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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의 모든 축복을 다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는 따 먹지 말라고 분부하신다. 사람이 하느님께 자유를 선물받았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손 씻는 예식의 비현실성을 지적하시면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경고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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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한 말입니다. 그는 인간을 ‘습관들의 묶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규정할 만큼, 사람이 어떤 습관으로 길들여지느냐에 따라 운명과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습관을 만드는 데에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우리의 마음이 그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본성이란 늘 약해서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되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오염시켜 우리의 말과 행동을 더럽힙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생각을 정화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루 동안 ‘나는 무엇을 보는가?’, ‘나는 무엇을 듣는가?’, 그리고 ‘누구를 만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각은 또한 우리 삶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성경을 읽고, 미사를 참례하고, 그날의 ‘주님 말씀’ 한 구절을 품고 산다면, 그날 하루는 주님과 함께한 날이 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면 인격이 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지요? 나의 한 줄기 생각 안에도 인생의 모든 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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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들어가는 것’이 더럽힐 수는 없다는 말씀! 과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살면서 가장 많이 뱉어 내는 것은 말입니다. 말로써 남을 더럽히고 자신도 더럽히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문을 잠그고 방 안에 숨어 지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 자체에 윤리적 잣대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어서 ‘죄 되는 음식’도 없고 ‘선이 되는 음식’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아직도 ‘음식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힘 자체’는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천할 때 힘이 됩니다. 어쭙잖게 알아서 남에게 피해 주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음식은 약입니다.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가끔은 음식을 먹는 자세도 돌아봐야 합니다. 급히 먹기에, 홧김에 먹기에, 분노하면서 먹기에 우리의 언어가 급해지고 분노로 얼룩지는 것은 아닌지요? 건강한 삶은 언제나 절제와 함께합니다.
레위기(11,1-47)와 신명기(14,3-21)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 내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짐승들이 많이 나열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만의 음식인 ‘코셔’(Kosher: 돼지고기를 포함한 부정한 음식이 들어 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종교 음식)를 탄생시켰고, 특히 정통 유다인들은 이 규정을 엄격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종교 규정들을 비판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화를 내는 것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는 것이요, 기쁜 것도 ‘무엇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짱. 몸짱. 맘짱! - 이재학 신부-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예쁜 사람이 참 많다. 여자만 예쁜 것이 아니라 남자 아이들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원래 남자는 ‘멋있다.’, ‘잘생겼다.’고 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아무튼 요즘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얼짱이니, 몸짱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몸짱이 되려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살을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죽어라 살을 빼는 모습이 안쓰럽다. 생긴 것이야 타고나는 것인데 ‘놀라운 현대 의술’ 덕분에 예뻐지려는 사람도 많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양승국신부- <사노라면 언젠가 반드시>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이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이웃들, 오랜 세월 동안 불치병과 싸우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오늘 다시 한 번 성모님의 도움과 위로로 힘과 용기를 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모든 환우들이 병고를 기꺼이 이겨내셔서 보다 크게 한걸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축복의 나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독한 병고와 신체장애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형제의 말씀이 오늘 하루 모든 환우들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면 이 고통이 언제 어떻게 축복으로 돌변할까 기대합니다. 어쩌면 시련은 축복을 만들어 가는 소중한 재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마음 크게 먹고 바라보면 고통도, 신체장애도 제게는 또 다른 축복인 것입니다.” 병고로 인해 고통 받고 계시는 분들, 다시 한 번 힘내시기 바랍니다.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힘드시겠지만 병고를 통해 우리는 보다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올려다볼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면 두려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게 된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복자(福者) 가운데 지난 2002년 시복되신 자티 수사님이 계십니다. 건강이 약해 사제가 될 수 없었던 그는 간호사와 약사로 일하게 됩니다. 한평생을 아르헨티나 비에드마에 있는 병원에서 가장 가난한 환우들의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보냅니다. 자티 수사님의 병원은 서울 영등포 역 옆에 위치한 무료자선병원인 요셉의원과 흡사했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의료계의 이방인들인 극빈자들이었습니다.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3세계에서 온 외국인이란 이유로, 의료보험카드가 없다는 이유로, 신용불량자란 이유로 다른 병원에서 진료가 거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티 수사님의 병원은 다른 병원과 반대였습니다. 가난할수록, 더럽고 냄새날수록 더 우선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특히 다른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 시간낭비다,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중병의 환우들도 자티 수사님의 병원에서는 가장 A급 고객으로 관리되었습니다. 자티 수사님에게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손님이었습니다. 자티 수사님은 돈도 없으면서 까탈스럽고, 지독한 중병의 환우가 찾아오면 기쁜 얼굴로 병원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병원을 축복해주러 오신 착한 목자님께 내어드릴 방이 있나요?” 자티 수사님은 또한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극빈 환우들을 위해 “우리 구세주께 드릴 코트나 바지가 있나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모두 다 받아들이면 병원이 얼마가지 않아 망할 것이라는 직원들에게 자티 수사님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받아달라고 청하는 환자들이 예수님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면 어찌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장 큰 축복의 선물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환우들이 끝도 없이 길고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런 나머지 이제 그만 이쯤에서 포기하겠노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분들이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드리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사노라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날, 아름다운 세상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겠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도록 기도해드리고 격려해드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고통이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은 그 고통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티 수사님 같은 천사들이 좀 더 많아지길 기원합니다. 반드시 지금의 고통은 끝이 있고, 이 고통을 잘 넘기면 상상도 못할 하느님의 위로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다정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자티 수사님 같은 천사들의 몫을 우리가 이제 대신해내길 바랍니다.
감기는 초기에 -전삼용신부-
요즘 또 환절기라 그런지 주위에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데 바이러스가 있다고 해서 항상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코나 몸 어디든지 감기 바이러스는 항상 존재한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사람이 감기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지만 스트레스나 과로로 체력이 떨어지면 그 때 감기 균이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감기에 걸리는 것이라 합니다. 감기에 걸렸더라도 초기감기 때 잡아야지 일단 심하게 들어버리면 장시간 고생하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불이 일단 번지게 되면 스스로 꺼지기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끌 수 있을 때 끄지 못하면 큰 재난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인생에서의 오랜 시험을 마감하는 의미로 함께 공부하는 사제들과 술을 한 잔 마셨습니다. ‘먹고 죽자~!’라고 외치며 열심히 마시다보니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동료 신부가 술을 계속 시켰습니다. 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계속 마시고 집에 들어오니 이미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도 역시 술이 깨지 않았습니다. 오전 내내 입에서 술 냄새가 났고 그래서 기분도 안 좋고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담부턴 다음 날까지 지장 있도록 마셔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시기 전부터 그런 결심으로 마셨다면 절제가 되었겠지만 중간에 그만 마셔야겠다고 해 봐야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예 초기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무엇이든 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짓는 순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뱀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때부터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때는 죄가 완성되는 때이지 그 때가 딱 죄를 짓는 순간은 아닙니다. 제방이 무너질 때 아주 작은 구멍에서부터 물이 새어나와 결국 큰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죄를 갑자기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을 반성할 때 일어난 일만 가지고 반성하는 것은 잡초를 뽑되 뿌리는 남기고 보이는 것만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는 또 짓게 되어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빙산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죄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우리도 고해보기 전에 죄를 성찰할 때 그런 죄들이 무엇 때문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손과 그릇을 씻는 전통을 강조하는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은 결국 뒤로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자신 안에서 나오는 나쁜 경향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외적인 죄들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의도들’이 사람을 벌써 더럽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탕한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도 이미 간음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아도 마음 안에서 이미 그 음탕한 의도가 그 사람을 더럽혔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겉보다도 우리 마음에서 어떤 생각들이 나오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합니다.
결국 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경향들이 나 자신을 더럽힌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게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매일매일 충분히 먹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혹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을 초기에 잡아야합니다. 안 그러면 나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안 좋은 생각들을 계속 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며 초기에 뿌리를 뽑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나의 건강을 생각하며 간단한 운동이라도 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사랑의 소명 -이정호신부-
때 -윤인규 신부-
연중 제5주간 수요일 - 박기흠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당신 반대편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인습(1-8), 코르반에 대한 비판(9-13)에 이어 ‘금기 식품’에 대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전통주장들을 비판하시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 14-16)고 하시면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밝히신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정결례가 아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데, 마음의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 20-23)고 하신다. 예수님의 윤리는 양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실 우리 인간의 행동의 모든 방향과 계획은 양심에서 나온다. 마음의 굴절, 편견, 거짓과 위선적인 사회일수록 사람을 차별하고, 특권층과 소외층,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낳는다. 당시 이런 사회는 만연하였지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불결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런 예수님의 태도는 오히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갈등을 낳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오류를 인내로 참아주시지만, 거짓과 위선은 가차 없이 단죄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윤리야말로 안전한 윤리이며 겉모습이 아니라 양심을 중요시 여기시며, 마음을 덮고 있는 완고한 가면마저 벗겨 내신다. 예수님의 윤리와 양심 법에 어긋난 시대의 역설들은 우리들 가운데에서 잔재하여 우리들 시야를 어둡고 흐리게 하고 있다. 사람과 건물이 높아졌지만 우리 인격도 그만큼 높아졌는지?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우리의 시야도 그만큼 넓어졌는지? 과거 어느 때보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도 그만큼 많아졌는지? 학력과 지식은 높아졌지만 상식과 판단력 또한 그만큼 높아졌는지? 전문가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세상 문제는 줄어들었고, 약은 많아졌지만 양심은 그만큼 맑아졌는지? 아니면 너무 분별없이 향락에 빠지고 소비는 늘어나지 않았는지, 너무 성급히 화를 내며, 너무 드물게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더 깊게 배우고 넣는 법도 배워 익혀야 한다. 달도 갈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반대편에서 인생길을 외롭게 가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선물도 나눠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를 정복했고,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의 세계는 더욱더 회복하고 영혼의 오염은 더욱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김병로 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의 청결의식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군중을 가까이 불러 하신 말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는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복음은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주님께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몸을 더욱 살찌우고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나쁜 생각들·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 같은 악한 것들로 이것들이야말로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 -강영구신부-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부정(不淨)함과 정(淨)함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잣대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제자들의 부정함을 트집잡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29,13)를 인용하여 그들이 율법만큼 중요시하는 조상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7절), ’사람의 전통’(8절)이라고 단언하셨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에 불과한 것을 율사들은 하느님의 계명인 양 내세운 것을 질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조상의 전통은 하느님을 섬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행동이 율법상 정결을 깨뜨린 부정함의 행동이 아닌 셈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놓고 정결에 관한 율법을 다시 세워 주시는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고 진정 하느님 앞에 부정(不淨)함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15절) 이 말씀으로 신약의 새로운 "정함"과 "부정함"의 율법이 세워졌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것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것으로 구약에 불결하다 하여 금기한 음식들은 (레위 11장; 신명 14,3-21) 모두 폐기된 셈이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 정(淨)한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외에 다른 동물은 거의 부정한 것이어서 식용(食用)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그것도 주검에 닿으면 다 부정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식으로 삼았던 메뚜기(마태 3,4; 마르 1,6)는 식용으로 허용된 곤충(레위 11,22)이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모든 금기식품을 단 한마디 말씀으로 폐기해 버리셨다. 자연 그대로의 모든 음식물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사람을 더럽히고 하느님 앞에 부정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15절)이다. 여기까지가 바리사이들, 율사들, 그리고 군중이 들은 말씀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물러갔을까? 대변(大便)을 생각했을까?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한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변이 되어 배설되고 만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파고들어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不淨)한 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22절) 이는 곧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죄악의 목록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때문에 도리어 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예수께서 새롭게 세우신 규정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먼저의 것은 말이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마디의 말이라도 사랑과 깨끗함이 담긴 말이 되어야 하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 - 유광수신부-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창조된 모든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고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해 주신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주인이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잘 사용하고 잘못 사용하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창조된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좋고 나쁜 것은 창조된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음식 자체도 그렇다. 모든 음식물은 다 배에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은 인간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로써 음식 자체가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 다만 인간이 좋은 음식을 먹으면 좋은 것이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지 음식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식이든 음식은 다 배에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럼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즉 악의 출처는 사람 밖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이 올바라야 한다. 즉 아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마음이 통한다는 말은 서로 아는 것이 같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같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면 금방 알아듣고 서로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마음이 갈라진다는 말은 아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아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것을 가지고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생각이 다르니까 판단도 서로 다르게 하고 행동도 다르게 행하고 갈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당신이 함께 있겠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의 지성이 올바로 알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진리이다.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서로 뜻이 통하고 하느님과도 통하고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할 말씀이다. 즉 우리의 지성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가 하나될 수 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협력할 수 있다. 그래서 지성이 없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다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자기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먼저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지성적이지 못하면 감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감정에 의존하다보면 순간 순간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다. 감정은 바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 예민한 사람이 시를 쓰고 곡을 작곡하고 예술을 한다.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느끼는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인은 성격이 특별하고 예외적인 행동을 하기가 쉽다.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감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어떻게 비위를 맞추어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본인 자신도 모른다. 자기 감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직설적이고 즉흥적이다. 그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즉 감정이 가라 앉으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하는 식이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만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다. 인격자란 어느 한 가지 기능만 발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발전해서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인격자라 할 수 없고 균형잡힌 인간이 될 수 없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 정, 의의 세 가지 기능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행동들이 나오는 가장 큰 원인은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로마 1, 21) 어리석음이란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다. 아무리 자기의 생각으로는 맞는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라면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진리를 모르면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는 어제 복음의 말씀에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주위 환경이 아니라 내가 얼마큼 진리를 올바로 알아들었느냐에 달린 것이다. 내가 어리석으면 더러운 것이 나오고 내가 진리를 알면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 즉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 저녁에는 동창 신부와 함께 하는 즐거운 만남이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를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드라마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동창 신부 역시 예전에 드라마에 빠졌던 저처럼 그 시간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드라마를 꼭 봐야만 하는 중독에 걸린 것이지요.
요즘 이렇게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꽃보다 남자, 아내의 유혹, 에덴의 동쪽 등등……. 인기 드라마 보는 재미에 사신다는 분들도 있더라구여.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드라마에 사람들은 왜 푹 빠질까?’
그 드라마의 내용이 특별하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드라마의 내용이 우리의 일상 삶과 똑같으면 어떨까요? 별 특별한 일 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생활의 연속이라면 이러한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드라마에는 뜻밖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며, 교훈적인 내용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 뜻밖의 일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특별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고, 교훈적인 내용까지도 얻을 수 있기에 그 시간만 되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문득 우리의 삶도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미운 사람을 더 예뻐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 삶이 드라마와 같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드라마 같은 내 삶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전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드라마와 같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들이 피해야 할 것들을 말씀해주시지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들은 모두 잘 나가는 드라마처럼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갖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멋진 드라마를 만들도록 합시다.
멋진 드라마는 연말이 되면 상도 많이 받더군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만들어나가는 이 삶도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평가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멋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노동이 신체를 굳건하게 하듯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것은 정신을 강하게 한다.(세네카)
“어느 날 하느님이 자매에게 ‘너, 앞으로 40년은 건강하게 살게 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자매는 기왕 사는 거 예쁘게 살겠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들여서 싹 뜯어고쳤다. 이제 좀 살아야지 하는데 그만 죽었다. 하느님께 항의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뜯어고쳐서 못 알아보았다.’”
물론 건강하고 예쁜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얼짱·몸짱이 아니라 ‘맘짱’이 아닐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 사랑이 많은 맘짱. 하지만 세상은 맘짱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남들은 어찌되었든 자기만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주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하신다. 주변 것들보다 우리들 마음의 더럽고 추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맘짱인 사람이라면 마음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칠 것이다. 그래서 맘짱인 사람들한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악한 선, 선한 악
-김찬선신부-
요즘 우리는 창세기를 계속 듣습니다.
어제, 그제의 창세기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당신 뜻대로 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창세기 말씀은
주 하느님께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좋도록 만드셨고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것을 나쁘다고 보는 것이고
나쁜 것으로 만듭니다.
술이 나쁘다고 합니다.
술이 악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애초에 하느님께서 빚은 술은 좋은 것, 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 뜻에 맞게 먹는 사람에게는 선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술은 선한 선입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은 사람에게 술은 나쁩니다.
술을 고약하게 먹는 사람에게도 술은 나쁩니다.
이런 사람에게 술은 선한 악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시는 그 사람은 좋다고 합니다.
좋아 하니 그렇게 퍼 마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건강에 안 좋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도 그 사람은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술은 악한 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불교에서 내려오는 말에
소는 물을 먹어서 젖을 만들어내고
뱀은 물을 먹어서 독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물인데,
소는 그것을 가지고 이로운 젖으로 만들어내고
뱀은 그것을 가지고 해로운 독으로 만들어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고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면 그 사람을 살리고
그것을 잘 살면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을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국에는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합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지금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피정 중입니다. 그런데 피정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기도와 묵상도 하겠지만, 낮 시간에는 잠깐 쉼의 시간이 있어서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지요. 저 역시 이 시간에 운동을 하려고 자전거를 가지고 갔습니다. 사실 제가 있는 간석4동 성당 근처에서는 자전거 탈 곳이 그렇게 마땅하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강화도는 자전거 탈 곳이 너무나 많아서 가지고 간 것이지요.
아무튼 어제 점심 식사 후 저는 복장을 갖추고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두 달 만에 타는 자전거입니다(물론 동네에서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이렇게 복장을 모두 갖추고 타기는 올해 처음입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코스는 전에 주로 타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적당히 땀을 낼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무리가 되지 않는 길이지요. 두 시간 정도 탈 것을 생각해서 40Km 정도의 거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만에 ‘힘들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예전에는 땀도 흘리지 않고 오르던 길이 왜 이렇게 가파르게 느껴지던 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학교에 도착할 때쯤에는 다리에 쥐까지 났다는 것입니다.
전에 강화도에 살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왜 어제 일어났을까요? 제 자전거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강화도의 길이 바뀐 것일까요? 아니면 저 자전거 잘 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두 달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은 몸이 ‘힘들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나’로부터 시작된 문제점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들은 ‘나’ 아닌 외적인 것에 그 문제점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로 외적인 것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문제점도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나쁜 생각들과 나쁜 행동들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던 창조물인 사람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은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나쁜 생각을 없애고, 내 밖으로 나오는 나쁜 행동들의 수를 줄여 나갈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며 “참 좋다.”라는 하느님의 고백을 우리 역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
유다인들의 정결 예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식이나 사람 등
부정함을 피하는 것은 죄로 물든 세상과 구분되어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한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각을 심어주었고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 취급하였으나
이것이 지나쳐 그 본래 의미를 망각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은 이러한 폐쇄적인 구분을 넘어 넓은 마음으로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상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는
신앙의 삶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미사참례와 기도, 선행 등의 외적인 실천뿐만이 아니라
그 실천을 이끌어내는 마음속 사랑의 자세가 그것입니다.
마음에 간직된 것은 말로나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선한 지향과 자비로운 사랑을 품고
기쁨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이미 개신교인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인구 세 명 중의 한 명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 사랑의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화등선(羽化登仙). 그것은 번데기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벌레에서 비롯된 말이다. 벌레는 알에서 깨어나 충이 되고, 번데기가 되고, 날개를 달면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나는 빛깔과 춤사위 재주로 보아서는 그것이 땅바닥이나 나뭇가지를 기어다니던 징그러운 벌레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벌레의 변태과정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신앙은 시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교회의 전례력은 신앙인에게 ‘때’를 성찰케 하는 시간표다. 세상과 사람의 처지를 성찰케 하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성찰케 한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더 본질적이고 더 근본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의 본성이요 하느님 계획이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시작과 끝, 과정에 대하여 애정을 갖게 한다. 그리고 시간 때문에 생기는 기쁨이나 괴로움을 멎게 한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두 가지 모두 시간 자체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이나 만남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시간을 길이나 무게로 느끼지 않는 길은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뿐이다. 유다인의 관습으로 빚어진 논쟁의 핵심은 시간을 성찰하지 않은 전통 때문이다. 손을 씻는 관습은 시간 속에서 생겨나 사라질 수 있는 인습(因習)인데도 본질로 착각한다. 시간에 대한 성찰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본질로 인도하여 하느님께 이르게 한다.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로 생겨난 전통들이 우리에게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통을 준수하고 지키는 것은 그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며 때로는 이롭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스스로 자신을 두고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선하다’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과 가면을 성실하게 벗겨 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그 전통들이 한낱 인습에만 매달려 천륜과 인륜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고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파손된다면 그 전통은 쇄신되거나 부정(否定)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명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 중 과연 주님 마음에 들 정도로 제대로 된 생각·말·행동이 얼마나 될까? 조금이라도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사는 이들이라면 “주님,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존귀하며, 가치있는 것들이기에 사람들을 더욱더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들입니다”라고 응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언제나 내가 남긴 말이나 행동이, 또 그가 남긴 말이나 행동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은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우리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하리라.
스승 예수님, 당신의 말씀은 천만 번 지당합니다. 정말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것과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생각은 하지 않고 겉꾸밈으로 자신을 가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겉꾸밈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예뻐지거나 날씬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컬어 명품이라는 물건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도 합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로 자신을 겉꾸미기 위해서 권모술수, 사기, 수뢰, 협박, 공갈, 부정, 야합, 살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처절하게 겉꾸밈 한 결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창합니다. 그러나 속은 썩을 대로 썩어서 온갖 악취가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마치 쓰레기더미나 똥 덩어리를 金으로 포장한 것과 같은 꼴입니다. 쓰레기나 똥 덩어리를 금으로 포장한다고 쓰레기나 똥이 금덩이가 될 리는 없지요. 어리석은 저희들을 굽어 살피소서.
예수님, 저는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안경이나 투시경이 있다면 이 세상은 천국天國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 환히 드러나는 속마음을 가꾸려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예쁜 얼굴보다 아름다운 마음, 날씬한 몸매보다 따듯한 마음, 고급 화장품과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한 외모보다 맑고 밝은 마음, 고급 상표의 명품을 걸치기보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겠지요.
대통령을 뽑을 때도, 국회의원을 뽑을 때도 누가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는지 보고 뽑게 되겠지요. 사제나 수도자들도 모두 맑고 밝은 마음(淸淨心) 가꾸기에 여념이 없겠지요.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함께 어울려 산다면, 거기가 天國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3-12) 오늘도 아름다운 마음 가꾸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닫도록 하여라."는 말씀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도록 노력하여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삶의 근본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럼 삶의 원리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이다.
마음이란 어느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마음이란 지, 정, 의가 만나는 곳이다. 즉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아지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 중에서 어느 한쪽으로 너무 취우치지 않고 서로 알맞게 균형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요,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훈련을 하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훈련을 쌓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즉 지적으로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없거나 의지가 약하면 인격자라고 할 수 없다. 또 감정은 풍부한데 아는 것이 없으면 변덕스러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 자기 감정에 따라 생각이 변한다. 즉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다.
의지만 강해도 안 된다. 의지만 강할 때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만 내 세운다. 무엇을 모르니까 자기 생각이 제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고집불통, 요지부동, 옹고집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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