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돕는 사람들 -
6.25를 겪고 수복하여 올라오던 때인 1953년도는 박성국은 아직 세상 구경을 하기 전이였고 형인 성도가 1살 때였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성국의 아버지 박영우는 6.25가 발발하고 다음 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황해도 연백에서 부농은 아니어도 먹고살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농토를 가지고 농사를 짓던 영우네는 6.25가 나기 전부터 부르주아라고 공산당의 핍박을 받았다.
6.25가 난 해에 피난 못 하고 고향에 있을 때는 그 핍박이 더 심해져서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북진하여 백두산까지 올라왔던 국군이 다시 후퇴하니 더 이상 그 피박을 받으며 북에 있을 수가 없어 1.4 후퇴 때 38선을 넘어 피난을 내려왔다.
고향을 떠날 때는 50년도 초에 결혼한 처와 부모님과 결혼하여 어린애가 딸린 형님네 세 식구와 그리고 누이 이렇게 여덟 명이 같이 하였는데
강물이 언 임진강을 건너기 전 오보로 그랬는지 아니면 뒤를 쫓는 중공군 때문이었는지 피난민 위로 느닷없이 퍼붓는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느라 급박하게 죽을 둥 살 둥 정신없이 뛰고 숨다 보니 언젠지 모르게 부모님과 누이를 헤어지게 되고 한강을 건너면서 수많은 인파에 이리저리 밀리다 보니 또 형님네와 헤어져 두 부부만 남아 울며불며 수원 근처 발안까지 피난을 내려갔다.
발안에서는 남의 집 헛간을 얻어 살면서 산나물과 인천의 바닷가까지 가서 뜯어온 바다나물로 쑨 멀건 죽으로 연명하고 어쩌다 혹 원주민의 일거리를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기라도 하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러다 다시 북진이 되면서 수원에 피난민 수용소가 있고 거기서는 쌀 배급도 나온다는 말을 듣고 수원으로 나와 수용소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쌀 배급이 나오고 도시가 되어 사람이 많이 모여 살고 피난 안 간 원주민도 많아 그 원주민의 집에서 여러 가지 잡일을 도와주고 연명을 할 수 있어 발안에서보다 먹는 것은 조금 나아졌지만, 대신에 수많은 피난민으로 집을 얻을 수 없어 다른 피난민들처럼 언덕진 곳에 땅굴을 파고 바닥에는 짚을 깔고 그 위에 가마니로 덮고 문에는 가마니를 쳐 바람을 막는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 와중에서도 영우는 아들을 낳았다.
수원에서 그렇게 난민 생활을 하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된다는 말을 듣고 전쟁이 끝나면 혹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에 가면 돌아오는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을까, 자기 농토를 찾아 농사도 지으면 전처럼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오다 적성에 도착하였을 때 휴전협정이 되면서 휴전선이 생기고 남북왕래도 막혀 휴전선 이북 연백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돼 가졌던 희망이 무너져 내려 포기하는 마음으로 그냥 적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니 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때 적성은 휴전협정이 되고 수복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협정 전에 주위에 2〜3십리 떨어진 곳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적성은 지금도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6.25 사변 때 참전한 영국군 1개 대대가 이곳 전투에서 몰살하였다고 하는 정도로 전쟁이 치열하였던 곳 이어서 수복 당시의 마을 모양은 말이 아니었다.
옛날에 있던 집들은 모두 폐허가 되고 들과 산에는 포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어떤 곳은 포탄 자국으로 커다란 웅덩이가 생기고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도 여기저기 제방이 터져 물길을 따라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상태이고 논과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당장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고향을 못 잊어 찾아들었고 한 발짝이라도 고향에 가깝게 가려는 북쪽에 고향을 둔 피난민도 상당수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사람들 틈에서 피난민인 영우는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원주민도 모두 피난을 다녀온 사람이고 나머지도 모두 북쪽이 고향인 피난민들이라 모두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실정이어서 당장 누구에게 일자리를 주거나 누구를 돕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각자가 자기의 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열매를 따려, 나무껍질을 벗기려, 나무를 하러, 짐승을 잡으려 헤맸다.
심지어는 고물 장수에게 팔아보려고 전쟁 때 산야에 묻힌 탄피를 캐려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 이때는 어쩜 피난민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것이 이것인지도 몰라 많은 사람이 이것을 찾으려 산야를 헤맸다. 그러다 전쟁 때 묻어놓은 지뢰를 잘못 건드리거나 밟아 지뢰가 터져 다치는 사람, 심지어는 죽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이런 형편이라 영우의 하루하루는 생활과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살길이 막막한 영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사람이 성호의 아버지 안필상 이다.
안필상은 고향이 파주 적성이고 피난 가기 전 논 다섯 마지기와 밭 반나절 갈이를 갖고 농사를 지며 틈틈이 동네일을 해주며 살다 6.25 때 대구까지 피난 갔다가 그곳에서 운 좋게 미군 부대 PX에서 나오는 물건을 받아서 파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같이 조그마한 장사를 하여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필상의 부모는 적성에서 농사를 지며 사는 농부였으며 자식 복이 없어서인지 필상을 독자로 두었고 살림은 넉넉지 않아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부모님이 6.25가 나기 전해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 해 그러니까 6.25가 나던 해, 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부애가 좋기로 소문이 났던 사이 이어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편찮으시더니 다음 해, 봄에 돌아가신 것이다.
필상은 고향으로 돌아오며 어쩔 수 없이 피난지에서 미군 부대 물건 장사를 해서 모은 돈 일부를 썼지만 아끼고 아껴 아직은 얼마간의 돈이 남아 있고 결혼한 지 4년이 넘도록 애도 없어 크게 돈이 드는 일이 없기에 두 부부가 살아가는 데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더욱이 다음 해부터 해묵은 농토를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 잘 살지는 못할지라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마을에 돌아와서 예전에 살던 집터에 대략 살집을 만들고 논밭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며 농사 준비를 하던 늦가을 어느 날 다음 해 농사일을 위해 씨앗을 마련하려고 적성에서 40여 Km나 떨어진 군청소재지인 금촌엘 갔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수복한 마을이라 적성에는 아직 장다운 장이 서지를 않고 더욱이 곡식과 채소의 종자를 파는 종묘 상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형편은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여서 수복이 된 지 좀 오래되어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적성에서 남서쪽으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샘내라는 마을에 장이 서고 상점이 있지만, 종묘 상회는 없다.
그래서 씨앗을 사려면 종묘상이 있는 군청 소재지인 금촌까지 나가야 했던 것이다.
전쟁의 뒤 끝이라 군청 소재지의 종묘 상회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날 필요한 씨앗을 구하지 못하고 종묘상에게 부탁하여 며칠까지 찾으러 오라는 대답을 듣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는 금촌에서 적성까지 들어오는 차가 없고 차가 닿는 곳인 샘내에서 내려 이십 리 길을 걸어야 했고 적성을 거의 다 와서는 작은 고개도 넘어야 했다.
적성이 이 고개 너머 밑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금촌으로 떠났지만, 비포장도로에 차도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정도 다니고 배차시간도 일정치 않은 때라 하루길 하기에는 좀 먼 거리여서 필상이 샘내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밤이 좀 늦은 시간이 되었다.
늦가을이라 날씨가 조금 쌀쌀하지만 마침 보름 근처라 하늘에 달이 있어 밤길을 걷기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피난 후 수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낮에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피난민이나 원주민이나 모든 마을 사람들이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저녁 식사 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친 몸을 잠자리에 누이기 때문에 밤에 밤길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 밤에 밤길을 걷는 사람은 필상이 혼자뿐이다.
멀리 떨어진 높은 산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인적이 없는 밤에 들리는 부엉이 소리는 사람에게 무서움 증을 일게 한다.
또 적성 맞은편에 6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경기도 5악 중의 하나인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을 아우르는 크고 높고 험한 산으로 옛날에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여 숨었었다는 큰 동굴이 있는 감악산 있고 그 산에 북으로 도망하지 못한 인민군이 숨어있다가 밤에 인가로 내려와 사람을 해하고 금품과 식량을 약탈한다는 소문과 필상이 넘어야 할 고갯마루에는 가끔 지나가는 사람을 터는 강도도 있다는 둥의 소문이 마을에 퍼져있어 혼자 밤길을 걷는 필상에게 그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더욱 무서움 증이 나게 한다.
첫댓글 즐~~~~~감!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무혈님!
구라천리향님!
지키미님
감사합니다 . 설날이 가까웠군요.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