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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뜬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아내는 아직 깊은 꿈나라에 빠져 있다. 내가 하던 일을 대신 하는 아내는 매일처럼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다. 일어나면 깨워달라고 했는데…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를 차마 깨울 수 없어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오늘 나는 서울에서 돌아온 지 보름만에 다시 정기검진을 받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 것이다.
안개가 옅게 깔린 아침,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 점퍼를 입기 잘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도 더 조여 맨다. 거리엔 인적이 드물고, 벚나무가 꽃잎을 떨군 도로 위는 은빛 물결이다. 꽃잎을 떨군 나무는 푸르름이 더욱 짙다.
공항엔 저마다 바쁜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속을 마치고 총총히 비행기에 탑승한다. 고공공포증이 있는 나는 언제나 앞좌석을 요구하지만 이륙할 때는 공포가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제는 고공공포증을 견뎌내는 새로운 방법이 생겼다. 이륙할 때 수술실, 동관, 서관, 응급실 등 아산병원의 여러 곳을 되짚어 생각하고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다보면 공포심이 사라진다. * * 2003년 여름. 그해에는 비가 엄청 많이 내렸다. 앞으로 겪게 될 시련처럼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 그해 여름, 울산의 병원에서 더이상의 차도가 없자 나는 퇴원을 하고 P시에 있는 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남은 건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 친구 내외가 나를 데려다 주기로 한 그 날도 비가 왔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아들을 홀로 두고 떠난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국도로 접어들었을 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일어난 모양이다. “아빠! 아빠 돌아올 때까지 꽃에 물 내가 줄까?” “그래, 니가 물을 줘. 꽃이 죽으면 안돼.” “근데 아빠 언제 올 거야?” “아빠 몸 좋아지면 갈게.”
깊은 침묵 속에 차를 달려 몇 시간 뒤 우리는 요양원에 도착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나와 헤어져 돌아가야만 하는 아내가 내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아내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 있고, 옆에 서 있는 친구도 눈물을 글썽인다. 무슨 말이든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못한 채 차가 멀어진다. 무슨 얄궂은 운명이기에 이렇게 헤어져야 할까. 기가 막혀 멍하니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와 편지를 읽었다.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쓰여 있다.
산에 있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오전에 안 오면 오후에 오고, 오후에 안 오면 오전에 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지가 내렸다.
어느 날 오후,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지금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은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더 큰 성숙을 위한 아픔이라 생각합시다. 내가 이대로 여기서 절망하고 쓰러진다면 그것은 동재와 당신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오. 당신! 이 계절 끝나면 결실의 가을이 온다오. 지금 우리는 풍요를 기다리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역경을 이겨냅시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우리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충만할 것이오.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고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오. 그럼 안녕.
요양원에서도 여전히 차도가 없이 예정된 날이 모두 지났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내일이면 산을 내려가야 한다. 찹찹한 심정으로 불음사에 가니 예불을 드리고 있던 비구니 스님이 나를 한번 보고는 계속 염불을 한다. 법당에 엎드렸다. 서러운 처지에 눈물이 나와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이 법당 마루에 떨어진다. 내 고통도 이렇게 떨어지면 좋겠다. 물로 씻은 듯이, 씻은 듯이 다 나아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에게서 고통을 떼어낼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밤새 열이 나는 것이 복막염의 징조였다.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침상에 눕는 순간 복통이 왔다. 엄청난 고통으로 배가 터질 것만 같아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고 있는데 간호사가 급히 와서 진통제를 두 대나 놓았다. 잠시 후 고통이 가시자 배에 주사기를 꽂고 복수를 빼니 2리터쯤 나왔다.
며칠 후 복수를 검사해야 한다며 의사 선생님이 왔다. 굵은 주사기를 배에 꽂아도 복수가 나오지 않자 여의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바늘을 꽂아 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어 이상하네, 배는 부른데….” 나는 다른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다. 덩치가 큰 의사가 왔지만 역시 안된다.
이번에는 레지던트가 연거푸 두 번이나 시도하더니 “검사를 하지 말자” 며 방을 나간다. 그때까지 옆에 있던 아내는 얼굴을 감싸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안타까운 순간이다. 내 배의 아픔보다는 아내가 더 염려스러웠다.
또 며칠이 흘렀다. 배는 계속 부른데 의사는 퇴원을 하라 한다. 하는 수 없이 먹어도 소변은 잘 나오지 않는데 이뇨제만 잔뜩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퇴원한 그날 저녁부터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손도 마비되어왔다. 통증이 너무 심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말 못할 고통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특히 다리는 마른 명태처럼 오그라들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인근 병원에서 영양제를 한 병 맞았다.
이제는 간이식을 하느냐 안하느냐 양자택일뿐이다. 평소 자신의 간을 떼어주겠다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나 살아야겠다. 서울로 갈란다.” 동생이 병원에 예약을 했다.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지만 갑자기 분주해졌다. 집안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다. 열쇠, 도장, 이메일 주소, 비밀번호 등등. 심지어는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친구들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10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로 구급차를 예약했다. 혹시 동네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비참해질 것 같아 구급차 기사에게 동네에 들어오지 말고 신작로에서 만나자고 부탁해 두었다.
가로수가 내 마음처럼 갈색으로 물들은 2시가 되어 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언제쯤 다시 울산으로 돌아와 서동 땅을 밟을까. 혹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닌지 기약이 없다.
구급차는 잘도 달린다. 트인 길도, 막힌 길도 불도저처럼 마구 거침이 없이 유원지의 청룡열차처럼 달린다. 인생도 구급차마냥 씽씽 달리면 좋겠다.
서울이다.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을 좋아했던 내가 한때는 설레임으로 찾아오곤 하던 서울. 그 설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오늘은 병든 몸이 쓸쓸히 서울에 입성했다. 우산을 들고 거닐던 강변, 그 강변을 만감이 교차하는 가슴으로 바라보며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은 만원이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바삐 다닌다. 내가 누울 침상이 없다. 병원 밖으로 나와 아내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올 때부터 살살 아프던 배가 더 아파서 다시 응급실로 갔다. 일단 X-RAY 사진을 찍고 채혈을 하고 관장을 했다. 자리가 없어 현관 입구에다 대충 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너무 추워 내의를 입고 잠을 청하는데 새벽에 또 배가 아팠다. 한 차례 더 관장을 했더니 기운이 모두 빠지는 것 같다. 목이 마른데 복수가 많이 차서 물을 줄 수 없다며 의사는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다음날 오전 9시, 이승규 박사님을 만났다. 매스컴에서만 보던 박사님은 안경을 낀 자상한 얼굴이다.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고, 염려했던 권위나 위엄은 없다. 그저 삼촌, 아니면 옆집 아저씨 같은 분, 혹은 흰머리가 곱게 난 시골 농부 같은 모습이다.
이 박사님은 친절하게 진료를 마치고는 입원을 하라고 한다. 로비에서 형님 내외와 여동생을 만났다. 간을 기증하기 위해 기증자 검사를 하러 온 것이다. 휠체어를 타야 할 만큼 기운이 하나도 없다. 화장실에 갔는데 일어설 수가 없다. 형님이 나를 안아서 변기에 앉힌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되었나. 언제부터 화장실을 보호자와 함께 들어오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나. 원망도 해본다.
101동에 병실이 정해지고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었다. 내시경검사, CT 촬영, 초음파, 심장검사… 검사 종류도 가지가지다. 며칠 후 기다리던 기증자 검사 결과가 나왔다. “기증자 두 사람 모두 부적합합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우째 이런 일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다니. “다른 기증자는 없습니까?” 잠시 망설이는데 의사가 차트에 무엇인가 적으려 한다. “잠깐만요. 더 알아볼게요” 하고는 울산에 있던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기증자가 맞지 않아. 어쩌면 좋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가 막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 인생 여기서 끝나는구나. ‘그래 끝내자. 확 끝내버리자.’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낼까. 울산에서 끝낼까.’ 여기서 끝내면 비용이 많이 들겠고 울산으로 가면 비용은 적게 들겠지만 이웃 보기가 부끄럽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끝내자. 비용은 식구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지만 아직 어린 자식이 있는데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다시 전화를 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울고 있었다. “당신, 울지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단다.” “이 판국에 구멍은 무슨 놈의 얼어죽을 구멍….”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진정해라. 좀더 알아보자.”
나는 전화를 다시 끊고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친구, 고향 친구, 삼촌, 숙모 등등. 구걸을 했다. “A형 간 기증자를 급히 구합니다.” “우리 남편을 살려주세요.” 여기저기 인터넷에도 올렸지만 회답은 없었다. 병실에서는 다른 환자들이 나를 보고 서로 소곤거린다. 언제가 지방 병원에서 말기 간경화 환자를 보고 내가 소곤거리던 생각이 난다.
“쯧쯔 안됐지. 아들도 우리 애하고 나이가 같네. 뭐 한번 왔다 한번 가는 인생인데 할 수 없지 뭐.”
아! 오늘은 내가 그 소곤거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때 왜 그 사람을 보고 그렇게 동정했던가 후회가 된다. 입장이 바뀌어 내가 그 동정의 대상이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자 집에서는 나 몰래 이식할 간을 구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서울로 오기 전에 일부 가족은 외국으로 나가 보자고 했는데 외국으로 나간다는 얘기는 장기 매매를 의미한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몰래 알아본 모양이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안 사실인데 K시에 있는 브로커와 연락이 되어서 얘기를 해본 결과 검사 비용을 제외하고도 무려 7천만원이란다. 도저히 형편상 어찌할 수 없었던 아내는 없었던 일로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그 브로커는 아산병원에서는 기증자 검증이 까다로우니 다른 병원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니 세상은 요지경이다.
아내가 왔다. 오후 늦게 도착한 아내는 꺼져 가는 촛불처럼 병상에 누워 있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흘렸다. 시커멓고 깡마른 얼굴, 노오란 눈알, 올챙이 같은 배, 전형적인 간질환 환자 모습이다. 아내는 밥도 먹지 않고 밤새 울었다. 하기사 무슨 놈의 밥이 넘어가겠는가. 옆 침대의 할머니가 “새댁, 고만 울어. 수술하면 되잖아” 하고 말한다.
우리는 훨체어를 타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푸른 제복에 푸른 모자를 쓴 자랑스런 용사들이 지나간다. 모두 건장한 모습이다. 부럽다. 나는 다가가서 “어떠세요” 하고 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꺼떡없어요. 걱정마세요 한숨 자고 나면 끝나 있어요” 한다. 나도 어서 푸른 옷을 입고 다닐 날이 와야 할 텐데… 저 사람들처럼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웃어야 할 텐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몇 번이나 복수를 뽑았다. 마지막에 시뻘건 피가 나왔다. 갈 때까지 간 모양이다. 자꾸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가끔씩 뉴스에서 자살 소식을 보도한다. 그때마다 “X새끼 그 목숨 나주고 가지. 누구는 살라고 이렇게 애태우는데 지는 그것을 강물에 던져, 나쁜 놈” 하고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지꺼라고 함부로 포기해? 간이나 떼어주고 가지. 지옥에나 떨어져라.” 악담이 나온다. “나는 꼭 살끼다. 두고 봐라.” 울산대에서 나를 담당했던 박 교수님이 작년 미국으로 떠나셨다. “선생님, 언제 돌아오세요?” “2년쯤 후에요.” “그럼 2년 뒤에 뵙겠습니다.”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죠.”
선생님은 나에게 별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 1급 장애자 판정을 내리셨나. 어떤 환자는 내가 장애1급을 받은 사실에 깜짝 놀란다.
“어! 1급은 아무나 안 주는데.” 그 환자는 나에게 효과가 좋다고 굼뱅이 가루를 먹어 보라고 권한다. 그렇게 효과가 좋은데 왜 입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도 할 것 다해 보았어요. 버섯가루, 웅담, 헛개나무, 순무즙. 용하다는 철학관에 점쟁이, 무당, 푸닥거리. 지금 생각하니 헛고생 많이 했지요. 그리고요 기 치료 하는 데를 갔는데, 새끼들 비싼 건강보조식품만 선전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오래오래 살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래, 오기로 오래 살아야 한다. 고맙게도 누나가 기증자 검사를 위해 올라왔다. ‘제발 좀 맞아라. 이번에는 꼭 좀 맞아다오.’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결과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누나의 간이 크기가 작아서 안된단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자꾸 날짜만 지난다. 의사는 6개월 남았다고 하는데 이러다가 수술도 하기 전에 일나는 건 아닐까!
다시 의사가 왔다. 수술은 10월 31일이고 기증자는 여동생과 누나를 하기로 결정했단다. “왜 의논도 없이 두 사람을 합니까” 하고 묻자 “우리는 잘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멋진 말이었다. 그럼 잘 되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김경호 선생님은 자상하게 “우리를 한 번 믿어 보세요” 한다. 믿어야지.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새벽 6시. 동생이 먼저 내려가고 한 시간 후 내 차례다. 도우미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양종현 씨, 이제 갑시다.” 나는 병실에 있던 다른 분께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당당하게 소리질렀다. 모두들 잘될 거라며 걱정을 말라고 한다.
10층 병실에서 3층 수술실까지 가는 과정이 멀기만 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처럼 천장에 형광등이 빠르게 지나간다. 옆에 아내가 울면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동재 아빠, 제발 용기를 내. 동재를 봐서라도 꼭 건강하게 다시 나와.” 난 애써 눈물을 감추고 “걱정 마라. 꼭 살아서 돌아올게” 하고 아내를 위로했다. 수술실 자동문이 열리고 서둘러 들어가서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사이 간간이 문이 열린다. 문 밖엔 형님 내외가 손을 흔들고 아내는 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아내는 눈물이 많다. 아니, 눈물이 없는 사람이라도 울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나!
며칠 전에 보았던 장면이 생각난다. 한 여자가 울고 있다. 1층 접수대 앞에서. 옆에 남자는 말이 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본다.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저 여인의 눈물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오늘 아내가 수술실 앞에서 울고 있다. 병든 남편을 수술장에 보내고.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바라면서 하염없는 눈물만 흘린다. 상의가 벗겨지고 두 손이 묶인다. 이마 위엔 이상하게 생긴 마스크가 나를 내려본다. 눈치만 살피더니 불쑥 내려와 얼굴을 덮친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밖에는 애타는 심정이 자리를 지킨다. 속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들어간 가슴 가슴들이 하루 종일 지새운다. 밤새도록 지새고 새벽까지 꼬박 지샌다. 마침내 타고 타서 재가 되었을 때 수술이 끝났다.
의사가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뜬다. “오늘은 11월 1일,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김연대 선생님이 나를 일으킨다. 창 밖엔 가족이 모두 모여 손을 흔든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살았다. 다시 태어났다.” 순간 여동생이 떠올라 가족에게 동생의 상태를 물어보니 괜찮단다. 누나는 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동생의 간이 크고 건강하여 혼자 수술을 했다 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또 있을까.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이튿날, 물을 조금씩 마시고 미음이 나왔다. 회복이 빠르게 진행된다고 이따금씩 의사가 말한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폐가 나빠지기 시작하고 피 가래가 나왔다. 의료진이 바쁘게 오고가지만 어느 정도 심각한 줄 잘 몰랐다. 의사는 “목에 튜브를 꼽을래요, 아니면 잠을 잘래요?” 하고 묻는다. 생각할 것도 없이 잠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악몽의 시작임을 몰랐다.
끝없는 잠을 잤다. 잠깐씩 의식이 돌다가도 또 잠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잠자면서 노래 소리를 듣는다. 팝송도 듣고 가요도 듣고. 그러면서 가슴이 너무도 답답하다. 마치 두꺼운 담요를 얼굴에 덮은 것만 같다. ‘누가 이 담요 좀 벗겨주오.’ 외쳤지만 입이 벙긋도 하지 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의사는 “포타쑴 100으로 해”라고 말한다. 포타쑴이 뭘까. 수면제일까. 내가 이렇게 맥을 못 추고 잠 속으로만 빠져드는 것 보니 아마도 수면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붕붕 날아다닌다. 공중으로 치솟기도 하고 한없이 추락하기도 한다. 마약이 이렇게 멍한데 맨 정신에 한 대 맞으면 정말 뽕가겠구나. 꿈도 꾼다. 꿈 속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나를 괴롭힌다. 이 사람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싸우고 싸웠다. 수술한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제발 나를 깨워주기를 바랬지만 포타쑴 100은 쉴 사이 없이 투여된다. ‘내 일어나면 너그들 가만 안둘끼다’ 속으로 다짐한다. ‘너그들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두 복수 할끼다.’
11월의 어느 날, 의사는 가족을 불러 “마음에 준비를 하세요” 하고 선고를 내렸다. 날벼락이 떨어졌다. 아내는 아침 첫 비행기로 왔다. 그녀는 중환자실 입구에서 울기만 했다. 우는 것 외에는 다른 무슨 방도가 있었을까.
“제발 살아만다오. 목숨만 살아다오.” 아내의 처절한 절규가 귀가에 맴돈다. 나보다 하루 늦게 수술한 환자의 보호자가 아내를 위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환자는 얼마 후 나보다 먼저 유명을 달리 했다.
가족의 피맺힌 바람으로 고비를 넘기고 차도가 있자 나는 드디어 무균실로 이송되었지만 또다시 무균실에서 수술실로 옮겨져 개복 수술을 했다. 얼마 후 또 수술을 했다. 불과 보름 사이에 배가 3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나는 몰랐다. 정신이 들었을 때 왜 내 체중이 44kg밖에 안되는 줄. 왜 내가 손가락 하나도 까닥 못하는 약골이 되었는지. 그 때는 정말 몰랐다. 무균실에서 목에 튜브를 넣었다. 몸서리치도록 괴롭고 고통스럽다. 펌프로 가래를 뽑을 때마다 지옥을 오락가락한다. ‘그래… 너그들 맘대로 해라’ 나중엔 체념했다. 차라리 단념하는 것이 편하다. 그렇게 많은 날이 지났다.
한 번씩 눈을 뜨면 푸른 우주복을 입고 서 있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어 본다. 그러다가 또 정신을 잃는다. 그녀는 애원한다. “제발 좀 깨어나라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바람이다. 이따금 간호사도 눈을 벌리고 전등을 비추면서 나를 깨운다.
‘이 문둥아, 재울 때는 언제고 이제 깨운다고 야단이야. 내가 자고 싶어서 자나. 몸이 말을 안듣는데….’
옆으로 눈을 돌리면 주렁주렁 10개가 넘는 수액 병이 매달려 있다. 옆구리엔 수류탄이 7개가 붙어 있다. 관급식 튜브로 뉴케어가 공급된다. 코에는 산소튜브, 콧구멍에는 관이 꽂혀 있다. 한 번씩 혈관조영실로 가서 담즙 주머니를 달았다. 3번 가서 5개를 달았다. 최고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이 단 사람도 드물다고 한다.
나는 참 별난 놈이다. 울산에서도 의사가 나보고 500명 중의 한 사람이라 했다. 쉽게 말하면 특이체질, 좀 심하게 말하면 더러운 체질이다.
이게 정녕 사는 것일까. / 산다고 해야 죽는 것보다 못한 현실 / 어떻게 살아가나 / 이 암울한 날들 / 희망도 없고 / 절망도 없다. 모든 것이 진공 속에 담겨진 현실 / 어떻게 살아가나 / 오늘이 다 가는데 / 잿빛 하늘을 보며 /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가나
12월 어느 날, 아들이 왔다. 막 점심을 먹으려는데 푸른 제복을 입은 아들 녀석이 병실로 들어왔다. 아주 어릴 때, 첫 돌이 겨우 지났을 즈음 아토피가 심한 녀석을 안고 온천으로 목욕을 갔던 때가 생각난다. 그 꼬맹이 아들이 아비를 보려왔다. 한때는 녀석이 크면 간 이식수술을 아들에게서 받으려 했는데 10년은 커녕 1년도 못되어서 내가 쓰러졌다.
서둘러 밥상을 치우고 아들을 바라본다. 마스크에 푸른 베레모를 쓰고 어색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그새 너무나 변해버린 내 모습에 녀석이 놀라는 것 같다. 나는 손짓을 하여 가까이 오라고 했다. 껴안고 싶지만 참고 장갑 낀 손만 어루만졌다. 몇 달 만인가. 부자간의 상봉. 녀석은 말이 없다. 겨우 밥 먹었냐고 묻자 아직 식전이란다. 그럼 할머니하고 밖으로 나가서 밥을 먹으라 했다.
잠시 후, 어머니가 혼자 병실로 들어왔다. 녀석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단다. “철없는 놈, 아비 보러 왔으면 아비를 봐야지 무슨 게임이야.”
녀석은 몇 해 전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액을 매다는 스탠드를 자기가 밀겠다고 했었다. 녀석에게는 아픈 아비보다도 스탠드를 미는 일이 더 재미있는 일이었나 보다. 그리고 서랍을 뒤져서 과자를 찾아 먹는 것이 신나는 일이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무엇을 알까마는 어쨌든 만나니까 반갑기만 하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후부터 육체의 고통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고열, 구토, 손발 저림, 팔다리 마비, 때로는 두통, 자고 나면 새로운 고통, 고통, 고통이 산 너머 산이고 물 건너 물이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리고 한기도 느껴진다. 끝없는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몸서리가 친다. 치가 떨린다. 면역 억제제, 정말 지독한 놈이다.
새벽마다 피를 한 통이나 뽑는다. 어떤 날은 튜브로 피를 쏟았다. 그런 날은 수혈을 한다. 빨간 피가 관을 따라 몸속으로 들어올 때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수혈을 많이 하면 성격도 변한다는데 걱정이 되었다.
거동이 조금씩 나아져 처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떨려서 겨우 부축을 받아 복도로 나오니 낯익은 얼굴들이 반긴다. 어디 꿈속에서 본 것 같은 김건국 선생님이 책상에 앉아 나를 맞는다. “아… 나를 침대에 눕혀 무지하게 괴롭히던 사람….” “괴롭히다니, 사람 만들어 놓으니까….” 선생님은 감동의 웃음을 짓는다. ‘맞아! 죽어가던 사람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 때문에 김 선생님이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지만 의사의 보람은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구하는 직업, 정말 훌륭한 직업이고 고귀한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제 주치의가 중환자실에서 나를 담당했던 김연대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다시 만나니까 반가웠지만 그때는 무척 무서웠다. 내가 조금만 이상해도 호통을 쳤었다. 중환자실은 무서운 곳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김 선생님은 호랑이 같았다.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현실 앞에서 냉정하고 엄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 중환자실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후, 1인실로 옮겨 갔다. 병세가 조금 나아진 사람은 1인실로 보내진다. 거동이 훨씬 나아지고 식욕이 당긴다. 그러자 그동안 못한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떠오른다. 집 생각도 나고 병원비도 걱정이 된다. 사치스런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만큼 좋아졌구나, 별 걱정을 다하고’ 하는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가 오는 어느 날 나는 창가에 섰다. / 창밖엔 겨울을 재촉하는 /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 나는 모두가 잠들은 병실에서 홀로 / 잠 못 이루고 창가를 서성입니다. / 문득, / 오늘 낮에 전화를 했던 아들 생각에 / 목이 메여옵니다. /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 여느 때 같으면 곁에서 잠을 자던 아들, / 때로는 먼저 잠들은 아들을 보며, / 곱게 곱게 자라주기를 바라던 마음. / 오늘밤 / 그 아들이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
집 생각이 간절하고 가족이 너무 보고 싶다. 12월 25일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기념일을 같이 맞으려고 아내와 아들이 왔다. 쵸코파이에 촛불을 붙이고 조촐한 파티를 했다. 13회 기념일을 병실에서 보내다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내년에는 근사한 데 가서 멋있게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새해가 밝아오고 설날이 지났다. 아직 퇴원은 기약이 없다. 같이 있던 제복의 사람들은 모두 퇴원을 한다. 어떤 날은 외래에서 그분들을 만난다. “왜 아직 안 나가세요?” 그들은 무심코 묻는 것이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다. “곧 나가겠지요. 따뜻한 봄날이 오면은….” ‘집에 가면 할 일도 많아요.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아요. 죽령고개 주막집도 가야 하고, 강원도 인제에 가서 빙어도 먹어야 하고, 군산에 조개구이, 목포에 세발낙지, 오는 길에 마산에 들러 아구탕도 맛보아야 하고, 부산에 가서는 꼼장어구이도 먹어야 하고요. 봄에는 하동에 가서 벚꽃도 보아야 하고, 여름에는 상주 해수욕장에 가야 하고, 가을엔 불타는 내장산도 가야 하고, 겨울이 오면은 겨울바다도 갈 거예요….’
봄이 멀지 않은 2월, 마침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원 처방이 떨어졌다. 퇴원 전날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4달 전 구급차를 타고 올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사이에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인생은 일순간 같은데 그 일순간보다 더 짧은 126일이 몇 년이나 지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참 힘든 시간이었지만 내 주위의 고마운 분들이 나의 고통을 자신의 것인 양 함께 해주었다. 벼랑 끝에 선 목숨을 구해준 이승규 박사님, 김경호 선생님, 김연대 선생님, 김건국 선생님, 최상대 선생님 등 병원 관계자와 간호사님들. 나를 위해 자신의 장기를 떼어준 여동생과, 아버님의 유산인 집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해준 어머님, 그리고 형제자매들… 무엇보다도 인고의 세월을 참고 꿋꿋하게 살아준 아내와 힘이 되어주었던 아들녀석.
나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얼마나 비싼 인생인가! 억대 진료비가 들었고 앞으로도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나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어떻게 지켜온 목숨인가. 얼마나 울었던 날들인가. 어떻게 견디어온 고통인가. 정말 오래 살아야 한다. 내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보살펴준 분들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김연대 선생님은 오히려 잘 참고 살아준 내가 고맙다고 한다. “정말 오래 계신 분, 고생 참 많이 하신 분. 이 세상에는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우리가 잘 알아요. 아! 양종현 씨 대단해요. 잘 참았어요.”
지옥 같던 날들.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내가 드디어 퇴원을 한다. 126일간의 처절했던 투쟁이 끝났다.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났던 서동 땅을 밟으며 다시 새로 태어난 인생이 도착한다. 집에는 아내가 청소를 마치고 나를 맞이한다. 모처럼 생기를 맞은 아내가 푸짐한 저녁을 준비한다. 축하 전화가 오고, 저녁 찬거리를 챙겨다 준 이웃들이 고맙다.
며칠 후, 못 치는 기타를 들었다. 끊어진 줄을 바꿔 매고 기타를 치려니까 막상 손이 말을 듣지 않고, 너무 오랜만이라 코드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뛰엄뛰엄 기타줄을 튕겨 보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노래 소리도 나오지 않아 겨우 흥얼거렸다. 내가 즐겨 치는 노래는 김수희의 “너무합니다”인데, 노래를 부르는 도중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작년 여름, 요양을 가기로 했을 때 마지막 소절을 부르는데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
노랫말이 아내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당신아! / 조금만 기다려. / 꼭 살아서 돌아올게. / 그래, 집안일은 생각도 하지마.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1여 년가 지난 오늘, 다시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다 나왔다. 주방에 있던 아내가 “당신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나와. 다시 당신 기타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하며 감격해 했다.
남편 목숨만이라도 부지해주기를 바랬던 아내. 제발 살아만 주기를 바랬던 아내. 작년 한해, 정말로 나는 아내에게 너무한 사람이었다. 작년 나는 아내를 많이도 울렸다.
* *
비행기가 요동쳐서 눈을 뜨니 서울 상공이다. 잠시 후엔 착륙한다. 공항 청사를 나와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강변을 달린다. 오늘따라 강물은 더 푸른 것 같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맑기만 하다. 내 남은 인생도 이처럼 맑고 푸르면 좋겠다. 앞으로 내 생일은 10월 31일이다. 이제 겨우 한 살이니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많다. 멀리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곳 아산병원이 보인다.
아산병원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시설, 최고의 친절서비스,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한다. 놀라울 정도의 큰 규모. 2,000개가 넘는 병상.
‘우와! 이게 병원이야, 대기업이야? 어쩌면 지방하고 이렇게 차이가 날까.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큰 병원도 대단한데, 아산병원에 비하니 아무것도 아닐세. 서울사람들 너무하는구만….’
나는 아산병원과 고귀한 인연을 맺었고 아산병원에서 목숨을 구했다. 앞으로 평생을 아산병원과 인연을 맺고 살아야 하는데 섭섭했던 일이 가끔 생각난다. 서울의 모 병원에서는 장기이식 환자에게 특별대우를 한다는데, 그런 특별대우는 못 받더라도 푸대접은 있을 수 없다. 환자와 병원은 어느 한쪽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관계이다. 환자의 애타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주면 어떨까?
나는 수술을 하여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기증자를 못 구해 애태우던 광주의 환자, 마지막으로 서울에 가서 진료를 받고 싶다고 새벽에 구급차를 타고 떠나던 말기 간경화 환자. 그는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울산대 병원 7층에서 함께 지냈던 최 사장, 이 사장. 꼭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했건만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너무 아까운 사람들. 살아서 다시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