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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황하다 마흔다섯 살에 데뷔 |'노래 인생 30년' 가수 장사익
장사익은 주름살을 ‘인생의 계급장’이라 부른다. “제가 이렇게 웃기 시작한 것은 노래를 부르게 된 뒤부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웃기 시작하니 점점 웃을 일이 더 많이 생겨요. 웃음이 웃음을 부르는 거예요. 이젠 웃지 않은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낯설어요.”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얼굴에 우리나라 산천처럼 굴곡이 있다. 지나온 삶을 이력서로 쓸 때 열댓 가지 직업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보험 외판원, 인쇄소,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종업원, 독서실 매니저, 과일 노점상, 카센터 직원. ‘찔레꽃’ ‘꽃구경’으로 유명한 가수 장사익은 이미자와 콘서트를 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애국가를 부를 정도로 한국을 대표한다.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남자는 ‘7학년 5반’, 일흔다섯 살이다.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나서 가수가 되기 전에 숱한 직업을 전전했다. 1년도 못 채우고 잘리거나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마흔다섯 살,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인다는 나이에 그는 가수로 데뷔했다. 올해로 노래 인생 30년. 인생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천직을 찾은 셈이다. 감회를 묻자 “데뷔 10주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10년이 하루’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했는데 지난 30년이 꼭 사흘 같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나이테 같은 무늬가 얼굴에 일렁였다.
그 주름살은 장사익 말마따나 ‘인생의 계급장’이다. 주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웃는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면 이 가객(歌客)은 봄여름 다 보내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반환점을 돌아 노래를 하기 전까지는. “힘들고 넘어지고 깨지기도 했지만 그 좌절과 방황의 시간이 쌓여 저를 일으켜준 것 같아요. 제가 부르는 노래는 뜨거운 세월 다 보내고 들판에 핀 가을꽃입니다. 지나온 인생의 굽이굽이가 다 감사해요.”
◇ 봄여름 다 보내고 핀 가을꽃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홍은동 그의 자택 앞 계곡물이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주앉은 장사익은 직접 찻물을 끓이며 보이차를 권했다. “이거 댓 잔은 마셔야 재미난 이야기가 나와요.”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이 통창 밖 산비탈을 보세요. 봄에는 개나리·진달래가 성곽을 타고 넘는 게 보여요. 여름에는 초목이 무성해지고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눈으로 하얗고. 저는 시골에서도 산등성이에 살았어요.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체감할 수 있으니 사시사철 다 좋아요.”
-시(詩)를 노래로 옮기는 가객인 줄로만 알았는데, 올 초에 쓴 희망편지를 보니 글도 좋더군요.
“저는 가는 곳마다 은인이 생깁니다. 개중에 사기꾼도 있지만 돌아서면 결국 도움이 돼요.”
-사기꾼도 도움이 됩니까.
“넘어지면 무릎에 딱지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넘어뜨린 그 사람 때문에 제가 툭 털고 일어나 걸을 수 있어요. 희망편지가 실리고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노래가 99%인 사람이에요. 글을 쓸 일은 별로 없는데 이렇게 또 저를 살려주시는구나, 생각했지요. 오늘 오전에는 김민기씨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
고교 졸업 후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1992년 카센터에서 퇴직한 뒤에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태평소 연주였다. 이 태평소가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악기였다.
-생전에 인연이 있었나요.
“한 번도 안 만났으나 음악적 교류가 있었어요. 나보다 나이는 밑이지만 그분의 음악과 삶을 존경해요. 꽃으로 말하자면 안개꽃 같은 사람.”
-왜 안개꽃인가요.
“나서질 않았잖아요. 다른 꽃들을 위해 배경이 돼 주고 받쳐주고. 자신이 폼을 잡거나 돋보이려 하지 않은 뒷것, 뒷광대였지요. 제가 베토벤을 좋아하지만 그와 악수 한 번 해본 적 없듯이, 김민기씨와도 음악으로는 늘 소통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마다 매미 울음 소리가 들리네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더 필사적으로 울겠지요. 자연에는 순서가 있어요. 5월에 보리가 익을 때쯤이면 산에서 뻐꾸기가 웁니다. 한여름에 매미가 울고 나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거예요.”
-몇 년 사이에 얼굴 주름이 더 늘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은 보톡스로 다림질을 하는데.
“그거 해봐야 며칠이나 가겠어요. 주름살은 추한 게 아니에요. 아름답게 보일 땐 정말 멋있어요. 저는 꾸미지 않고 나이 먹은 티가 나는 노래를 합니다. 좀 어둡고 슬프지만 인생을 돌아보고 관조하는 노래. 꼬부랑 할아버지가 될지언정 분장도 염색도 안 해요.”
-어느덧 데뷔 30년입니다.
“30년이 꼭 사흘 같아요(웃음). 저도 모르게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검은 머리도 파뿌리같이 하얗게 변하고. 제가 노래하면서 행복하게 보낸 이 30년, 정말 꿈만 같습니다. 다 들어주신 여러분 덕분이지요.”
* 시를 노래하는 가수 장사익은 “가슴 절절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관조하는 시를 가려낸다”고 했다. “가락을 붙이는 건 일사천리고요. 그렇게 태어난 노래가 살아가는 데 지팡이처럼 힘이 돼주길 바랍니다.”
◇ 꽃을 준다, 나에게
오는 10월 2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장사익 30주년 소리판이 펼쳐진다. 공연 제목은 ‘꽃을 준다 나에게’. 팸플릿에 “사랑한다, 축하한다. 남들에겐 스스럼없이 건넨 꽃, 돌아보니 나에겐 꽃 준 적 없네. 노래 인생 30년을 다독이며 꽃을 준다, 나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꽃도 셀프? 제목을 좀 설명해주신다면.
“사실 주제를 정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작년 가을에 누가 보내준 시 3편 중에 ‘꽃을 준다 나에게’가 마음에 닿았습니다. 딱 내 얘기 같았어요. 그동안 남들한테만 꽃을 줬지 정작 나한테 준 적은 없으니까요. 마흔다섯에 뒤늦게 찾은 이 직업으로 30년을 살았으니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 내가 나한테 훈장을 주자!”
-격려받고 싶을 때가 더러 있지요.
“맞아요. 사실은 당신들 얘깁니다. 있으나 없으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힘들고 아프지만 견디며 살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우리는 저마다 인생의 승리자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외모는 데뷔 50~60년쯤 된 원로 가수 같은데 실제론 30년밖에 안 된 거 아닙니까.
“아직 팔팔한 축이죠(웃음). 그래도 늦게 출발해서 쉬지 않고 이만큼 달려왔다는 게 스스로 대견해요.”
장사익은 1992년 ‘내가 이거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닐 텐데‘라는 생각으로 카센터에서 퇴직한 다음에야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일명 날라리라 불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태평소.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이 국악 관악기를 붙잡고 3년을 매진해 프로가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분 남자가 바로 장사익이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 태평소를 불던 그 아저씨가 전율의 소리꾼이 될 줄이야.
30주년 기념으로 10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꽃을 준다 나에게'
-막연하지만 막을 수 없는 꿈을 꿨군요.
“젊을 땐 객기가 있었어요. 상고 졸업하고 보험사 외판원을 하며 3년간 서울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가수학원에 다녔습니다. 현실에 치여 직업을 옮겨다녔지만 언젠가 노래를 하고 싶다는 그 씨앗 하나는 버리지 않았어요. 꿈이 있었기에 시간을 쪼개 악기를 배웠고요.”
-데뷔하던 날 기억하시나요.
“1994년 11월 홍대 앞 100석짜리 소극장이 생생해요. 400명씩 들어와 미어터졌지요. 평생 처음으로 목돈을 만졌어요. 말도 안 되는 촌놈이 국악도 가요도 재즈도 아닌 노래를 하는데 신기하고 재밌단 말이에요. 출시되자마자 히트한 상품처럼 제가 막 불려다녔어요. 한 달 만에 누가 ‘공짜로 음반 내주겠다’고 해서 1집이 나왔는데 사기도 당하고. 하하.”
-가수로 30년 살아 보니 어떤가요.
“행복하죠. 이렇게 웃는 게 그 증거예요.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시절의 제 사진을 보면 얼굴이 죽상이거나 굳어 있어요.”
-돌아보면 언제 가장 죽을힘을 다해 살았나요.
“태평소를 연습하던 3년이죠. 밤 12시에 잠실 한강변에서도 불고 이불 속에서도 불며 독학했어요. 정말 무섭게,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성장했어요. 하찮은 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뒤에 숨어 있던 노래의 길이 마침내 열린 거예요.”
-마흔다섯까지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궁시렁궁시렁, 땅속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죠. 매미처럼 국화처럼. 사실 여름이 제일 힘들어요. 국화는 가을에 찬 서리가 내리면 그제야 나오잖아요. 봄꽃은 금방 시들죠. 꽃자리에 생긴 열매가 지루한 장마와 폭염을 견디며 성장합니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가을에 더 탐스럽게.”
-열댓 가지 직업들이 알게 모르게 인생 밑천이 되었겠습니다.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요즘 가수들은 10대에 연습생을 시작해 30대가 되면 은퇴하잖아요. 그들이 데뷔한 다음에 인생을 배운다면 저는 거꾸로예요. 인생을 배우고 나서, 쓰러져도 일어설 힘을 비축하고 나서 가수가 된 겁니다. 노래도 일종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몸으로 겪은 희로애락에 대해 젊은 가수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요새는 눈만 뜨면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사고 나고 누구는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요. 제 인생을 90까지라고 보면 저는 7학년 5반이니 죽음에 초연해야져야 할 나이지요. 이어령 선생이 '영웅도 2~3년이면 잊어버린다'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 오늘 하루를 재밌게 살아야죠."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나는 같이 울어주는 사람”
장사익은 독창적 창법과 토착의 서정을 가지고 있다. 정해진 박자도 없이 흥얼거린다. 신세 한탄처럼 들리기도 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읊조리듯이 낭송하는 노래”라며 “무박(無拍)도 박자”라고 말했다.
-아이고, 반주하는 분들이 힘들 텐데요.
“가수한테 맞춰야지, 하하. 이번에 나온 10집에 마종기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우화의 강’이 있는데 재밌어요. 이런 강 하나 가슴에 품고 살고 싶었죠.”(그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로 흘러가는 이 노래를 즉석에 불렀다.)
-그렇게 시를 노래로 옮길 땐 일일이 허락을 받나요.
“그럼요. 한 20년 전에는 시인이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수라고 무시한 거죠. 무임승차한다 생각하고. 그런데 시가 원래 노래잖아요. 너도나도 자꾸 노래로 불러줘야 시에 생명력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15년 전쯤부터는 시인들이 거꾸로 저한테 시집을, 시를 보내옵니다.”
-가수 유전자를 물려받았나요.
“아버지가 신명이 있었어요. 동네 농악대에서 아버지가 노동요처럼 풍악을 울렸는데 장구를 잘 치셨고 흥이 좋았지요. 그 끼를 받아 제 몸에 우리 가락이 붙은 것 같아요.”
-직업이 돼지장수였다고 들었습니다.
“충청도에선 ‘돼지장사’라고 했어요. 목돈 만질 일은 곗돈과 돼지밖에 없던 시절이에요. 농사는 오래 걸리고 망하기도 하니까. 돼지는 1년에 두세 번 새끼를 10마리씩 낳아요. 아버지는 자전거 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녔어요. 어느 집에서 새끼를 낳는지 본 겁니다. 장이 설 때 리어카로 내다 팔아주면서 수수료를 받으셨고요.”
-아버지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돼지냄새. 아버지한테서 항상 돼지냄새가 났어요. 난 그게 너무 좋았어요, 하하. 우리 집 돼지들도 구정물 받아다 키우면서 친구처럼 지냈죠. 어머니도 무학(無學)인데, 아들이 성공하는 모습은 보고 가셨어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내일 하시면서도 ‘내 아들이 노래하는 장사익이야’ 자랑을 하셨지요(웃음).”
* 최근에 나온 장사익 10집 '사람이 사람을 만나'. '뒷짐' '사람이 사람을 만나' '나는 가야지' '황성옛터' 등 8곡이 담겨 있다.
-이번 공연도 1부는 슬프고 2부는 나이트클럽인가요.
“그렇죠. 관객을 울렸다가 웃깁니다. 일종의 ‘마음 샤워’예요. 세상 사람 열에 아홉은 힘든 하루를 보내잖아요. 진정한 위로는 같이 울어주는 거예요.”
-‘꽃구경’은 1부에 들어 있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 든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현대판 고려장을 그린 노래지요. 솔직히 요즘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자식들이 울지 않습니다. 눈물이 메말랐어요.”
-왜 그럴까요.
“돈으로 요양병원 같은 시설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외주화라고 할까요. 내 일상으로 건너오지 않도록,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도록, 안 보이는 곳에서 제3자가 그 일을 처리합니다. 저는 하찮은 유행가를 부르는데 다들 눈물을 펑펑 터뜨립니다. 그때는 진심인 것 같아요.”
-장례식에서 조가(弔歌)도 많이 부르시더군요.
“그런 자리에서는 ‘연분홍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유행가 ‘봄날은 간다’가 으뜸이에요. 서양에는 장엄한 레퀴엠이 있잖아요. 천상병의 ‘귀천‘도 불러주고 영정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슬픔을 쓸어내려면 슬픈 노래가 필요하고요.”
-곡비(哭婢), 대신 울어주는 사람처럼요?
“네. 울고 싶어 장사익 공연에 온다는 분도 많아요. 나 대신 슬퍼하는 가수가 그곳에 있으니 덩달아 우는 거예요. 비 온 뒤에 세상이 맑아지듯 나올 땐 개운해져요.”
* 장사익은 구수하면서도 찰진 목소리로 ‘봄날은 간다’ 등 삶의 애환을 토해내는 노래를 불렀다.
◇ 3년만 죽을힘을 다해 보세요
장사익은 2016년에 성대 결절 수술을 받고 8개월 동안 발성 연습을 하며 노래로 가는 길을 되찾았다. 목소리가 맑아졌지만 전처럼 파워풀하지는 않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그가 애국가를 불렀다.
-요청을 받고 놀라셨겠어요.
“얼래, 이 쭈그렁뱅이한테 애국가를? 통상 성악을 하는 분들이 하거든요. 개막식에는 북한 김여정이 와서 애국가를 못 불렀어요. 저는 키를 높여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외국인들도 들을 텐데 ‘이 나라 사람들 에너지가 이렇게 크구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싶게요. 길이를 두 배로 늘여서 천천히, 우리나라 산천처럼 굴곡지게. 노래에도 뼈가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애국가나 유행가처럼 모두가 다 아는 노래는 자기만의 창법을 요구해요. 가수가 잡아내 표현하는 핵심이 바로 노래의 뼈예요.”
-노래할 때 보면 눈가가 촉촉합니다.
“방송국 카메라는 그걸 놓칠세라 얼굴을 클로즈업해요. 여느 가수와 달리 저한테 유난히 많아요. 슬픔을 극대화하는 거예요. 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기네 아버지 같은지 괜히 울고 싶어진대요, 하하. 좋은 의미로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해요.”
-가객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가슴 절절하고 아름답고 세상을 관조하는 시를 가려내야 해요. 그 과정이 오래 걸립니다. 가락을 붙이는 건 일사천리고요. 그렇게 태어난 한 곡 한 곡이 살아가는 데 지팡이처럼 힘이 돼 주길 바라죠.”
* 온갖 직업을 거치며 방황하던 장사익은 1990년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 취직했다. 그는 “‘인마’라고 부르던 매제를 ‘사장님’이라고 깍듯이 불렀다”고 말다.
-장사익에게 노래란 무엇입니까.
“부끄럽게도 저는 열댓 개 직업을 갈아타면서 살았지만 노래는 30년을 꾸준히, 쉬지 않고 해 왔습니다. 가수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때 찾아온 직업입니다. 그래서 노래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요. 정성껏 불러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래는 제 운명입니다.”
-마흔다섯 살에 천직을 찾은 분으로서,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청년이나 노인이나 세상살이는 쉽지 않아요.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사람한테는 하루하루가 기회이고 무대죠.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불만투성이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질 않아요. 인생은 딱 한 번뿐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적어도 3년만 최선을 다하고 기회를 잡으세요. 소소한 것이라도 목숨을 걸면 일가를 이룹니다. 내 인생이 증명해요.”
-사람들 열에 아홉은 힘들다 하고 ‘이생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인생 조진 거 아닙니다. 고생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잘 사는 사람이에요, 하하.”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웃기 시작한 것은 노래를 부른 다음부터예요. 복이 와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니 복이 와요. 웃는 게 앞이여. 진리여 진리. 웃지 않는 내 얼굴은 이제 낯설어요.”
보이차를 대여섯 잔 마셨다. 골곡진 삶의 이력을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는 자의 청량한 달관을 만났다. 인생의 신산함도 알고 전화위복의 이치도 아는 듯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얼굴에 파도 치듯 또 한바탕 주름이 일렁였다.
✵ 장사익(張思翼, 1949- )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출생. 광천중학교, 성린상업고등학교, 명지대학 경상학부 경영학 학사.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 가는 길'로 데뷔, 대한민국의 가수. 대중음악 전문 가수. 그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느낌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다. 국회 대중 문화상, 미디어 대상 국악상을 수상 하였다.
대표작으로 찔레꽃이 있다. 자신의 처지와 닮은 찔레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앨범은 1집 《하늘 가는 길》(1995년), 2집 《기침》(1999년), 3집 《허허바다》(2000년), 4집 《꿈꾸는 세상》(2003년),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년), 6집 《꽃구경》(2008년), 공연실황 라이브 앨범 《따뜻한 봄날 꽃구경》(2009년), 7집 《역》(2012년),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년), 9집 《자화상》(2018년)이 있다.
✺ 장사익의 꽃인듯 눈물인듯, '찔레꽃'
찔레꽃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장사익(1949- ) 앨범 「하늘 가는길」, 1997
장사익이 만들고 임동창이 피아노 연주, 편곡과 프로듀서를 맡아 6시간 만에 녹음을 한 앨범이 제1집 <하늘 가는 길>이고 「찔레꽃」은 이 앨범에 수록된 10곡 중 첫 번째 곡이다. 이 노랫말에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찔레꽃」 탄생 배경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해거름 녘 벽에 가사를 붙여놓고 가만히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왔어요"(경향신문)
“한때 서울 잠실에 살았습니다. 1994년 5월쯤인가, 집 앞길을 걸어가는 데 바람결에 문득 좋은 향기가 스며있었어요. 처음에는 장미꽃 향기인 줄 알고 그 향기를 따라가 봤죠. 그런데 바로 뒤에 숨어있던 찔레꽃 향기였어요.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어요. 이게 바로 나로구나!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내 처지가 너였구나, 노래 가사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펑펑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이 곡을 만들었어요. 제 인생을 바꿔준 노래죠”(헤럴드 경제)
"자전적 노래예요. 화려한 장미꽃 사이에 볼품없이 피어있는 찔레꽃, 그러나 화려한 장미에겐 찔레꽃과 달리 어떤 향도 없죠. 아주 힘든 시절 찔레꽃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곤 했습니다"(코리아 패션 뉴스)
시냇물이 흐르듯 고요하게 시작한 그의 노래는 넓고 깊어 듣는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충분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크게 소리치고 싶었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하지 못한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소리를 그는 단숨에 번에 토해준다.
✵ 소리꾼 장사익(張思翼) 1949년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에서 태어나 광천중학교 거쳐 1968년 선린상업고등학교를 마치고 1993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장사익이 음악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원에서 한동훈과 정경천에게 대중음악을 배운 뒤, 군에서는 문화선전대에서 가수로 노래를 하였다. 전역 후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생활을 위해서 무역회사, 전자회사, 가구점 등 회사를 전전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잊을 수 없어 1980년 아마추어 국악 단체인 한소리회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단소와 피리를, 1986년 대금의 대가인 원장현에게 대금산조와 태평소를, 강영근에게 정악 피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국악기를 배우던 장사익은 시간이 아까워 3년 동안 본격적으로 음악에 전념해보기로 하고 카센터를 정리한다. 이때가 1991년이다.
이때부터 태평소에 전념한 장사익의 노력은 그가 소속된 공주농악과 금산농악이 1994년 전주대사슴놀이에서 차례로 장원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당시 이광수, 서유석, 임동창 등과 자주 어울렸던 그가 뒤풀이에서 부른 노래 솜씨에 매료된 임동창은 그에게 가수로 데뷔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장사익이 만들고 임동창이 피아노 연주, 편곡과 프로듀서를 맡아 6시간 만에 그의 자전적 이야기인 「찔레꽃」을 비롯한 광천 지방의 상엿소리를 재해석한 제1집 <하늘 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47살 늦은 나이로 자신의 꿈이었던 가수의 길에 들어선다.
임동창의 피아노 반주와 장사익의 절절한 노래를 들은 음악 평론가 강헌은 〈리뷰〉1996년 봄호에서 극찬하였고, 그 영향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996년 KBS 국악대제전에서 그가 소속된 ‘뜬쇠사물놀이’가 대통령상 받은 뒤,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음반 ‘하여가’에 김덕수와 함께 태평소 연주를 담당한다. 그러나 가수로서 그의 인기는 아직 미미했다.
그런 장사익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7년 TV 드라마 < 임꺽정 > OST ‘강물처럼 흘러서’, ‘티끌 같은 세상, 이슬 같은 인생’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비로소 그는 대중가수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대중가요로 시작한 그의 노래의 근원을 그는 대중가요, 팝, 클래식 음악, 국악 등 모든 장르가 다 녹아있다고 한다.
이렇게 20년 넘게 노래를 한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생겼다. 2016년 성대에 혹이 생겨 수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이 오히려 값진 시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아랫소리가 자꾸 닫히고 서걱거려서 병원에 다녀왔죠.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막막했어요. 노래하는 사람에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벌써 2년쯤 됐네요. 절망적이었지만 건강하게 오래 노래하라는 긍정적 신호로 생각했어요. 수술하고 딱 7개월 쉰 다음 복귀 콘서트 <꽃인 듯 눈물인 듯>을 열었죠. 지금 부르는 노래는 수술 전에 부르는 노래와 달라요. 쉬면서 내 노래가 내 소리가 더욱 소중해졌어요. 앞으로 노래하면서 더욱 진실한 마음과 진정성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고난을 겪고 나면 행복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그러잖아요. 제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랄까 그런 거예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 애국가를 부른 장사익은 나이 일흔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아름다운 가객의 「찔레꽃」을 오래오래 듣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장사익 - 봄날은 간다 [가요무대 KBS 240916 방송]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 하늘 가는 길/ 장사익
간다 간다 내가 돌아간다
왔던 길 내가 다시 돌아를 간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진다 설워마라
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한번간 우리인생 낙옆처럼 가이없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하늘이 어드메뇨 문을 여니 거기가 하늘이라
문을 여니 거기가 하늘이로구나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하늘로 간다네 하늘로 간다네
버스타고 갈까 바람타고 갈가
구름타고 갈까 하늘로 간다네
어 허아 어허야 아 어 허아 어허야 아 아 ~
하늘로 가는길 정말 신나네요
✺ 기침/ 신백승 시, 장사익 노래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밥그릇의 천길 낭떠러지 속으로
비굴한 내 한몸 던져버린 오늘
삶은 언제나 가시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봐도
별자리마저 제집을 찾아가는 새벽녘까지
나의 마른 기침은 멈출 줄을 모른다
✺ 허허바다/ 장사익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
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
다시 떠나가 보니 떠나온 곳 없네
살아도 산 것이 없고
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
해미가 깔린 새벽녘
태풍이 지나간 허허바다에
겨자씨 한 알 떠 있네
✺ 시골장/ 장사익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
연필로 편지쓰듯 푸성귀 늘어놓고
노을과 어깨동무 하면 함께 저물더라
"오늘 좀 어떻대요?"
"오늘장 그냥 그려"
"네 저 출출하신디 약주한잔 하시죠"
"이,,좋지"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
연필로 편지쓰듯 푸성귀 늘어놓고
노을과 어깨동무 하면 함께 저물더라
"잘 먹었네, 다음장에 또 와"
"네, 편히 들어가세요"
✺ 꿈꾸는 세상/ 장사익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베풀며 나누는 따스한 세상
맑은 물 흐르고 푸른산 드높은
그런 세상 꿈을꾸며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구름이 오면 구름을 타고
바람 불면은 바람을 따라
멀리 멀리 높이 높이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날고 싶어요...
✺ 꽃구경/ 장사익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고 아들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꽃구경 봄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웅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따뜻한 봄날 꽃구경/ 장사익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피면 같이 웃고 꽃이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뜨면 서로 웃고 별이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역/ 장사익
잎사귀 하나가 가지를 놓는다
한세월 그냥 버티다 보면
덩달아 뿌리내려 나무될 줄 알았다
기적이 운다
기적이 운다
꿈속까지 찾아와 서성댄다
세상은 다시 못 올 역일 뿐이다
✺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꽃인 듯 눈물인 듯〉/ 장사익
아주 작은 생명 하나 꽃처럼 생겨나
엄마 사랑 듬뿍받고 꿈결속에 노닐다가
몸 커져 엄마 바다 꽉찬 어느 날
큰 울음 터뜨리고 세상에 나왔네
반갑다 반가워 소중한 내 아기야
반가워요 반가워요 만나서 반가워요
목말라 지치고 방황하며 헤맬 때
기댈 어깨 내어주던 바위같은 친구들
좋은 인연 고마운 인연 징검다리 밟고서
굽이굽이 인생길 이렇게 노래하니
고맙다 고마워 소중한 내 친구야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봄 여름 지나간 가을들판에
저 멀리 피어 있는 가을꽃처럼
뜨거운 세월 다 보낸 뒤늦은 나의 노래
흐르는 강물 지나가는 바람도 들을 수 있고
지치고 외로운 이 힘이 되고 친구되는 노래
나는 목놓아 원없이 부르고 싶네
세상에 태어나 반갑고
좋은 인연 모두모두 고맙고
노래하는 내 인생 기쁘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목포는 항구다 〈꽃인 듯 눈물인 듯〉/ 장사익
영산강 안개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 청춘 고백 〈꽃인 듯 눈물인 듯〉/ 장사익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것 이 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많은 내청춘
좋다할 땐 뿌리치고 싫다할 땐 달겨드는
모를것 이 내 마음
봉오리 꺾어서 울려 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많은 내청춘
✺ 자화상/ 장사익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료출처 및 참조: 조선일보 2024년 08월 17일(토)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 IZM(www.izm.co.kr, KBS1 [1865회] 가요무대 - 장사익의 소리길 고향길 2024년 09월 15일(월)/글과 사진: 이영일 yil2078@hanmail.net]
첫댓글 무원 김명희 화가
제가 유일하게 장사익 노래를 좋아합니다. 음악회는 티켓이 워낙 비싸 못 가지요.
오늘 모처럼 색소폰으로 찔레꽃을 불러보렵니다.