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에는 볼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부석사의 창건 과정과 선묘에 얽힌 전설 외에 무량수전, 안양문(安養門)이 있는데 이 이름도 그냥 지은 것이 아닙니다. 무량수는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국토,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합니다. ‘안양’이란 말 역시 극락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경기도에 있는 안양시도 같은 한자인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경기도 삼성산에 고려 개국을 도운 스님에게 절을 지어주며 바친 안양사라는 이름이 그대로 시(市)의 명칭이 됐다고 합니다.
-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언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낸다.
안양루 앞에서 무량수전까지 33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극락으로 가는 33천(天)입니다. 안양루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장관인데 앞서 다룬 김삿갓도 그냥 지나치지않고 “백발이 된 지금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더 나아가 의상과 관련된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살펴봅니다. 이 열개의 절이 어딘가를 두고 기록이 갈립니다. ‘삼국유사’에는 태백산 부석사-원주 비마라사-가야산 해인사-비슬산 옥천사-금정산 범어사-지리산 화엄사 6곳만 등장합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부석사-화엄사-해인사-범어사-옥천사 외에 미리사-보원사-갑사-국신사-청담사가 나옵니다. 미리사는 중악공산(中岳公山),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에 있는 미리사를 말하고 있습니다.보원사는 웅주(熊州) 가야협, 즉 지금의 충남 서산 운산면에 있고, 계룡산 갑사, 전주 무산의 국신사는 지금도 존재해 있습니다. 문제는 ‘한주 빈아산 청담사’인데 이 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의상이 창건하거나 간여한 화엄십찰은 다 전설이 있습니다. 의상이 맨먼저 세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의상이 유학 길에 오르기전 동해(東海) 인근 굴에 관음보살이 산다는 말을 듣고 7일간 기도하자 천룡팔부(天龍八部)가 등장했습니다.
-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하늘에도 땅에도 연꽃이 활작 피었다.
천룡팔부는 중국인 김용의 소설을 말하는게 아니고 불법을 지키는 신장(神將)을 뜻합니다.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등 여덟 신(神)이 그것입니다.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아 의상이 처음 만난 분은 백의관음인데 다시 의상이 7일을 더 기도하자 마침내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에게 대나무 두개가 솟아나는 자리에 절을 지으라는 말을 남기지요. 그곳이 바로 낙산사라니 예사 땅이 아니겠습니다.실제로 낙산사는 강화도 보문사-남해 보리암과 함께 불교에서 으뜸으로 꼽는 기도처라고 합니다. 저는 보문사와 보리암 역시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 유서깊은 낙산사가 몇 년 전 대화재로 전소(全燒)된 것이 너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서기 544년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지었다고 하지요. 얼마전 인도 수상이 왔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2000년전 인도공주와 가야의 왕이 결혼했다”는 말이 있는데 인도와의 인연도 꽤나 깊습니다.
- 화엄사 출입구 기와에 풀들이 자라고있다. 화엄종의 대본산답게 역사의 이끼가 곳곳에 피어나고있다.
이 절은 이후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면서 이름이 높아지고 670년 의상이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사방의 벽에 화염경을 새기며 화엄종의 중심 사찰이 됩니다. 나중에는 도선국사까지 간여했다니 대단한 절이 아닐 수 없지요. 이 장륙전이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으로 이름이 바뀐데도 설화가 있습니다. 조선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인조가 복원했고 숙종이 중수(重修)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불사(佛事)의 중책을 맡은 사람은 계파스님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걱정이 돼 밤새 대웅전에서 밤샘기도를 드리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무 걱정하지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대신 맨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말했습니다. 스님이 한참 길을 가는데 웬 노파가 걸어오고 있었다지요.스님은 난처했지만 꿈에 등장한 노인의 말을 어길 수 없어 시주를 권했는데 노파는 한참을 듣더니 이런 말을 남기고 길가의 늪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내가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겠으니 문수대성은 가피(加被·도움)를 내리소서.” 이후 계파스님이 몇 년동안 불사를 이루지 못하고 전국을 걸식하던 끝에 한양에 도착했는데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 나온 어린 공주를 만났습니다. 신기하게도 공주는 스님을 보고 반가워 매달렸는데 한쪽 손이 불구였습니다. 펴지지 않는 손을 계파스님이 만지자 쫙 펴졌는데 손바닥에 ‘장륙전’이라는 세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지요.
- 화엄사 각황전은 의상이 지은 장륙전을 대체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에 감동받은 숙종이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는 장륙전을 중수할 비용을 댔습니다. 전각이 완성된 후 장륙전의 이름이 바뀌지요. ‘각황’ 즉 임금이 깨달아 건립했다는 각황전으로 개명(改名)한 것입니다. 내친 김에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의 창건설화도 살펴봅니다. 청량사는 해발 870m인 청량산의 거의 정상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올라가기가 꽤나 힘겹습니다.
- 조선 숙종 때 중창된 각황전은 '임금이 깨달았다'는 뜻이다.
청량사는 특이하게도 663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說)이 엇갈리는 사찰입니다. 하지만 설화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의상보다는 원효가 건설의 주역이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는데 여기엔 뿔이 세개 달린 소(牛)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절을 짓고 있을 때 부근 마을에 뿔이 셋달린 송아지가 태어났습니다. 이 송아지는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얼마되지않아 낙타처럼 크고 힘도 세 ‘남민’이라는 이름의 주인이 먹성좋은 소의 여물을 대기에도 급급했다고 합니다.
- 청량산 청량사의 전경이다. 험준한 산 봉우리 바로 밑에 건축된 절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첫댓글 낙산사에는 그곳이 불타기 이전에 몇 차례 다녀왔습니다. 당시 스님들은 호국의식이 요즘 같지 않다는 점을 느끼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