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발길을 재촉하여 적성 뒤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이 고개만 내려가면 마을이다. 하고 다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 때 앞에 저 만치 커다란 검은 물체가 뒤뚱거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엔 사람인지 짐승인지 그런 생각보다 크고 시커먼 물체가 앞에서 움직이는 바람에 놀랐던 것인데 놀랐던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다시 보니 몸체가 큰 것이 사람은 아니고 짐승인 것 같고 짐승 중에도 곰이나 호랑이 같은 짐승으로 보여 더욱 섬뜩해져 더욱 움직일 수가 없다.
강도 같은 사람이라면 사정하면 금품은 빼앗겨도 어떻게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짐승이라면 정말 죽음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 뒤라 굶주린 짐승이 무척 사나우리라는 생각이 더 큰 무서움이 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보고 있는데 움직임이 동물처럼 민첩하지 못하고 아주 느린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산다는 생각으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살금살금 쫓아 가다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짐승이 아니라 나무지게를 진 사람이 고개를 내려가고 있는데 술이 많이 취했는지 걸음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말이 아니다.
그 사람 때문에 놀란 것에 화가 났지만 자기가 혼자 상상으로 겁을 먹고 놀란 것이라 혼자 실소를 하며 그 나무꾼을 따라 내려가는데 뒤에서 보기에 이리 비칠 저리 비칠하며 곧 쓰러질 것같이 위험해 보여 부지런히 좇아가서 나뭇단을 잡으며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이제 산 고개에서 사람을 만나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무서움 증을 떨어버리게 된 것이 안심도 되고 다소 유쾌한 마음도 들어 이렇게 말을 붙이며 그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무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내려가는데 발걸음은 여전히 위태롭다.
“형씨 술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하고 재차 묻는 필상의 소리에 고개를 든 사람은 달빛에 보기에도 상당히 탈진한 얼굴이고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말이 거의 입속에서 맴돈다.
다른 사람과 말하는 것도 귀찮다는 것 같다.
“아! 네! 나는 적성 사는 안필상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무꾼과 얼굴을 마주한 필상은 걸음이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먹었따고 짐작한 사람이 그 사람에게서 술내가 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네! 그러세요.”
그렇게 웅얼웅얼 대답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그 사람의 발걸음은 여전히 비틀 거린다.
“이보세요! 형씨! 아무래도 나무를 지고 내려가는 것이 무리일 것 같으니 여기 어디 쯤에 벗어 놓고 가셨다가 내일 와서 가져가시죠.”
그러나 나무꾼은 대답이 없다.
그런 나무꾼을 잠시 쫓아가던 필상이 나무꾼의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한 걸음걸이가 다시 마음에 걸려 “형씨! 내 말대로 하세요.” 하고 권한다.
“그러다 잃어버리면 나는 더 힘든 일을 하여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요새 같은 때 길가에 임자 없이 놓여있는 나뭇단은 보는 사람보고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어떻게 갑니까.”
“내버려 두세요. 말할 힘도 없습니다.”
그 사람 말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운 나뭇단을 밤에 지고 갑니까? 그것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필상의 나무라는 것 같은 말을 들은 나무꾼은 어렵게 지게를 길가에 내려놓고는 필상을 마주하고 서더니
“거, 배부른 소리 좀 그만하시고 어서 가세요. 말을 시키니 더 힘들어지는 군요.”
하고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길가 풀 섶에 앉는다.
그제야 어렴풋이 생각이 미친 필상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겠지, 지금같이 어려운 시절에 모두가 피난민이나 다름없는 우리 동네에서 나무꾼이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고 나무를 지고 다니겠는가, 더구나 이 사람은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군.’ 이렇게 생각한 필상이 옆에 앉으며
“미안합니다.”하고 주머니에서 권련을 꺼내 한 대 권한다.
“감사합니다.”
하고 받은 나무꾼에게 필상이 담뱃불을 빌려주자
“나중에 피우겠습니다.”
하는 나무꾼은 달 아래서도 보이는 우수에 어린 근심 띤 얼굴로 달빛 아래 깊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누워있는 앞산만 바라보는데 얼굴이 초췌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필상은 자기가 피난을 나가 대구에서 미군 부대 물건을 판매하는 효식을 만나기 전까지 겪었던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어려운 시절이 생각나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필상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필상이 입을 열어 침묵을 깬다.
“내가 무례했습니다. 대강 짐작이 갑니다만 형씨의 사정을 제가 좀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힐긋 필상을 처다본 나무꾼은 길게 한숨만 쉬고 아무 말이 없다.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표정이다.
“너무 건방지다 생각지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혹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묵묵부답이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 같은데, 이 밤에 어째서 이렇게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고개를 넘으십니까.”
필상의 채근하는 듯한 그 물음에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쉰 나무꾼이
“그렇게 물으시니 말씀을 드리지요.”
하고 무겁게 말을 시작한다.
나무꾼의 바로 박영우로 고향이 황해도 연백으로 1.4 후퇴 때 피난을 나왔다가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욕심으로 피난지에서 올라와 적성까지 왔으나 그동안에 휴전이 되고 황해도 연백은 휴전으로 생긴 휴전선 이북의 북녘땅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달리 갈 곳도 없어 할 수 없이 적성에 자리를 잡았는데 수복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이곳은 피난에서 막 돌아온 원주민이나 북한이 고향인 피난민들이 이제 자리를 잡느라 모두 어려운 형편이어서 무일푼으로 일가는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영우네는 살길이 막연하다.
서로 자기 살길이 바쁜 이 동네에서는 도움을 받거나 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고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어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때로는 포탄 알이나 탄피를 찾아 주어 팔아서 근근이 지냈는데 그것도 또한 양은 한정되어 있고 구하려는 사람은 많아 차츰 어려워지고 더욱이 겨울이 가까워지며 초근이나 목피를 구하기 어려워 생활이 더 곤란하게 되어가고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며 나무를 해다 파는데 그것도 야산은 포탄으로 초토화되어 나무가 없고 깊은 산에나 가야 할 수 있어 그렇게 깊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와서 팔려 해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어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다.
오늘도 아침부터 굶고 산에 가서 나무 한 짐 해가지고 그래도 버스 터미널도 있고 장도 서는 이 근방에서는 큰 동네인 샘내로 나무를 팔려갔으나 그곳도 적성보다 크게 나은 형편이 아니라 늦게까지 나무를 사는 사람이 없어 못 판 나뭇짐을 점심도 저녁도, 모두 굶고 지고 오다 보니 속이 비어 힘이 없어서 나뭇짐에 몸이 휘둘리고 발걸음이 늦어져서 몇 번이나 나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면 또 내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더 힘들 것 같고 오늘은 나무를 못 팔았지만, 내일 일찌감치 샘내로 가서 나무를 팔아 볼 욕심으로 그냥 지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움막에서 자지도 않고 고픈 배를 안고 혹시 나무를 팔아 땟거리라도 사가지고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을 처자,
며칠째 젖이 안 나오는 엄마의 빈 젖을 빨며 배고픔을 호소하듯 울다가 지쳐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 이제 1살인 아들놈과 낮에는 아들놈을 등에 업고 먹을거리, 일거리를 찾아 헤매며 아들놈이 울적마다 끌어안고 빈 젖을 물리고는 문 젖에서 나오는 것이 없어 더욱 울음이 커지는 젖먹이를 울음으로 달래다가 약하고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곤 하는 처가 지금도 불도 켜지 못한 움막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도 민망하여 무거운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한 영우에 두 눈에 잔 이슬이 맺힌다.
필상이 눈에도 이슬이 맺힌다.
자기도 피난처 대구에서 겪었던 일들인 것이다.
필상이 일어서며 영우를 옆으로 밀쳐내고 나무지게를 빼앗는다.
밀쳐 옆으로 넘어져 놀란 영우가 일어나며
“아니! 왜 이러십니까?”
하고 나뭇짐을 잡는다.
이 사람이 힘이 없는 나에게서 나뭇짐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울어나오는 떨리는 소리로
“우선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내가 이 나무를 살 테니, 그리고 당신은 힘이 없어 더 지고 가면 위험해요. 그러니 나뭇짐은 내가 지리다. 이 나무는 내가 샀으니까?”
영우가 그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돌며
“고마운 말씀, 감사합니다. 나무를 사시겠다니, 그러나 나뭇짐은 내가 저다드려야 하죠.” 한다.
“말하지 않아요. 당신은 위험하다고, 저리 비켜서기나 하세요.”
하며 밀쳐내는 필상이 손에 영우는 댓거리 할 힘도 없어 밀리어 나며
“이런! 미안해서 어쩌지요.”한다.
“미안하면 빨리 따라오기나 해요.”
이렇게 하며 나무지게를 진 필상이 앞장서고
“정말!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게꼬리를 잡고 비실비실 따라가며 영우는 연신 감사를 표한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잘보고 갑니다...
지키미님!
무혈님!
이초롱님1
감사합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갑진년 새해에 값진 일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동이 밀려오네요 감사드립니다.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