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995년 9월
-수주전쟁-
아침에 일어나 세면장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 찬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나자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일어나며 잠이 확 달아나고 취기도 풀린다.
머리를 감고 천천히 면도하고 비눗물을 듬뿍 풀어 샤워하고 뽀송뽀송하게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니 상쾌한 기분이 든다.
어제저녁 마신 술로 얼굴이 아직도 불콰하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다.
그 술자리에서 경기지방 국토관리청에 박국장에게서 90% 이상은 확답을 받은 상태이어서 이번 일은 틀림없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선다.
속옷을 갈아입고 바지와 Y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선 기철은 기분이 무척 좋다.
넥타이를 매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는 손이 경쾌하게 움직이고 콧노래까지 나온다.
출근 준비를 하고 식탁에 앉자 안내가 북어와 콩나물을 넣고 파가 듬뿍 들어간 기철이 술을 먹고 나면 좋아하는 술국과 함께 아침 식탁을 차려준다.
아내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보내며 식탁에 앉은 기철의 수저를 드는 손이 기분에 맞추어 유영하듯 움직인다.
기철의 들뜬 기분이 아내인 영희에게도 전달된 듯 그녀가 웃으며
“당신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하고 묻는다.
“기분 좋은 일이 있지.”
“무슨 일인데요?”
“그런 일이 있어.”
“내가 알면 안 돼요?”
“천기누설이야. 며칠 있으면 당신도 자연 알게 돼.”
“천기누설씩이나? 어쨌든 당신이 기분 좋아하는 것이 며칠만인지 모르겠네. 이 며칠간 항상 굳은 표정으로 조급해하며 무엇에 쫒기는 듯하고 기분도 별로인 것 같아 나까지 불안하게 하더니.”
“그 일이 곧 마무리될 거야.”
“그래요? 일이 잘되었나 보죠?”
“그래! 아주 잘 됐어.”
“아하!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기분이 좋군요.”
“그래! 아주 기분이 좋아.”
“그 기분 나하고 나누면 안 돼요?”
“천기누설이라니까.”
“피! 천기누설은?”
하면서 영희도 마음이 뜨는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엇에 눌린 사람처럼 어눌한 얼굴을 하던 남편에게 이렇게 얼굴을 펼 수 있는 좋은 일이 생겼다니 영희도 기분이 뜨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끝낸 기철은 웃옷을 찾아 걸치고 출근길에 오른다.
잘 다녀오라는 영희의 인사를 받으며 출근하는 기철의 발걸음이 바람이 일 정도로 가볍다.
자동차 그렌져에 시동을 걸고 거리로 나왔다.
평소와 같이 교통체증으로 막혀 짜증이 나는 도로도 오늘 아침은 C.D를 넣고 음악을 들으며 참을 수 있었고 끼어드는 차에게도 너그러히 양보를 했다.
기분이 좋으니 마음에 여유로움이 생긴다.
이번 일이 생각처럼 마무리되면 회사 내에서 입지는 물론 승진에도 영향이 있으리라. 김상식 전무가 연령 관계로 명예퇴직한 후 아직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은가.
이 일만 잘되면 그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전무가 되어 건설에 관한 전반적인 사업을 총괄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회사의 오너와 가까운 친척이라고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딴죽을 거는 자기와 경쟁 상대자인 최영식 상무를 자기 밑에 두고 부릴 수 있다.
그 건방진 놈을. 그렇게 되면 그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만 해도 유쾌하고 힘이 절로 난다.
이번 일도 처음에는 최영식 상무가 진행하다가 담당인 박국장이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처음 생각했던 것과 같이 잘되지 않는 중에 최상무가 동남아에 시장 개척 문제로 몇 주일 출장을 가게 돼 사장이 기철에게 넘겨주라고 지시를 했다.
물론 최영식 상무가 계속 추진하면 될 수 있다는 가망성이 30%라도 보인다면 아무리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도 최상무가 그 업무를 기철에게 절대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동남아 출장을 기철에게 미루고 자기는 그 일에 매달렸을 것이다.
성사될 가망이 거의 없어 운에 맡기는 수뿐이 없는 상태가 되자 할 수 없이 기철에게 맡긴 것이다.
그만큼 그 일이 어려운 상태에서 기철이 업무를 인계받았다.
그때까지 진행된 내용(내용이라야 몇 번 박국장을 만났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것뿐인)과 함께 인수를 해주며
“박국장과 선후배 사이인 나도 하지 못한 일, 박상무가 할 수 있겠어?”
하고 비릿하게 웃던 최상무의 얼굴이 생각이 난다.
하긴 기철에게 그 일을 넘겨주라고 지시하는 사장도 영식보다 기철의 능력에 신뢰가 가서가 아니고 이번 일에 대하여 전례 없이 담당 국장이 너무 깐깐하게 굴어 일이 잘되지 않는다는 영식의 보고를 여러 차례 받았지만 여태까지 진행 시키던 일, 덩어리가 커서 무척이나 욕심이 나는 그 일을 영식의 출장으로 모두 접어버리고 그냥 운에 맡기고 입찰하기가 섭섭하여(이런 경우 대부분 낙찰이 어렵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안 돼도 할 수 없고 혹시 되면 더없이 좋고 하는 심정으로 기철에게 한번 해보라고 시킨 것이다.
지금까지는 명문대학인 S대학교를 나와 여기저기 건설계통 관계 요로에 선후배가 많은 영식의 실적이 기철보다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일만 잘되면 그 최영식과 경쟁에서의 부진을 한꺼번에 씻고 최영식을 누를 것이고 이번 일은 그 깐깐한 박국장에게 90% 이상 확답을 받았으니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기철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오늘 중역 회의에서 그동안 지지부진하여 영 될 것 같지 않던 일을 기철이 어제 박국장에게 90% 이상 확답을 받았다고 곧 수주 정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사장에게 보고할 때 영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놀라는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제까지 공사비가 크다고 해야 1,000억 원을 넘는 공사가 없었는데 이번에 경기지방 국토관리청에서 발주하는 00에서 00을 잇는 3,500억 원대의 도로건설 공사, 그 공사를 기철로 인해 수주하게 되면 지금까지 여러 면에서 영식에게 밀렸던 실적을 한꺼번에 만회할 뿐만 아니라 앞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후속 공사로 발주되는 5개 공구 중 한두 개는 연고권을 주장하여 수주하게 되면 2,000~4,000억 원 상당의 공사 두어 개를 추가로 수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회사에서 내 입지는--’상상의 나래를 펴는 기철은 즐겁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회사 정문을 들어서는 기철에게 수위 정씨가 경례를 한다.
정씨는 기철의 먼 친척으로 기철이 과장 때 추천해서 회사에 수위로 들어온 후 성실하고 친절하게 근무하고 사람이 붙임성도 좋아 회사가 발전하여 사옥이 커지면서 회사경비가 자체경비에서 전문 경비업체로 넘어가며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퇴직을 했는데도 정씨만 회사의 추천으로 경비업체로 이적하여 15년 넘도록 일을 계속하고 있다.
경례를 받으며 웃는 기철에게
“상무님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하는 정씨에게 기철은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그런 기철을 보며
“저 양반이 이 며칠 새 늘 찌푸리고 긴장된 얼굴이더니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다른 날보다 출근이 빠른데도 웃는 얼굴인 것을 보니.”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사무실로 들어서며 기철이 벌써 출근해 있는 여비서 박양에게 먼저 “안녕!”하고 인사를 한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상무님!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늘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에 있는 비서로서 박양은 평범한 얼굴이나 쾌 재치가 있는 아가씨이다.
그동안 기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조심하던 박양은 오늘 아침 인사를 먼저 하는 기철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붙임성 있게 한마디 한다.
“그래! 나쁘진 않지. 커피 한잔 따뜻하게.”
하고 기철은 방으로 들어간다.
사장에게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며 기철은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으면서도 보고를 임원회의 시간까지 되도록 최대한 늦추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첫째는 자기의 기분을, 이 즐거운 기분을 연장시키고 둘째는 사장에게 궁금증을 더하게 할 뿐만 아니라 보고가 늦어지면 사장이 오늘도 그 일에 대하여는 좋은 소식이 없다고 실망하고 있을 때 좋은 정보를 보고하여 100%의 효과를 보려고 하고 한편으로는 그 보고를 들은 최영식 상무가 다른 임원들 앞에서 놀라는 표정과 회의에 참석한 다른 임원들의 찬사도 받으려는 속셈에서다.
마음 같아서는 출근과 동시에 사장을 찾고 싶었지만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해 보고를 임원회의 시간까지 늦춘 것이다.
임원회의 시간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부러 늦게 회의장에 들어간 기철은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슬쩍 영식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기철과 눈이 마주친 영식이 “박상무! 어서 오시오.”하고 인사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그 인사도 미소도 무척 어색하다.
첫댓글 즐~~~감!
잘 보고 갑니다
무혈님!
구리천리향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
남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