받는 여자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의 옷을 입기 시작하고 이중적이 된다.” /스트린드 버그/
**몽상은 창조하는 심리의 작품인 것이다. 이상화된 존재는 이상화하는 존재와 말하기 시작한다.....자신의 이중적 분신에게 말하면서 이중적이 되는 존재에게 이원적인 언어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이원적인 두 배, 즉 ‘사중(四重)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사유와 몽상, 현실의 정신적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의 매개적 유희가 인간 상상력의 그 심리적인 경이로움을 생산하기 위해 증대되고 교차한다. 인간은 상상해야 할 존재이다. 왜냐하면 결국 비현실의 기능은 우주 앞에서처럼 인간 앞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을 창안하는 소설가와 인간적인 것의 매력적인 멋을 계속해서 창안하는 시인들을 읽을 때 우리는 참으로 심리학적 세련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없는 몽상 속에서 감히 말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은 그 모든 자기 초월이다.
“누이야, 나와 함께 기도하러 가자,
식물의 영속성을 되찾기 위해.” -에드몬드 반데르캄멘-
‘식물의 영속성,’ --아니마를 나타내는 진실, 몽상에 어울리는 세계, 영혼의 휴식을 위한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가치의 개입은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철학과 종교는 자웅양성적 특성을 하나의 인류학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수많은 감정적 실패를 통해 이 러시아 철학자(솔로바예프)는 내세의 자웅양성적 삶을 준비하는 순수한 사랑의 그 영웅적 태도를 유지했다.
**두 진정한 연인 사이의 상호적 이상화의 심리학을 위한 명구:
“너의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 너의 사랑을 더 크게 하라.” -바레트 브라우닝-
**작품의 예; 발자크의 에세이 <<세라피타>>
-제1장; 세라피투스 , 제2장; 세라피타, 제3장; 세라피타-세라피투스, (Seraphita –양성적 인간을 이르는 발자크의 소설 및 에세이에서 쓰인 용어)
(--인간의 총체인 완전한 인간은 남성적 요소의 능동적 미덕들로, 그리고 여성적 요소에 의한 보존하는 힘들로 계속적으로 제시되며, 마침내는 그것들의 종합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전적인 결속처럼 이루어진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자웅양성적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고, 분신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세라피투스, 세라피타만이 모든 몽상을 유인하는 이중의 자기(磁氣)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우리는 네 개의 극을 지닌 몽상 앞에 있다. 두 정념을 이상화된 삶으로 상승시키고자 할 때, 아니무스가 아니마로, 아니마가 아니무스로 가는 얼마나 많은 ‘투사’가 이루어지는가!
**이상화하는 몽상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나 보다 잘 몽상하는 자는 아무것도 억압할 게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극단적인 이상화의 몽상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어 있다.그것은 날아오르는 상태에서 ‘정신분석학자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튼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여자를 훌륭하게 이상화하려면 남자가 되어야 하며, 아니마의 의식에서 원기가 풍부한 몽상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테의 철학—베아트리체; 지극히 위대한 이상화들의 종합 —여자, 교회, 신학—그것은 인간적 가치들의 몽상가에게는 현학적인 대문자 아니마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을 통해 빛을 발한다.....<<단테와 철학>>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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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과 아니마를 위한 질문 및 시어 탐사
## 내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총화는 현실 속에서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시어( 詩語)로 표현해보자.
**나는 ----------------------------------------------------!!
**나는 ----------------------------------------------------!!
## 가장 나다운 아니마는 어떤 아니무스를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기억이 있는가? (둘의 결합이 보여준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하여)
## 요즘의 자연 현상에서 느낀 아니마의 진실을 시어로 표현해보자. ‘식물의 영속성’을 대입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