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같은
은혜인가,
강같은
은혜인가?/
은혜의강
을 이루어
흐르게
하소서.
종은울려
야 종이고,
새는지저귈
때새이듯
하나님의
사람은
항복이
될 때
비로소명품
성도이다.
그 은혜가
진짜 은혜이다.
십자가는
묵상하거나
끌고 가라고
주심이 아니다.
십자가는
꼭대기에
올라가
매달려
죽으라고
주신 것이다.
내 생각
내 유익
내 욕심
을매단채
로 말이다.
소나기같은
은혜속에
흠뻑젖어
살건만,
아직도 왜
이대로일까?
기막힌
말씀으로
날마다감동
하건만,
왜 아직도
나는
걱정덩어리
로 살까?
그토록 사무친
기적과 응답
을 경험하
였건만,
왜 아직도
나는단순
하지못할까?
그 이유는
늪같은
은혜때문
이다.
은혜는
흘러야 한다.
물이흐를때
엄청난동력
의 전기를
만들어낸다.
은혜도흐를
때 청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
머무는
은혜는
받을수록,
쌓을수록
영적 자만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영적인
매너리즘의
뿌리도
늪같은
은혜때문이다.
그래서은혜를
말할 때
강같은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은혜를흐르
게 하려면
댓가를
치루어
야만 한다.
강같은
은혜 안
에 사는
사람은
편안하게
사는 것이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나는 그저
하나님 앞
에만 서면
거룩한 바보
일 뿐이다.
이런 성도가
보고프다.
그립다.
가슴저리
도록 말이다.
그런 거룩한
바보와
하루라도
함께하
고 싶다.
하나님의
젓가락은
거룩한
바보에게
머문다.
소유권도,
선택권도,
결정권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
포기한
단순한
바보말이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바보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주여,거룩한
바보로
살게 하소서.
믿음이란,
지식이나
경험이나
관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날마다 죽음
으로 순종
하는 것이다.
기도보다
앞선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
말씀보다
감각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최강의
바리케이트이다.
우리의 문제
는 하나님을
안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반만
믿는 것이다.
믿음은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기도가 안된다.
믿음은 자연
법칙보다
영적인
법칙을
우선순위
에 두는 것이다.
가나안의
정탐꾼들을 보라.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는
모두가 다
자연법칙을
영적인 법칙
보다 우선
순위에
두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두려워 했고,
많이 생각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영적인 용어
속에는 부정적인
육의 말들로
충만하다.
자기들에게
다가올 손해
를 마치
하나님의
뜻인양
포장하려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일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말
할말이
없었을까?
그분들은 정말
편안함이
싫었을까?
아니다.
편안함보다
하나님이 더
좋았을 뿐이다.
늪같은 은혜
에서 벗어나지
못함의 뿌리는,
하나님을
배제시킨
내 생각,
내 집착때문이다.
요즈음 성도들
의 위기는
강같은
예배후에
곧 늪같은
생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다.
천둥같은 아-멘
소리후에,
번개같이
갈라지는 인본
주의 늪에
빠져 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뜻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항
복하는
것이다.
천국 갈 때
까지 이 훈련
을 받 것이다.
고난의 목적
도 여기에 있다.
엉뚱하고
말도 안되는
배를 만드는
일에 120년
동안이나 한
결같이
순종했던
노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순종이란,
말도 안되는
일에 기쁨
으로 항복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댓가 없이
은혜만
받으려 함이다.
주의 종들
에게 가장
무서운 생각은,
댓가 없이
귀한 종으로
쓰임받으려
는 마음이다.
그런 은혜는
곧 늪을 이루어
웅덩이 되고 만다.
아무런 영향력도
, 아무런 힘도,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얼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후에
걱정의 늪,
불안의 늪,
생각의 늪,
후회의 늪에
빠져 사는가?
게다가 다가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늪을 이룬다.
늪이 일상 이된
하나님의
사람들,
늪을 오히려
즐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음에
서글프다.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성도들의
받은 은혜와
믿음도 댓가
를 치루어야
하는 시험앞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강같은 은혜인지
? 늪같은
은혜인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에게 장마비
같은 은혜와
축복을
조건없이
부어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험 하신다.
혹독하게
흔들어 보신다.
그 시험에 패스
하지 못하면
우리는 재수,
삼수하게 된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반드시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흔드심
에서 우리의
영력은 들통
이 나고 만다.
하나님은
가끔씩 예고
없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곤 하신다.
"내가 너를
위하여
만가지
은혜를 주었고
나의 독자까지
주었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
을 줄수 있느냐?
무엇을 할
수 있는냐?"
이때 많은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저항으로
반응한다.
하나님의 뜻이
옳지 않아서
가 아니다.
내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안맞기 때문이다.
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항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어쩌면
찬송가를 바꾸
어야 할지도 모른다.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괄호 열고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은
빼고'로 말이다.
힘센 맹수나
독수리들은
유난히 상처가 많다.
그만큼 무서운
댓가를 치루었
다는 뜻이다.
진짜 영성은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고 잘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를
위하여
나를 포기할
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항복의 영성을
쉽다고 말하지 말라
순종의 영성을
가볍게
생각치 말라.
포기의 영성을
헛되이 말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처참히
가루되는
시험을 통해서
만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최고
의 선물이다.
은혜는 하루아침
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항복은
보통 수십년이
걸려도 힘이
드는 분야이다.
마르다처럼
봉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아무말 없이
자기의 옥합
을 깨뜨리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자리
에는 누구나
올 수 있다.
그러나,
은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는 누구나
드릴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아무나 할수 없다.
기도는 누구나
할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말은 이때를
위함이
아닐까?
주님의 일
(교회일)은,
누구나 즐겨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다
. 지금 한국
교회는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
은혜의 강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은혜
의 늪에서
안주할
것인지 말이다.
주를 위하여
편안함을
포기할
것인지,
나를 위하여
주를 포기
할 것인지
말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내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포기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겟세
마네의 기도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 기도는
피와 땀을
뿌리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 놓는 것이다.
그것이 내 유익과
편안함일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늪에서 헤어
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 항복해야
함을 알지만
순종해야
함을 알지만
포기해야
함을 알지만
항복이 안되고
하기도
싫은 것이다.
순종이
안되고
하기도
싫은 것이다.
포기도
안되지만
하기도
싫은 것이다.
우리도
때때로
순종한다.
그런데,
우리의 순종은
마음이 불편하여
안색이 변한다.
우리도 때때로
항복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항복
에는 말이 많다.
우리도 때때로
십자가에
올라가
죽는척 한다.
그런데, 우
리의 죽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한다고
말하나,
실상 우리의
육은 하나님의
뜻조차
대적하려 한다.
이것이 늪에
빠져 날마다
허우적대는,
우리의 실존
인지도 모른다.
순종의 size가
영성의 size라
말하지 않았던가?
이기적인 순종에서,
주님 중심의
순종으로의
전환만이
늪에서
강으로 헤어
나게 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저 멀리 은혜
의 바다로
나간 분들
을 보라!
하나같이
불같은
시험과
주를 위하여
혹독한 댓가를
치룬 분들이다.
은혜란, 항복이
되게 하는
에너지이다.
은혜란,
내 맘에
안드는 사람,
내 맘에 안
드는 일을
넉넉히 품게
하는 자원이다.
은혜의 바다는
아무나 갈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듯
이 말이다.
늪에서 안주
하고픈가?
절대로 항복
하거나 순종
하지 말라.
강같은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고픈가?
그냥 십자가로
올라가 죽으라.
매일같이..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
를 맺게 된다.
왜 안 변하는가?
왜 안 자라는가?
왜 늘 곤고한가?
썩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죽어야 살고
썩어야 열매
맺고 순종해야
해결되고
항복해야
이긴다는 것
은 주오실
그날까지
변동없고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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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호 목사님방
늪같은 은혜인가,강같은은혜인가?
서정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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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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