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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애찬 문제
고린도전서 11장 / 이동원 목사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쳐 있는 또 하나의 문제, 예배 질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의 원리와 정신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문화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스타일의 변화를 둘러싸고 상당한 홍역을 치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주의적 문화가 깊은 교회 일수록 예배의 전통을 붙잡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런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가스펠송 그 자체를 완전히 거절하고 또 부르면 안 된다는 공식적인 명령까지 내린 교회가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예배찬송 가사 중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이 들어 있으며 주님을 높이는 것은 찬송가도 가스펠송 이었던 것이 많습니다. 잘 선정하여 남녀노소 온 교우들이 같이 부른다면 무리가 없으리라 봅니다.
이 수건 사건에 또 하나의 교리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예배에 있어서 순종적 자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순종적자세로,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낸다, 주님만 드러내겠다, 나 자신을 감추겠다, 그것이 수건을 통한 신앙 고백입니다.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 라는 것은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순종이 결단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결론이고, 예배의 결과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갖고, 순종의 결단을 갖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가셔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건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건을 쓰고도 순종을 안 하면 소용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순종 그 자체의 결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성들이 자유화 되고 해방 되면서 너무 극단적인 경향으로 나가서 그와 같은 절제의 선을 넘어 갔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예배의 자리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곳이 여성이고, 또 방언 문제가 나오고, 방언문제로 그냥 통역을 안 세우고 방언을 하다보니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은사의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요 한 것이다. 그러나 질서는 존중되어야 된다. 자기 과시를 하는 이것이 바울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재미있는 표현 하나가 나와요. 난해한 표현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표현이기도 한데, 9-10절 말씀 읽겠습니다. ➤“9.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나니 10. 이런 까닭에 여자는 천사들로 인하여 마땅히 자기 머리 위에 권능을 두어야 하느니라.” 권세 아래 있는 표시, 내가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 하겠습니다. 순종의 표시로 머리에다 표시를 두어라, 수건을 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누구 때문에? 천사들을 인하여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경학자 들이 여러 가지 토론을 많이 했는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 말고도 예배의 자리에 참관자가 있습니다. 천사들이에요. 천사들이 오늘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의 참관자가 있어요. 예배를 잘 드리나 못 드리나 졸고 있지나 않는지, 정말 진지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하는지, 아닌지, 제일 중요한 것은 정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고백하느냐? 저들이, 그것을 천사 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사실 이라면 여러분 자! 누가 내 예배하는 태도를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 이걸 정말 내가 느낀다면, 우리들의 태도와 자세가 안 달라질까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숨기가 좋아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러나 사람들이 적을수록 드러나요. 제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째려보면서 예배를 한다고 한번 가정을 해봐요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면 태도가 좀 달라 질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신다, 아니 하나님이 당신의 천사 들을 보내어 예배하는 내 태도를 점검 하고 계신다.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순종적 결단, 순종적 자세, 이것이 중요 하다는 말이요.
꼭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 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순종의 결단을 드리느냐? 라는 것을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서 첵크 하고 있다. 저는 수건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상징이 우리의 고백을 도와 줄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쓰고 그 쓰는 것을 통해서 아! 나는 순종해야 된다!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늘 깨우치고 있다면, 쓰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뭐 수건 쓰는 사람들을 보고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초대교회, 본래 성찬만 있었든 것이 아니라 애찬(愛餐)도 있었습니다.
애찬과 주의 만찬, 성찬에서 나중에 보편화된 표현이고, 사실은 주의 만찬, 애찬과 주의 만찬은 어떻게 다른가? 애찬은 러브피스트, 아가페 밀이라고 불리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거요.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쯤 되어서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을 마지막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되어 있었는데 역사가 흘러가면서 애찬과 성찬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두 가지 문제를 들면? 교회당 와서 식사를 하는 거요. 교회 모임에 와서 사실 교인들의 숫자가 적어서 모일 때 마다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하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목적에서, 그런데 식사할 때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생기는 문제입니다. 식당에 가면 오늘오후에도 확인 해볼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좋아 하는 사람들만 끼리끼리 모여서 밤낮 모여요. 그러니까 파당과 심지어는 분쟁이 생겼어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교회당에서 먹을 것을 생각해서 집에서는 안 먹고 교회 공동체에 온 기회를 통해서 왕창 먹어 버려요. 그러니까 모자라요. 그래서 먼저 많이 먹는 사람 때문에 못 먹는 사람이 생겨요.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당에서도 추수 감사절 그때 떡 나눠 주면 꼭 문제가 생겨요. 자기 것만 가지고 가면 되는데, 열 개 이십 개씩 챙겨 가는 사람들이 있어 나중에는 모자라요. 왜 그렇게 모자라게 떡을 만들었느냐? 그래서 교회가 그걸 생각해서 미리 많이 만들어놓으면 또 남아요. 남으면 교회당이 낭비하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하여튼 이런 인생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목회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그래서 모자라면 왜 모자라게 만들었느냐? 그리고 또 남으면 교회가 남도록 낭비한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비위를 맞추어야 됩니까? 우리가 모자라야 돼요? 남아야 돼요? 이래서 항상 문제에요. 뭐 고린도교회도 해서 별수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에요. 18-19절 읽겠습니다. ➤“18. 무엇보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부분적으로 그것을 믿노니 19. 인정받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도 있어야 하느니라.” 분쟁과 파당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물론 좋은 사람하고 식사 하면 편해요. 소화도 잘되고, 그런데 좀 서먹서먹한 사람하고도 자꾸 교제를 하고 그분들 하고도 앉아서 차도 마시고 그런 훈련을 해야 돼요. 그것이 성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밤낮 끼리끼리 돌아다니는 인간은 성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광고 하고 다니는 거요. 좀 낯선 사람, 그런 우리 교우들을 돌아보고 자기가 누구라고 소개하고, 같이 식사해요! 그리고 식사할 줄 알고 이것이 참 중요한 거요.
20-22절을 보시면 문제를 알 수 있어요. ➤“20. 그러므로 너희가 한 곳에 함께 모일 때에 이것이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니 21. 이는 먹을 때에 저마다 자기 만찬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먹으므로 한 사람은 시장하고 다른 사람은 취해 있기 때문이라. 22.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내가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랴?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또 교회도 보면 교회도 또 쎈 사람들이 있어요. 쎈 사람들이 떡을 많이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요.
그래서 교회서 정말 쎈 사람 성숙한 사람들은 누구냐? 자기가 안 먹고 남을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들이요. 그때나 지금이나 타락한 인간성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꼭 마찬가지요. 그래서 33절에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33.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먹으려고 함께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몫만 딱 먹고 더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안 먹더라도 남을 챙겨주고 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34절 읽겠습니다.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것은 너희가 함께 모여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은 일들은 내가 가서 질서 있게 세우리라.” 바울이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나는 이해가 잘돼요 날이 갈수록 목회하면서 더 이해가 잘돼요. 교인들이 예의를 잘 지킬 줄 알아야 해요.
매너를 잘 지켜야 해요. 주차장에선 밤낮 싸워요. 심지어 남의 차 부딪쳐 놓고 메모지 하나 남기지 않고서 그냥 가요. 나는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하고서도 왜 늦게 나왔느냐고 소리치더래요. 예의가 없어요. 매너가 없어요. 교회당 나오면서도 아직도 성숙 되지 못했어요. 남을 양보하고 남을 세워주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예배 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이 이기적인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왜 성찬문제와 관련 시켜서 나오느냐?
성찬을 통해서 배워야 할 진정한 정신은 무엇이냐, 성찬의 정신 3가지, 시제를 갖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바라보아야 할 3가지 사건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새공동체 반에서 공부 했지요. 첫째는 과거시제,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성찬의 첫 번째 정신이며,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 너희가 빵을 땔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하라, 잔을 받을 때 마다 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같은 빵, 같은 잔,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에 참여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에 소속된 지체가 되었다. 하나의 공동체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인 공동체에 속한, 한 가족 한 지체이다. 우리 중에 무슨 파가 있겠어요. 목사님은 아무개 하고 더 친한 것 같다.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똑 같아요. 나는 정말 다 같이 바라보려고 애를 씁니다.
다 같은 교제 다 같은 지체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것을 성찬식을 할 때 마다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몸 그리스도의 한 피, 한 몸,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와 자매들 이다. 그것을 계속 확인해야 돼요. 그리고 둘째 시제는 현제 시제 인데,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마다 현제 자기의 심령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28절 읽겠습니다. ➤“28.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우리가 만찬을 받기 전에 기도합니다. 조용히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주일날마다 안식 후 첫날마다 모일 때 마다 빵을 떼었어요. 우리 교회도 성찬식을 더 자주해야 되겠다고 늘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할 때 마다 무얼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반성을 합니다.
“내가 이 빵을 먹기에 합당한가? 잔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는가? 내 심령의 상태? 특별히 나에게 이기심이 없는지? 나에게 파당심이 없는지?” 이런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분열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이런 것 들을 생각하고 늘 주 앞에 자복하고 자성하고 늘 주 앞에 깨끗함을 얻을 때, 거기서 성숙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 미래 시제, 중요한 미래시제가 무어냐 하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26절 읽겠습니다. ➤“26.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언제 만찬이 끝나는 것입니까? 주의 만찬, 성찬을 언제 안하게 됩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안하게 되는 거요. 그때는 직접 예수님하고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식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까지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늘 이 성찬식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 주님이, 또 다시 오실 주님을 선포하는 공동체, 전도하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교회로 합당한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교인들이 성숙해야 합니다.
저는 전도의 최대의 방해는 누구냐? 전도의 최대의 장해물은 교인들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 해봐요. 왜 안 믿나? 교인들 꼴 보기 싫어서 안 믿는다고 해요. 교인들의 이기적인 자세,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손해 볼 줄 모르고, 양보 할 줄 모르고, 그런 교인들을 보고서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선교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만찬의 자리에서 참여 할 때마다 거기서 회개와 성숙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렇게 회개 하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만찬에 참여하고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는 참석하면서 변화는 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특단의 조치를 행하십니다.
경고가 있습니다.
28-30절 읽겠습니다. ➤“28.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29.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30.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신다. 형식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한다. 형식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한다. 성찬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 성찬을 더럽힌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이러므로, 너희들 중에 약한 자가 많고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많다. 이건 단계 적이에요 하나님의 징계의 단계, 처음에는 약하게 만드셔요. 우리가 약해지면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그런데 약해졌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약한 상태가 아니라, 너 누워서 생각해! 그리고 병들어 침대 위에 눕게 합니다.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침대에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 그냥 자, 영원히 자, 그리고 생명을 가지고 가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지고 가시는 사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너무 너무 사랑해서 일찍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일찍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또 한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 부담이 되어가지고, 너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빛이 안 된다, 소금이 안 된다, 그만 살아라, 그리고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계속 주 앞에 영광이 못되면 나중에 어떻게 될 수가 있다? 옆 사람 보고 얘기해 보세요. 그냥 가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늘 예배하면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변화 되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예배만 드렸다 해서 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고, 주님께 순종하고, 더 성숙하고, 더 양보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예배 잘 드리고 와서 주차장에 와서 주차 잘했느냐 못했느냐 서로 싸우고 말입니다. 이게 뭐 예배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예배 하면서 변화되고, 예배 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고, 예배 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때, 그때 주님은 우리 몸 된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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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긍정적인 사람의 얼굴에서는 항상 미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