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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1~18절/참 목자의 삶(Ⅲ)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세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안전하게 우리 문으로 인도해 냅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꼴을 풍성하게 먹여줍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양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하려고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선한 목자의 셋째 특징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1절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와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참된 목자이심을 세상에 알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바꿔 놓으시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엄하신 분, 접근하기 어렵고 두려운 분, 절대자, 초능력자, 권위자 등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지만, 감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멀리 계셔서 함께하실 수 없는 분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죄를 심판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우리를 위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격려하는 등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심판하시고 책망하시는 분이라 인식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야말로 양의 목자와 같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방황하는 사람이나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탕자의 아버지’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5장11절 이하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몫을 가져다가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하게 지내며 모두 허비한 후에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 주실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졌지만, 아버지는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내어 입히시고 잔치를 벌이시며 다시 얻은 아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아들의 모든 잘못도 용서하시고 희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잘못을 용서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희망을 주시는 분이심을 탕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12절 이하의 말씀에서 참된 목자의 다섯 가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 특징,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버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부의 억압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내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선언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요일2;2) 죄 아래에 있는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며, 그 값은 자신의 목숨이었습니다.(막10;45)
우리는 예수께서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자, 곧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사실에(롬5;6~8)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 목숨까지 양들을 위하여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유대지도자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성숙한 신앙인이고 하나님께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고 어디를 가든 자신들은 높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치적에 대하여 알아주기를 바라고 일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길게 기도하며 자신들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리더십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짓밟아 버리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아낌없이 버리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도자를 군림하는 자 또는 위에서 부리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도자란 돈과 권력으로 조직을 이끌고 지휘하며 명령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란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고, 높은 자리란 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도자를 왕이나 장군 등으로 표현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더십의 두 가지 형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스(boss)와 서번트(servant)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도자를 보스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서번트 즉 ‘섬기는 자’라고 정의하십니다. 주님께서 ‘진정한 목자에겐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와 반대되는 세상의 지도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 삯군 목자라고 합니다. 삯군 목자의 가장 큰 특징은 목자인 척하는 것이지, 절대 목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삯군 목자는 돈 때문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양을 돌보는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참 목자는 아닙니다.
삯군 목자는 양도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양들을 이용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맡겨진 영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질 물질에 관심을 갖습니다. 따라서 양들의 수와 무게를 세고 재는 사람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양의 고기와 털입니다. 삯군 목자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양들을 팔아치웁니다. 그들은 양들이 위기에 빠지면 아무 미련 없이 버리고 도망갑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참된 목자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도적질을 일삼았고(롬2;21~22) 탐심에 이끌리고 있었습니다.(마21;12~13) 그들은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성전보다 성전의 금에, 그리고 제단보다 그 위의 예물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마23;16~19)
참된 목자는 자신의 보호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제 양처럼 돌봅니다. 그러나 삯군을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 무리를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인 의식이 없으므로 양들에게 헌신적이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주의 양 무리를 치도록 위임받은 이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 하셨듯이 그들을 위해 최선을 대해야 합니다.
삯군 목자는 양들을 위협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리를 보면 양들의 안전을 지키려고 맞서는 대신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말합니다. 삯군 목자는 위험에 맞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안할 때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언이설로 미혹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에 빠트립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삯군 목자가 오히려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특징, 참된 목자는 양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사람입니다.
13절에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돌보다’는 것입니다. 삯군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관리자와 돌보는 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손때가 묻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항상 양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 무리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개인의 유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 지도자는 삯군입니다. 주께서 참된 목자를 세우시고 사역을 맡기신 것은 참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과 같이 항상 양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뿐 아니라 양들이 위기에 처할 때 지체하지 말고 구조의 손길을 뻗치게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특징, 참된 목자는 양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생각합니다.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와 양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선배가 후배를, 상관이 부하를 돌보는 것은 기특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아는 것입니다. 목자의 삶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압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실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있는 것입니다.(요17;21)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들어 자신과 성도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에 대하여 인격적 신뢰와 친밀함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 제물로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오늘날 맡겨진 사명을 위해 생명을 받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넷째 특징, 참된 목자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 때문에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6절 말씀의 리더십은 세상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모습입니다.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은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고 구원받을 방법이 없던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우리에 있지 않는 다른 양들도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지만, 그들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전파해 우리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지 않고 하나님을 독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고 이방인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로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을 구원하라고 거듭 강조하셨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사도 바울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는 한이 있더라도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우리 안에 있는 양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중에 그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선교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놀라운 메시지가 16절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양문 교회가 실천한 사명이 바로 16절 말씀입니다. 우리만 구원받고 천국에 가면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밖에 있는 나의 가족, 친척, 형제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 밖에 있는 영혼을 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밖에 있는 영혼들, 죽어 가는 영혼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없어서, 예수님이 없어서 죽어가며 절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복음 10장 말씀에서 참된 목자의 네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참된 목자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떼를 끝까지 돌보는 사람입니다. 참된 목자는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듯, 생명의 관계로 양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참된 목자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특징, 참된 목자는 스스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17~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진정한 리더십은 타율성이 아니라 자율성에 있습니다. 오늘도 성도님들은 교회에 오셔서 숨은 봉사자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좋아서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입니다. 스스로 좋아서하는 사람은 대가가 없어도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자원하는 사람들은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하기 싫은 일을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봐 주길 원하며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참된 리더십의 모형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수난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부활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버리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거둘 수 있듯이 성도들도 나를 단념하는 결단이 선행될 때 영원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값진 것일수록 얻기가 힘들다는 것은 보편화된 진리입니다. 예수는 새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의 값진 생명을 기꺼이 포기하신 것이며, 이는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버릴 권세로써 스스로 주신 것이며,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를 오해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제거한 후 일시적으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으나 얼마 못가서 다시 얻을 권세로서 이루어진 예수의 부활로 자신들이 패하였음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이기는 하나 이에 따른 선택에는 성부 하나님의 강제가 개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범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만, 언제든지 결정은 자신의 몫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