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필상의 집으로 간 영우는 필상의 집에서 필상과 같이 저녁을 먹고 필상이 주는 두 어되 가량의 보리쌀을 받아 가지고 필상의 집을 나왔다.
필상의 집을 나설 때 필상이 영우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내 농사일을 도와주시오. 나도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나와 같이 일하며 먹으면 같이 먹고 굶으면 같이 굶으며 함께 살아봅시다.”
“아니! 이렇게 베풀어 주신 은혜도 감사한 데 제가 어찌 더 형씨께 신세까지 지겠습니까?”
“그런 말마시오. 이렇게 어려운 때 같이 도우며 살아야지. 그리고 나도 농사일에 일손이 필요하니 신세라고 생각지 마시오.”
“아무리 그래도 염치가 없어서.”
“여러 말 말고 내일부터 우리 집으로 와요. 기다릴 테니.”
집에 돌아온 영우는 필상이 준 보리쌀을 처에게 주며 필상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둘이는 이렇게 어려운 때 자기들을 도와준 필상이의 처사에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보리쌀로 밥을 지어 모처럼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필상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하고 망설이는 남편을 보고 어찌 되었든 나무도 사주시고 보리쌀까지 주신 그런 고마운 분이니 오늘 하루 그냥 도와드리는 셈 치고 가서 그분 댁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처의 말을 듣고 공감을 한 영우도 당장 내일의 생계를 위해서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파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필상의 집으로 갔다.
영우를 기다리다 영우가 오지 않는다며 어제 대강 이야기들은 대로 영우네을 찾아가려고 싸리문을 나서던 필상은 문을 들어서는 영우를 보고 반가워한다.
이렇게 해서 필상과 영우는 같이 일하게 되었고 필상은 그날부터 영우의 도움을 받으며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위해 3년여 묵은 논과 밭에서 나무를 뽑고 잡초를 제거하고 바위를 치우고 돌을 고르고 하며 묵은 논과 밭을 일구었다.
여러 해 묵은 논밭을 일구자니 자연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상황을 본 영우도 이런 때는 필상을 돕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필상의 농사일을 거들었고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되면서 집안일이 많아지자. 자연적으로 영우댁도 필상이네를 돕게 되었다.
같이 일을 하며 두 사람은 생각보다 서로에게 잘 맞는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필상은 영우가 불편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고 하고 영우는 필상을 거스르지 않고 예우하면서 둘이 협조하고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날이 가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나중에는 잠만 나누어 자고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필상이네 집에서 하게 되었다.
필상이 영우보다 두 살이 많아 영우는 필상을 형님으로 부르고 필상의 처도 영우 처보다 한 살이 많아 자연스럽게 영우 처도 필상의 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피난길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외톨이가 된 영우와 역시 독자로 자라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혼자가 된 필상, 그렇게 외로웠던 두 사람은 이렇게 하여 친형제와 같은 사이가 되었고 아직 아기가 없는 필상이네는 이제 한 살짜리 영우의 첫째 아들 성도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했다.
다음 해 해동이 되면서부터 논밭을 갈아서 밭농사 논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 늦가을에 땅이 얼어서 일할 수 없을 때까지 묵은 논밭을 일구는 일을 해 놓아서 올해부터 농사하기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복 후 첫해의 농사라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일손도 많이 들어 필상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든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어려운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농사가 시작되면서 피난민들도 논밭을 가진 원주민의 농사일을 도우며 그런대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갔다.
이렇게 한해가 지나고 다음 해부터 어느 정도 마을이 안정되면서 마을에서 새로 집을 짓는 일, 방에 구들을 놓는 일, 울타리를 고치는 일, 담장을 쌓는 일, 부엌을 고치는 일, 우물을 파는 일등의 허드렛일이 마을에서 일감으로 나오며 한두 가지씩 일거리가 생겼다.
이런 일들은 원주민인 필상이 전쟁 전에도 손재주가 있어 농사 틈틈이 맡아서 하던 일이라 이런 일이 생기면 필상이를 아는 마을 사람들이 필상네를 찾았다.
그런데 영우가 몇 번 필상을 따라 다니며 일을 해보더니 힘도 필상이보다 좋고 손재주도 필상보다 나아 점점 일감이 늘며 마을의 허드렛일을 거의 필상네가 맡아 하게 되면서 조금씩 집안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집이 합쳐서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살림하며 가사를 살펴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성도가 두 살 되던 해 필상이 처도 그렇게 바라던 임신을 했고 영우처도 또 임신을 해 다음해 둘 다 아들을 낳아 필상은 성수라고 이름을 짓고 영우의 아들은 성국이라고 했다.
그리고 2년 후 영우는 딸을 하나 더 낳았고 그다음 해 필상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성호라고 했다.
그러니까 영우는 성도, 성국, 성숙 삼 남매를 두었고 필상은 성수, 성호 형제를 두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필상이네의 생활도 많이 안정되어 영우네가 따로 살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편하고 일에 능률도 안 오른다고 집을 늘려서 크게 지어 다른 곳에 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던 영우네를 한 집으로 불러들어 같이 생활하게 되었고 성호가 태어나고 2년 후 영우의 큰아들 성도는 초등학교를 들어갔다.
아이들은 필상 부부를 큰아버지 큰 엄마라고, 영우와 영우처를 작은아버지 작은엄마라고 부르며 친 형제자매와 같이 자랐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커가는 아이들같이 적성도 차츰 인구가 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적성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로이다.
이곳을 통해 북으로는 백학, 연천 그리고 동두천으로, 동으로는 신산리 양주를 거쳐 의정부로 해서 서울로, 남으로는 장파리와 문산과 금촌을 거처 서울로 가는 길과 법원리와 광탄을 지나 고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이 있고 서쪽은 임진강 변으로 넓은 들을 대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이 늘고 번창하게 되었는데 이 고장의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군인들로 여기서 12Km정도 떨어진 신산리에는 사단본부가 있고 이곳에는 연대 본부가 자리 잡고 있어 이들 군인들로 인해 이곳이 군사도시로 발전하고 5 일장도 서게 되면서 점점 큰 마을로 변모해 가는 중 1970년대 나라에서 시작된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이 마을에도 번져 마을 전체가 합력하여 잘사는 마을을 만들려고 노력해 마을의 생활 수준이 많이 좋아지고 그래서 필상이네도 농촌 생활로는 중류층 이상으로 생활이 피게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처음 논 5마지기와 반나절 갈이 밭으로 시작한 재산이 논 열다섯 마지기와 밭 이틀 갈이로 늘었고 밭에서는 비닐하우스로 여러 가지 농산물을 재배하여 남보다 일찍 출하함으로 수입을 높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을 모두를 중학교, 고등학교에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집안은 아이들의 육성회비 독촉으로 성화를 부렸지만, 필상과 영우의 노력으로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내던 것이 영우의 아들 성국과 필상의 아들 성수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적성에는 적성에서 4Km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뿐이 없어 중, 고등학교부터는 적성에서 40Km정도 떨어진 군청소재지인 금촌에 있는 학교에 보내야 해서 성도가 혼자 중학교 다닐 때는 하숙을 시켰으나 성수와 성국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고 아이들을 한데 모아 자취를 하게 했다.
성도는 대학입학 후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으며 때때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용돈을 벌어서 가정의 경제를 도왔다
첫댓글 즐~~~~감!
잘 보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무혈님!
구리천리향님!
이초롱님
감사합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벌써 2월 중순 다가오는 봄에 많은 추억거리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동이 밀려오네요 감사드립니다.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